대화
페미니즘, 대학을 바꿔라
강이수 姜怡守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저서 『일·가족·젠더』 『한국 근현대 여성노동』 『여성과 일』(공저) 등이 있음.
김현미 金賢美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저서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 공저서 『돌봄이 돌보는 세계』 『젠더와 사회』 등이 있음.
백영경 白英瓊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대담집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및 공저서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배틀그라운드』 『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 등이 있음.
엄혜진 嚴慧珍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공저서 『페미니즘 교육은 가능한가』 『그럼에도, 페미니즘』 등이 있음.
백영경(사회) 안녕하세요, 오늘 진행을 맡은 백영경입니다. 이번호 대화에서는 대학개혁의 필요성과 페미니즘의 역할에 대해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창비가 3년 전 「페미니즘이 대학을 구한다」(『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좌담을 진행한 바 있는데, 최근 다시 살펴보니 생각보다 시간차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공정 담론이나 혐오 문제에 치중한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간달까, 신선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오늘은 그 문제의식을 이어 받아 현재 대학은 어떤 모습인지, 페미니즘은 거기서 어떤 역할을 했고 대학의 성평등은 얼마만큼 진전했는지를 짚어보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특히 최근 사회적 논의가 집중되고 있는 20대의 젠더갈등이나 혐오정서 확산 문제를 넘어 대학 내부의 문제를 살펴보았으면 하는데요. 민주적 문제해결을 어렵게 하거나 도리어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대학 자체에 대한 고민과 페미니즘 교육 과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면 좋겠습니다. 이번 대화에서 대학개혁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식 생산의 장소이자 고등교육 기관으로서 대학이 가지는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공간이면서도 어느새 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기보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낙후된 공간으로 여겨지게 된 대학의 현재 위치와 모순 때문입니다. 한때 대학은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고 민주주의적 토론 속에서 시민다운 시민의 성장을 이끄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기대받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관점으로 대학 현실을 짚어보는 것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 현주소를 점검해보는 과정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의 교수 경험이 있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고 있고, 싸워오신 분들을 모셨는데,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페미니즘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들려주시면 좋겠네요.
강이수 우리나라에 첫 여성학 강의가 열린 게 1977년이고, 저는 대학 신입생 시절인 1978년에 처음 여성학 교양수업을 듣게 되었어요. 굉장히 열정적인 분위기에서 수업이 진행된 기억이 납니다. 그뒤 3학년 때 현장조사를 나가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삶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여성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대학원 시절에는 고(故) 이효재 교수님이 만든 여성한국사회연구회에서 세미나를 계속했고, 그곳의 소장 연구자를 중심으로 좀더 뚜렷한 페미니즘 공부를 해보자는 흐름이 만들어져 아현여성연구실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아현여성연구실과 여성사연구회가 통합되어 1989년 한국여성연구회를 창립해 그게 현재의 한국여성연구소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강의는 석사과정 마친 뒤 1980년대 중후반부터 많이 다니다가 1994년에 상지대에 가게 됐습니다. 아마 제가 강원지역 최초의 여성학 전임교수였을 겁니다. 지역 여성운동과 조우하고 활동할 기회도 많아졌는데 지역에 페미니즘 관점을 견지한 여성 리더가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2000년대 들어 여성학 대학원을 만들었습니다. 지역의 문제는 무엇보다 ‘사람이 없다’는 건데, 그래도 대학원에서 가르친 이들 중 여럿이 지역의 활동가, 시의원, 정책 담당자가 되어 여성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는 게 저로선 큰 보람입니다.
김현미 저는 대학에서는 따로 페미니즘 교육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1980년대 후반 미국 유학을 가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맑시스트 관점에서 세계화 과정과 제3세계 여성노동의 착취 문제를 살피는 것을 접했고, 거기서부터 제 연구의 기반이 정립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학에는 페미니즘과 퀴어 분야 수업이 많이 개설되어 있었고 탈식민 이후의 저항들도 주목받았기 때문에 저 또한 다양한 억압들—예컨대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제3세계성—을 교차적으로 살피는 페미니즘 방법론을 배웠습니다. 2000년에 연세대 사회학과에 부임하고 보니, 그땐 한국에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꽤 많았습니다. 1995년 서동진(당시 사회학과 대학원생)씨의 커밍아웃 이후 학내에 퀴어 이슈가 중요하게 등장했고, 성정치 담론도 활발해져 있었던 거죠. 또 여학생들이 소위 ‘처녀막 신화’를 깨자며 다양한 성적 탐색을 하는 시기도 있었고요. 그런 기반에서 수업을 시작했고, 교수로서 학내 성평등기구 제도화 같은 여러 움직임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차차 이야기 나누겠지만 지금은 그런 노력들이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엄혜진 저는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했고 20대 때는 사회운동을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땐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이 그다지 없었어요. 여대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뒤 ‘아, 이런 세상이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 경우죠. 그러면서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2000년 7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활동하며 ‘운동사회 성폭력 가해자 명단’ 17인을 공개한 익명모임)에서 주축으로 활동하게 됐는데, 그 일이 끝나고 나서 다시 사회운동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습니다. 100인위 활동의 파장도 컸거니와 저 자신도 좀 달라졌으니까요. 그래서 서른살 넘어 2002년에 뒤늦게 대학원에 갔어요. 제도여성학이 상당히 꺾이기 시작한 시점이고 몇몇 대학에서 여성학과 폐지 움직임도 생겨나면서 당시 여성학 전공자들은 학자로서 이력을 쌓으리란 기대가 사실상 좌절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운이 좋았던 경우일 텐데요. 2011년 경희대에서 교양학부를 대폭 개편해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설립하면서 대대적인 채용을 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시민교육·교양교육을 하려면 여성학 전공자가 한둘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 기회를 통해 비전임으로 강의를 시작했고, 2017년에 일종의 특별채용 형태로 전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강의를 하다보니 페미니즘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깊어지더라고요. 그래서 2017년 다른 여성학 연구자들과 같이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를 만들어 페미니즘 교육에 관한 다양한 연구사업과 교육활동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백영경 세분이 서로 조금씩 다른 분야, 다른 시대를 겪어오신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여성과 사회’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좀 보수적인 내용이었고, 그걸 딱히 여성학 과목으로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보다는 아까 강이수 선생님이 말한 한국여성연구회에서 페미니스트 언니들과 많이 어울리며 배웠습니다. 제가 원래 서양사 전공이라 연구회 여성사 분과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과 직접 관련된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인구 문제로 논문을 쓴 뒤 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에서 강의했고, 지금은 제주대 사회학과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투 이후 대학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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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각자의 소개만으로도 시대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요, 이야기를 좀 좁혀서 미투 이후의 대학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평가하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 경우 방송대에서 여성학 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사랑 사회’ 강의를 맡았습니다. 퀴어 인권운동가인 한채윤씨의 강의도 포함하는 등 꽤 괜찮은 수업이었고, 긴장한 것에 비해 학생들 반응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투 이후에는 오히려 여러 반발이 감지됐어요. 과제물에 ‘교수가 남녀평등을 강요한다’는 말을 써서 내는가 하면 동성애 관련해서는 답안지를 거부하는 학생들도 나왔고요. 그리고 제주대로 옮겨 와서 보니 지역에서는 여성학을 강의할 사람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더라고요. 학교에 페미니즘 동아리가 있는데 참여 학생들이 이름을 드러내길 꺼려한다고 해요. 지역사회에서 어느 집 딸이 페미니즘 한다는 얘기가 돌까봐 부담스러워하고 쉬쉬합니다. 대학가에 미투 이후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이 혼재하는 느낌인데, 어떤가요?
김현미 미투는 단지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폭로하는 게 아니라, 기득권에 의한 성불평등·성폭력의 재생산을 멈추자는 목적을 지닌 운동입니다. 그래서 대학 내 미투에 대해선 남학생들의 반감도 높진 않았다고 봅니다. 그들 역시 기득권자인 교수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교수들이 여학생을 성적 대상으로 보며 젊은 세대 간의 연애나 친밀성에 권력의 힘으로 끼어드는 것에도 내심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투가 20대의 갈등을 일으킨 주원인은 아니라고 보고, 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싶습니다. 연세대에서는 수업 내 성평등이 진전되는 몇가지 큰 계기가 있었어요. 총여학생회에서 교수들의 성차별적 발언이나 성적인 농담을 모니터링해 꾸준히 보고서를 냈거든요. 발언자를 익명으로 처리하되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한 것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2005년에는 강의평가 항목에 ‘성평등한 관점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는가?’라는 문항이 들어가면서 교수들의 인식이 더욱 달라졌고요. 이 과정이 캠퍼스를 더 평등하게 만들려는 학생들, 교수들의 수준 높은 노력과 연대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제도적 개혁이 결합되었던 거죠.
백영경 최근의 미투는 그와는 좀 다른 양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김현미 미투는 일종의 아우팅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죠. 특정 교수를 지목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주는데다 교수들의 태도도 복잡해졌습니다. 일부, 주로 여성 교수들은 대자보를 함께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지원했지만, 대다수 교수들은 언제든 자신이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민감해지고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흐름을 보면서 아무리 자체적인 혁신성이나 명문(名門)성을 강조한다 해도 대학 역시 사회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에 어떤 사안이나 의제를 보는 관점이 극렬하게 갈라지기 시작했잖아요. 우리는 페미니즘을 분석적이며 윤리적인 인식론이라 생각하고 가르쳤는데, 지금은 페미니즘이 여성과 남성의 권리를 재분배하는 현실적 전략으로 단순화되었습니다. 디지털 성폭력 등이 난무하고 시급한 현실 사안이 산적해 있는데 인식론과 분석방법을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냐는 비판을 저만 해도 많이 받습니다. 페미니즘 대중화와 미투 이후의 단순화된 전선 속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어진 거죠.
엄혜진 저한테 미투는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가졌던 역할과 기능, 가치가 굉장히 달라졌음을 느끼게 한 계기였습니다. 예전에 대학은 사회에서 토론되어야 하는 의제들을 선도적으로 제시하는 공간이었고, 대학 당국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든 간에 일단은 구성원들의 역동적인 흐름이 그 자체로 힘을 가졌어요. 사회에서도 대학 내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편이었고요. 그런데 미투 이후 과정을 보면 대학이 사회에서 불거진 이슈를 오히려 뒤따라가는 곳이 된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 대응방식도 굉장히 뒤쳐지고 폐쇄적인 모습으로 드러났고요. 노동계나 문화예술계의 미투 대응이 훨씬 정치적·입체적·적극적이었죠. 오늘날 대학 내부의 정치적 역동성이 굉장히 소진되어 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강이수 제가 있는 상지대는 좀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2018년 미투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이후 상지대에서도 교수들의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고발과 징계 사례가 있었는데, 그 양상이 좀 달랐어요. 상지대는 수십년간 사학비리 재단과의 싸움을 벌여 구(舊)재단의 인사들을 이사회에서 퇴출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2014년 구재단 김문기 전 이사장 측이 복귀하면서 다시 격렬한 싸움이 전개됩니다. 수업 거부를 비롯해 학생들과 교수들이 정말 힘겹게, 같이 싸웠어요. 돌이켜보면 상지대의 미투는 한국사회 전반의 미투운동 흐름만 아니라 그 사학민주화운동의 자장 안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사학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여성 교수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발언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상황에 따라 징계위원회에서 큰 논란 없이 파면이나 해임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대학 내 민주화운동의 분위기, 학과 경계를 넘어서는 여성 교수들의 연대, 학생들의 동의와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문제에 더 적극적이고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내 성평등기구, 이대로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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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말씀을 들으며 페미니즘운동과 사회운동, 또 대학민주화운동과 학내 여성운동의 활력은 서로 동떨어질 수 없고 함께 간다는 점을 새삼 느낍니다. 지금 사회 전반에, 또 대학 내부에 정치적 역동성이 저하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미투를 통해 성희롱·성폭력 문제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같습니다. 그 시기를 거치면서 인권센터 등 관련 기구를 제도화한 대학도 많은데, 이 부분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제도화를 통해 좋은 효과도 거두었겠지만, 여전히 현실적 과제가 많은 것 같거든요.
엄혜진 대학을 성평등하게 만들기 위한 기구가 도입되기 시작한 게 1990년대부터인데, 지금은 그 효과를 점검해볼 국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도 학생들은 성희롱·성폭력이 발생하면 피해자대책위원회부터 꾸려요. 이게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 방식이 90년대와 똑같다면 문제다, 대학 당국에 의지하고 기댈 수 없다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피해자 지원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 안에서 학생들이 어마어마하게 지치고 피로감을 느끼면서 페미니즘 공동체가 압살당하는 경우들이 줄곧 벌어져왔습니다. 더는 그런 일이 없게끔 학내에 인권센터니 성폭력상담소니 하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왜 아직도 해당 기구가 제 기능을 못하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강이수 상지대는 학생심리상담센터에서 성폭력·성희롱상담센터를 부속기관으로 운영하다가 2018년에 인권센터를 만들고 그 주요 업무로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교육, 처리에 관한 사항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구적으로는 승격된 셈인데, 여전히 ‘불완전한 제도화’로 보여요. 운영 담당자의 철학이나 비전이 없다든지 전문성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도 있거든요. 엄혜진 선생님 말씀처럼 학생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기구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인권센터가 포괄적인 업무를 다루는 곳이기는 하지만, 성평등 업무를 주로 하는 만큼 그에 맞는 인식을 갖춘 전문가가 배치되어야 하고, 학내 성폭력·성희롱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체계를 더 탄탄하게 마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김현미 연세대의 경우 선배 여성 교수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1990년대까지 여학생처 정도가 있었을 뿐 제대로 된 성평등기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성 교수들과 함께 2000년대부터 성폭력상담소와 젠더연구소를 설립하는 일에 힘을 쏟았고, 2001년에는 대학원에 문화학협동과정을 만들어 문화와 젠더를 중심으로 한 학제적 체계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큰 문제는, 학내 성평등을 위한 노력이 단순히 ‘성폭력 예방교육’ 차원으로 너무나 협소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인권센터·성평등센터를 만들면, 그리고 거기 2년 단위 순환 보직인 센터장과 정규직 연구원·상담원 한명만 두면 대학으로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곤 성폭력 예방교육 이수율을 높이는 데만 치중하고요.
강이수 성평등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도 천박한 실용주의가 대학을 지배하는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제도나 평가기준에 따라 기구는 만들어두었지만, 사회적·정치적·문화적 담론을 논하는 학문적 공간은 계속 축소되고 있어요. 학생들이 여성학을 배우고 힘을 받을 수 있는 학문적 공간이 열려 있어야 기구도 제 역할을 하고 활성화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거예요.
엄혜진 게다가 지금 학내에서 논의되는 페미니즘 의제는 무척 복합적인데, 대학에 있는 성평등기구는 주로 성희롱·성폭력 사안에 대해, 특히 매뉴얼화된 문제해결 방법으로만 접근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안이든 그 논법으로만 다루게 만드는 문제가 생겨요. 다층적인 불평등이나 젠더폭력을 겪게 되었을 때 학생들이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방식으로는 발화하기가 어렵고 그런 훈련도 안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폭력 피해자 담론의 구도 속에서 사안을 인식하고, 그 방향으로만 정치화하게 되는 거예요.
김현미 기구는 갖추었지만 아주 낮은 수준의 규율과 규칙, 법치주의로 환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평등센터·인권센터 장(長)을 전문성 없는 법대 교수들이 맡는 상황도 생깁니다. 피해자 보호와 2차가해 방지를 위한 익명성 보장, 절차적 공정성을 만들어두었더니 그 자체가 어떤 철칙처럼 고수되면서 외부에 퍼질까봐 쉬쉬하는 비밀주의만 강화되고, 오히려 인식 확장의 기회를 막고 있어요. 피해 당사자가 문제해결의 주체로 서지 못하고 어떤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마저 생기고요. 대학이라면 성폭력사건을 통해서도, 가령 ‘내가 가해자라면/피해자라면/방관자라면/동료라면/지지자라면’ 하는 식으로 살아 있는 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에서 생산하는 것, 그리고 구성원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고 비판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영역은 교육이고 지식인데, 정작 그 안에서는 성평등이 주류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제도화를 넘어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실질적인 인식 공유와 토론이 필요합니다.
계급화된 대학사회, 되찾아야 할 개혁의 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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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성평등기구가 제도화되고 안착됨에 따라 파생되는 문제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모든 사안을 기구에만 전담시키고 다른 교원이나 학내 구성원들은 더이상 관여하지 않게 된 모습도 눈에 띕니다. 어떤 사안을 민주적으로 해결해나가고 투쟁도 하기 위해서는 동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보이지 않는달까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요?
김현미 학내 민주화·성평등화를 위한 투쟁에서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가 하면 여전히 의식있는 교수와 학생들이겠지요. 그런데 갈수록 교수들이 뭉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어요. 소위 기득권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기 부담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주니어 교수들은 업적을 빨리 쌓아 불안정한 지위를 벗어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평판을 잘 관리하고 싶어하죠. 대학 안팎의 사회적 이슈에 접근하거나 자기 분과를 넘어선 학제 간 연구를 해보겠다는 관심도 없고요. 시니어 교수들은 어렵게 그 자리에 올라간 만큼 다른 사안에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아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아하게 퇴직’하고 싶어하는 기류가 보여요. 시니어든 주니어든 현재의 나를 뛰어넘어야 새로운 사회적 자아가 구성되고 연대가 가능한데 그런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엄혜진 대학 교수는 대학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꾸어나가야 할 주체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대학개혁(구조조정)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현재 대학은 아주 촘촘한 신분사회입니다. 전임/비전임으로 나뉘고, 전임은 다시 정년트랙(정년보장tenure을 받을 수 있는 경우)/비정년트랙으로 갈립니다. 비전임의 경우는 강의전담교수/외래교수/시간강사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지위로 나뉘어 있고요. 똑같이 ‘교수’라 불려도 고용 지위는 물론 임금 수준과 대학 내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자율성의 정도는 매우 다릅니다. 이런 대학 현실에서 무언가를 같이 도모할 수 있는 기반은 붕괴된 지 오래고, 교수 개개인의 의지에만 의존하는 상황입니다. 저도 전임이기는 하지만 정년트랙에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다들 저에게 정년트랙에 올라타려면 얼른 논문 쓰고 업적을 내야지 왜 자꾸 밖으로 회의를 다니고 별별 일을 다 하냐고 해요. 대학을 촘촘한 위계로 나누어놓은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혁의 신의 한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경험과 지식, 실천과 학문 간의 연결과 긴장을 중시하는 페미니즘 연구자로서는 더욱 답답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현미 페미니즘에서 강조해온 연결성과 공감능력,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책무의 분배 같은 것들이 대학에서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안정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할당된 점수를 채우는 일이 급선무이고, ‘명문대 교수인데 이 정도 업적도 못 내냐’는 부추김과 압박도 상당합니다. 저는 교수사회 내부의 반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거친 말일 수 있지만, 능력주의의 자장 안에서 교수들은 뒤처지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모멸감을 견디기 어려워해요. 문제는 이 ‘능력’이 연구 점수로만 평가되다보니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협동적 자아를 표출하는 것은 자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대학은 소위 잘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지만, 그 잘남이 현재의 제도를 옹위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으로만 활용되는 상황이에요. 목소리 내는 사람에 대한 냉담한 태도와 거리 두기를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보호하려는 심리도 팽배합니다. 특히 성평등이나 페미니즘에 거리를 두는 것을 ‘중립’과 ‘객관성’을 지키는 일로 여기면서 자신의 무지와 성찰 없음을 방어하죠.
강이수 여성 교수의 수가 객관적으로 너무 적다는 것도 꼭 짚어봐야 할 문제입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대학을 바꾸는 게 쉽지 않은 이유예요. 2020년 기준 국공립대 여성 교수 비율은 17.9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사립대가 조금 낫다고는 해도 4년제 기준 27퍼센트 정도이고, 생활과학대나 간호대에 집중돼 있습니다. 최소 30퍼센트는 되어야 소수자 목소리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데 아직 거기에도 못 미치는 거죠. 국공립대 여성 교수 비율을 높이는 데 일정 정도 기여한 교육인적자원부의 대학교원임용양성평등위원회도 윤석열정부 들어 그 기능을 양성평등교육심의회 하위 기구로 재편해버린 상황입니다.
김현미 대학에 여성 교수 자리가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열심히 공부한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밥벌이를 위해 결국 ‘양성평등’ 관련 일자리로 가게 됩니다. 페미니즘은 젠더라는 분석 범주를 통해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여성성/남성성을 살피고 섹슈얼리티 문제를 들여다보며 차이가 왜 위계화되는지를 분석하는 학문이자 그 대안을 구성해가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박근혜정부 이후 강조되고 있는 양성평등 정책은 모든 문제를 여자와 남자라는 생물학적 본질론으로 환원시키며 이성애주의를 강화합니다. 권력관계를 비판하기보다 수치적 평등주의를 주창하고, 어떤 문제든 ‘파이 나눠 먹기’, 뺏고 빼앗기는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들고요. 이렇게 단순화된 논리를 기조로 삼다보니 젠더기반폭력도 양성평등 문제로, 성별 임금격차도 양성평등 문제로 프레임화되어 깊이있는 분석과 정책 구성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 연구자들도 그런 식의 양성평등 정책을 만드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해요.
한국 대학, 이대로 가면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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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양성평등을 비판하는 공부를 한 이들이 결국 양성평등으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 현재 페미니즘이 처한 곤궁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 여성들에게 중요한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문제가 정말 심각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대학을 비판하고 계속 대학에 개입하려 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더욱이 한국은 대학 진학률(2021년 기준 71.5%)이 높은 사회입니다. 학생들이 대학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율적이고 평등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동시에 ‘나’라는 개인을 넘어 더 나은 정치적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대학이 일조해야 하는 책무가 크다고 봅니다. 대학이 어떻게 변하느냐가 사회의 변화에 여전히 영향을 미칠 테고요. 그런데 대학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바꾸는 일에는 아직도 여러 한계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페미니즘이 사회의 많은 영역을 유의미하게 바꾸어왔던 데 비해 대학의 변화는 무척 더딥니다. 단순한 예로 여학생이 상당히 늘어났음에도 대학이 그에 따라 얼마나 달라졌는가 싶어요.
엄혜진 저는 대학이 그동안 너무 파렴치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부터 여성의 대학 입학률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여학생들이 직접적인 학습 주체로 등장했습니다. 경희대만 해도 이미 여학생이 절반이고, 특정 시기에는 남학생 수를 초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에 대해 대학에서 어떻게 반응했는가, 어떤 정책이 있었는가 하면 사실 전무했다고 봐요. 하다못해 공간 재배치라도 이루어졌는가, 화장실도 안 늘어난 학교 많거든요. 여성 경제활동참여율이 OECD 38개국 중 고작 31위에 머무는 실정인데, 한국사회 어느 영역에 대학만큼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곳이 있나요? 그럼에도 대학은 변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 대학개혁 관련해 목소리를 낸다면 우선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현미 여학생 비율이 늘 때 연세대에서 너무 불안해했습니다. 이렇게 학교가 ‘여성화’되면 민족성·남성성이 우세한 다른 대학과 어떻게 경쟁해서 이기느냐 하는 불안이었죠. 그때 저는 여성이 많아져도 우리 학교 안 망한다, 랭킹 안 떨어진다, 오히려 이를 호기로 삼아 여성 역량강화를 위한 여러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열심히 방어했습니다. 이제 더이상 그런 말은 안 나온다 해도 그게 반갑지만은 않은 상황입니다. 여학생 수가 그 자체로 평등의 지표처럼, ‘여자가 무슨 차별을 당해?’라는 말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고 있으니까요. 성평등이 단순히 양(量)이 아닌 질적 변화를 위하는 것임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백영경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여학생 일자리센터를 없애는 곳도 많더군요. 일자리의 질 등 세부지표는 들여다보지 않은 채 여학생이 공부도 더 잘하고 취업도 더 잘하는데 뭐 하러 여성인력개발기구를 두냐, 역차별 아니냐 하는 단순한 논리예요. 이런 상황에서 여성학 수업 개설 비율은 어떤가요? 대학에서 인문학·사회과학 대신 이공계 교육만 활성화시키려 하는 것도 문제인데다 전반적으로 교양과목을 축소하려는 흐름이 보입니다.
김현미 연세대만 해도 당장 여성학 교양수업을 더 줄이려 하는 실정입니다. 교양대학이 아닌 성평등센터에서 만든 두 과목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없애라는 압박이 들어왔어요. 다른 강의들은 강의평가가 나쁘다는 이유로 쳐내지 않는데, 유독 이 수업만 강의평가를 구실 삼아 없애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학생과 여교수들이 오랜 노력을 통해 수업 하나, 제도 하나를 만들어내도 목소리 큰 한두명에 의해 속절없이 사라지는 일이 이처럼 자주 발생합니다. 여성가족부 폐지와 비슷한 상황이에요. 밑에서부터의 투쟁과 헌신을 무시하고, 무슨 권리로 이렇게 권력을 휘두르는지 모르겠어요.
강이수 지방대학의 경우 또다른 위기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이고 시장 친화적인 교육부의 대학 역량평가가 과도하게 이어지면서 지방대학은 십수년 안에 다 몰락한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거든요. 학생 수 감소와 더불어 학과도 취업에 유리한 실용적 전공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인문학·사회과학 전공이 사라지고 교양수업 자체가 축소되는 마당에 당연히 여성학 수업도 줄었습니다. 한때는 상지대에서 페미니즘 강좌가 ‘여성학’ ‘여성과 일’ ‘성문화의 이해’ 등 한 학기에 7~8개까지 개설됐는데, 지난 3~4년 사이 급격히 축소되어 지금은 2~3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김현미 교양강좌는 아무 때나 칼질해도 된다는 식의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대학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지적·사회적 호기심과 연대의 감각이 태동하고 있는 청년들과 함께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양교육을 다시 살려야 하고, 살리고 싶습니다. 젠더정의(正義)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방법을 훈련시키는 방식도 더 다양해질 수 있어요. 이번 학기에 저는 ‘현대사회의 친밀성과 돌봄의 구조’라는 제목으로 전공수업을 열었습니다. 우리가 왜 파편화된 고독에 시달리는지, 어렵지만 돌봄전환사회를 왜 꼭 만들어가야 하는지 젠더 관점에서 접근하는 수업입니다. 교양강좌로도 이런 수업을 열고 많은 학생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해요.
강이수 그런데 도리어 교양수업이 축소되는 상황이니 페미니즘의 확장을 어떻게 꾀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경쟁주의적·시장주의적 환경에서 대학이 본연의 가치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혜진 대학 순위 평가가 지금과 같은 경쟁주의적 현실에 일조한 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가령 대학에서 글로벌 거버넌스 구축을 위한 구색 맞추기 용으로만 수업을 만들고 있다는 점도 큰 문제예요. 교수가 젠더 관련 교양과목을 하나 늘리려 하면 새로운 수업을 개발하기보다 계량화된 평가지표에 맞춰서 꾸리도록 합니다. 유엔이나 유네스코 같은 국제기구 평가의 중요한 지표가 ‘지속 가능성’이고 거기엔 젠더도 포함되니까, 수업을 그 기준에 순치시키는 방식으로 꾸리게 하는 거예요. 아주 오래전의 커리큘럼으로 ‘글로벌 제3세계 여성 빈곤’을 다루게 하는 식이죠.
김현미 오늘날 한국 대학이 계속 추구하는 게 세계화(globalization)이고, 이를 위해—그리고 대학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도—유학생들을 대거 입학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인종·종교·젠더의 다양성 지표가 저절로 올라가지는 않거든요. 한국 대학에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이 별로 없어요. 한국에 오는 유학생들은 한류의 영향을 받아 한국학을 하고 싶어하고, 젠더나 섹슈얼리티 문제에도 흥미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학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특히 지금은 ‘침묵의 수업’이라고 할 만큼 논쟁이 사라졌잖아요. 사회에서는 이대남/이대녀 젠더갈등 프레임을, 국가 정책적으로는 양성평등 프레임을, 보수우파들은 동성애 찬반 프레임을 너무 강화해놓았기 때문에 여성학 수업에서마저 논쟁의 방법론을 잃어버렸어요. 1학년 대상으로 젠더와 인권 관련 온라인수업을 하는데 보수기독교 일각에서 동성애 옹호라며 항의해오는 실정입니다. 페미니즘은 이런 프레임을 타개하는 분석 범주인데, 이 세가지 프레임에 의해 협공을 받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한국 대학이 정말 자멸의 길로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백영경 진짜 ‘세계화’, 세계적 경쟁력에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최근 해외 흐름을 보면 소위 ‘명문’ 대학일수록 젠더 문제나 탈식민, 기후위기 같은 현실세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큽니다. 지난 억압의 역사와 어떻게 단절할지 물으며 새로운 세계인식을 만들어가는 것이 대학의 진정한 경쟁력이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페미니즘의 관점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페미니즘 교육,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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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이제 방향을 조금 돌려 페미니즘 지식 생산에 관한 문제도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온라인으로 받는 성폭력 예방 및 양성평등 교육이나 여성학 수업이나 내용이 거기서 거기라는 거예요. 심지어 온라인 예방교육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매년 갱신되고 나아지기도 하는데, 강의실에서의 수업은 그만큼도 못 쫓아가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청년 여성들의 필요에 제대로 부응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시점 같습니다.
엄혜진 제가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를 만들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중고등학교에서 하는 ‘엄마는 밥하는 사람이 아니다’ 식의 초보적인 성별 고정관념 깨기 프로그램을 대학 여성학 강의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어 정말 깜짝 놀랐어요.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발전해오며 축적된 지식 성과가 있는데, 그게 제대로 환류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페미니즘 교육을 계속해온 만큼 사회도 어느정도 진전되어왔잖아요. 그런데도 교육은 학습자들의 의식이 이미 고양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페미니즘 강좌가 기초별/심화별로 분화되지 않고, 늘 기초적 수준을 유지하며 누적되어온 문제도 크고요.
강이수 저 역시 여성학 강의에서 변화하는 지형을 제대로 반영해왔는가 하는 반성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다보니 제가 여성학 제도화의 초기부터 지켜봐온 사람이 된 것 같은데요, 80년대 후반에 어느 대학에 여성학 강의를 갔더니 교수가 저한테 ‘신사임당의 부덕에 대해 잘 가르쳐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어이가 없었지만 두학기 동안 열심히 강의를 했더니, 이후에 학생들이 꼭 들어야 할 과목 10개를 대자보로 게시하면서 제 수업도 꼽았어요. 그만큼 페미니즘에 대한 학생들 열기가 굉장히 뜨거웠고 보람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업을 하면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특히 1990년대엔 여성학 강의를 하면 여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반면에 2000년대 들어서는 남학생들도 꽤 많아졌어요. 그런데 남학생도 강의에 만족을 못하고, 여학생도 수업에서 더이상 발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단지 20대 남성의 보수화만 논할 게 아니라, 그들이 강의를 통해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준비하지 못한 채 우리가 똑같은 커리큘럼만 반복해온 게 아닌가 점검해봐야 해요.
엄혜진 제가 하는 ‘여성학 개론’ 온라인수업은 한 학기 수강생이 300명으로 그중 남학생도 꽤 많습니다. 그런데 남학생들의 소감이 저를 가슴 떨리게 만드는 순간이 있어요. ‘그동안 오해했는데 페미니즘이 이런 건 줄 몰랐다’라고 하거든요.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를 분석하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다는 것, 지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분석 틀이라는 것에 학생들이 놀라워하고 태도를 바꾸는 게 느껴집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논란을 백래시로 보거나 ‘이대남이 문제’ ‘일베가 문제’라는 쪽으로만 손쉽게 귀결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론 수업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의 이론적 전개 과정을 다룹니다. 다른 학문과 여성학이 인간과 사회 해석을 둘러싸고 어떤 방식으로 긴장, 경합해왔으며 그 성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는 어떤 방식으로 이에 접근하고 있는지를 살피는데, 이것만 해도 몇주 커리큘럼에 해당하죠. 실제 학생들이 요구하는 여성학 수업은 개념에 대한 다층적인 이해, 여성학의 학문적 체계와 역사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백영경 말씀에 동의하는 한편으로 청년 여성들은 좀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달라진 현실과 변화하는 지형에 대한 담론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최근의 젠더경험 변화에 학술적으로 잘 개입해왔다고 보시는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어떤 점을 살펴봐야 할까요?
엄혜진 지난 20여년간 젠더관계에 실제 변동이 있었습니다. 이걸 페미니즘이 어떤 방식으로 포착하고 해석해서 이른바 사회정의의 문제로 제기할 것인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요즘 개인적으로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라는 백래시의 대표 기표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야 할지가 최대 화두입니다. 우리는 그 말에 흔히 ‘구조적 성차별은 있다’라고 맞서왔어요. 구조적 성차별은 물론 있지만, 그에 대한 논의를 계속 ‘있다/없다’ 프레임 안에서 해야 할 것인지 고민이 듭니다. 구조적 성차별의 형식도, 그걸 경험하는 방식도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여성이 자기 삶을 기획하는 방식이 달라졌고, 오늘날의 성차별도 과거처럼 아주 가시적·노골적인 방식이 아니게 되었어요. 단순하게 표현하면 여성들은 남자처럼도 살아야 하고 여자처럼도 살아야 하는 동시적 과제를 수행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남성과 똑같이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의 주체로 호명되면서도, 가령 여성과 남성이 어떻게 평등한 성적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섹슈얼리티 관련 규범은 그대로거든요. 성별 고정관념 해체 속도는 무척 빠르지만, 섹슈얼리티는 여성 개개인이 스스로 관리해야 하는 영역으로 떠넘겨집니다. 성적 주체보다 대상으로 머무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고요. 이 간극에 우리가 개입해야 합니다.
김현미 우리나라가 고학력화되고 경제 수준도 높아지면서 딸을 차별하지 않는 구조가 이미 되어버렸어요. 한동안은 딸의 약진에 감동하는 기성세대들이 ‘딸바보’라는 개념으로 자기고백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약진이 청년 여성 당사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공부 잘하는 딸’을 넘어서는 것이고, 자기 커리어를 쌓으며 비혼 혹은 결혼 연기(延期)를 통해 사적 가부장을 갖지 않기로 선언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가부장제는 사적 영역의 통치가 공적 영역의 통치와 접목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데 여성들이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게 된 거죠. 저는 지금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전통적인 젠더가 무너지고 새로운 방식으로 태동해야 하는 전환기라고 봐요. 전환기로서 겪는 진통도 큽니다. 여성들은 능력주의 주체로 호명되었음에도 독립적인 생계를 꾸릴 노동시장 기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분노하고, 남성들은 그간 당연시해온 사적 가부장의 지위를 갖지 못하자 여성들을 소유하고 장악한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 여성들을 성적 객체화하고 있어요. 폭력적인 성애화가 남성들의 방어전략으로 너무 커버린 거죠.
강이수 그럴수록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구조적 성차별이 있다고 말할 때도 정작 그 구체성에 대한 분석은 굉장히 부족하지 않았는가 합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세계경제가 불평등해지고, 임금뿐 아니라 자산과 금융자본의 격차도 커지면서 청년 여성과 남성이 모두 구조적 불평등에 공통적으로 놓이게 된 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또 페미니즘이 2030 여성들의 분노로 표출되고 있지만, 아직도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4050 여성들이 있고요. 우리가 언젠가부터 그런 여성 내부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게 되면서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도 협소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거기서부터 다시 구체적 지점들을 만들어나갔으면 합니다. 또 한가지 짚어보고 싶은 건, 과거에는 여성연구회나 ‘또하나의문화’처럼 논쟁과 토론의 장이 있었어요. 요즘 20대 여성들은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열정적으로 발화하고 대학에서도 페미니즘을 배우지만,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논의의 장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고양된 정서와 지식을 바탕으로 토론하고 연대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공간이 없어요. 대학도 그런 곳이 못 되어주고 있고요.
백영경 최근 페미니즘 운동에서 20대 여성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이들의 활약과 주도로—주로 SNS를 중심으로—페미니즘 내부의 논쟁이 활발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청년들이 대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을 단순히 ‘청년’으로 환원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다뤄야 할 의제는 물론 페미니스트에 대한 우리의 상(像)도 대학생 내부의 차이, 청년 내부의 차이, 여성 내부의 차이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반성이 듭니다.
김현미 트위터 등 SNS에서 진행되는 페미니즘 논의는 전선을 선명하게 형성해주는 담론을 통해 즉각적인 동시대성을 느끼게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다음 단계로 향해가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대학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동아리·위원회 활동을 하는 학생들의 경우, 대학에서의 경험과 트위터 페미니즘을 어떻게 결합해야 할지 힘들어하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사회에서는 양쪽을 다 ‘마녀’로 취급하며 표적이 되잖아요. 이건 정말 우리 사회의 보수화가 만들어낸 질식할 만한 환경이라고 봅니다. 저는 ‘젠더갈등’이라는 말을 누가 퍼뜨렸느냐에 대해서도 혐의를 갖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개념적 명명체계를 아주 정교하게 발달시켜왔기 때문에 쉽게 젠더갈등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젠더불평등이나 젠더기반폭력이라고 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정치권에서 이대남에 주목하고 젠더갈등 운운하면서 또다른 불평등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세대 간 불평등 문제, 부의 불평등한 분배 문제 등은 싹 달아났어요. 이렇게 담론의 지형을 바꾸고 유지해나가는 데 누가 기여하고 있는가,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가, 하는 질문도 페미니스트들이 던져야 합니다. 게다가 20대 남성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라면, 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성평등 인식이 필수적이라고 설득해야 되지 않겠어요?
엄혜진 주류 정치가 젠더갈등 담론을 정치자원으로 활용했다는 데 동의하고 모든 불평등을 젠더관계로 치환하는 것도 문제지만, 젠더라는 축이 오늘날 사회변화의 중심축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갈등의 핵심에 젠더관계의 변화가 있는 거죠. 저는 ‘여성혐오’라는 말이 부상해온 것도 일종의 징후처럼 느껴집니다. ‘구조적 성차별’이라는 말로 포획되지 않는 경험들이 생겨나면서 여성혐오라는 말이 정치화되고 힘을 얻은 거잖아요. 최근에는 신당역 살인사건(불법촬영과 스토킹 폭력을 지속해온 남성이 상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을 두고서도 그것이 여성혐오 사건이냐 젠더폭력 사건이냐 하는 논쟁이 오가더라고요. 현재적 사건들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를 둘러싸고 여러 곤란과 곤궁이 있는 거고, 페미니즘 교육의 임무는 그 사안을 해석할 인식 틀을 제대로 제공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강이수 강의실에서 보면 지금 20대 남녀들은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인식하든 안 하든 여학생들은 성평등에 대한 인식 수준이 굉장히 높고, 남학생들 역시 젠더갈등의 프레임에 가려져서 그렇지 과거의 남성과는 다른 성평등 인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따로 또 같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희망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대남’ 프레임에서 벗어나 남성의 목소리를 소환해보기도 하고, 여학생들이 이미 도달한 지점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부분을 제시해주기도 하면서 사회를 젠더정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끔 하는 달라진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면 지금과는 다른 문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이 전혀 읽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학개혁,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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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페미니즘 지식이 여성학 강의에 녹아들지 못한 한계, 구조적 성차별을 말해왔지만 구체적 지식 생산은 부족했던 점, 최근의 젠더경험 변화에 학술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던 아쉬움 등 반성적인 차원에서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페미니즘이 더 쓸모있는 지식이 되기 위해 갱신되어야 할 바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가 대학 안에서 그냥 될 수 있다고 보시진 않을 것 같은데요. 교육정책이나 대학의 행정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김현미 21세기에 들어설 때 ‘3F’(여성female, 감성feeling, 허구fiction.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가 여성의 창의성과 잠재력을 강조하며 21세기를 ‘3F의 시대’로 정의하면서 주목받은 개념)다, ‘알파걸’이다 하면서 대학이 ‘여성 인력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나름대로 달라지려 한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학 서열을 높이는 데만 치중하고 있습니다. 의미있는 변혁에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기보다는 ‘빠른 해결책’을 통해 랭킹을 높이는 노하우를 발견한 거겠지요. 그러나 구성원의 사회적·문화적 역량은 계속 떨어지는데 대학 순위만 오르면 뭐 하나요. 자신의 일터이자 학교, 지역사회의 중심지인 대학에서 구성원들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며 활력이 떨어지고 있는 게 큰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대학도 달라져야 합니다. 학생, 교수, 직원, 교내 노동자 모두 젠더화된 존재라는 점을 인식하고, 중산층과 중년 남성만을 기준으로 운영해온 기존 관행들이 복잡한 문제해결이나 구성원의 역량강화를 이뤄내는 데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좀더 개방적인 실험들을 해나가야 해요. 저는 이때 총장의 책무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종류의 성폭력이든 비관용 원칙을 취하고, 학교 홈페이지나 홍보물에도 성평등 원칙을 명기하고, 석·박사 대학원생들이 학업과 돌봄을 병행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며, 고무적인 사례들을 배우고 인용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미국 대학처럼 하계·동계 워크숍을 열고 젠더와 문화다양성 관점으로 강의안을 재설계하는 수업 개발 인센티브도 주는 등 여러 방식으로 교수들을 독려해야 하고, 성평등 교육과 환경을 구성하는 데 학교 예산을 할당해놓아야 합니다. 잘 모르면 학내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청취하는 노력도 기울여야 하고요.
강이수 대학개혁, 특히 페미니즘에 기반한 성평등 교육의 장으로서 대학개혁이 쉽지는 않지만 멈추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세력의 젠더갈등 부추김, 혐오 확산, 백래시 등으로 지금 여성들이 매우 위축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여러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덜 가시적일지는 몰라도 여전히 다양한 차원과 형태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가령 한국여성학회는 지난 10월,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한 학문적 차원의 논평(「여성 살인사건에 대한 미온적 대응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기획에 이르기까지 성평등을 향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를 비판한다」)을 발표하며 실천적인 목소리를 냈고, 이를 계기로 여성학자들이 다시 연대하는 움직임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응력이 페미니즘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발흥시키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환경적 맥락이 대학 내 페미니즘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대학 내 페미니즘이 다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맥락을 변화시킬 수도 있겠죠.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경제·정치·사회·시민사회 등 여러 영역에서 성평등을 견지하는 대응력을 키워나간다면, 이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대학 내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볼 수 있을 겁니다.
엄혜진 대학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대학을 향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학생들을 통해 하려던 바가 많았어요. 가령 페미니즘 리부트 초기에 시니어 페미니스트 그룹이 왜 본인이 주체가 되어야 할 운동은 안 하고, 20대 페미니스트에 동조하는 포지션으로만 개입하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학생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서포트해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봐요. 학생들이 자기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방식도 굉장히 변했기 때문에 과거 양심적인 지식인에게 의존해 운동권문화가 만들어지던 시절하고는 다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여성 교수들이 대학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개혁하는 데 어떤 활약을 해왔는가, 저는 그 역사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페미니스트 교수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여러 투쟁에서 활약했지만 대학을 향해서, 대학 내부에서 페미니즘적 개혁을 위한 목소리를 내본 것은 얼마나 될까요? 민교협(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만 봐도 남성 정교수 위주로 꾸려져왔잖아요. 더욱이 지금 페미니스트들은 하나의 동질적 집단이라기보다 중층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개혁과제를 창출하는 게 중요합니다. 대학을 더 성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를테면 성평등기구를 어떻게 혁신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김현미 페미니즘 리부트 때 많은 시니어들이 고양되고 편승한 바가 있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권위를 통해 그들의 언어를 확인시켜주고 그들의 싸움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누구를 밀어내고 누구를 당기는 줄다리기처럼 되어버렸죠. 그런데 여성학 교수는 학내에선 교육자이지만, 밖에서는 가부장적 사회에 맞서야 하는 개인 페미니스트이기도 하잖아요. 학교 안과 밖에서 다 활동해야 하는데, 한줌의 페미니스트가 다중적 역할을 맡다보니 참여의 현장이라는 게 내 강의실부터 글로벌 사회까지 다 뻗쳐 있게 됩니다. 바깥사회의 갖가지 사안에 계속 개입하고 싸우느라 정작 대학 내부의 투쟁에선 이미 소진되어 있는 경우도 많고요. 특히 여성학자들은 20~30년에 걸쳐 오랫동안 연구를 진행했어도 다른 교수들과 위치가 너무 다릅니다. 저만 해도 문화인류학자로 소개하는 게 훨씬 좋은 평판을 얻지 페미니스트로 소개하면 마치 학문적 역량이 떨어지거나 비전문가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엄혜진 개개인으로 싸우기 어려운 현실이라면 여성학회나 페미니즘 공동체를 통해 집합적인 기획을 도모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김현미 국내외 대학 평가지표에 ‘성평등’과 ‘사회적 연대 역량의 강화’라는 구체적·실천적 항목이 들어가면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실직적인 기준과 항목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하고, 함께 해나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공동 모니터링을 통해 페미니스트가 대학에 개입하는 진입로를 열어갈 필요가 있고, 공인된 성평등 대학 평가지표를 만들어내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부나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 ‘대학을 나의 현장으로 가져간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를 다시금 고민하면, 그 시선이 학생에게 향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페미니즘은 기득권, 중심성, 보편주의가 아닌 ‘주변에서 보는 인식론’으로, 사회가 가장 바닥을 치고 있을 때도 미래 비전과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페미니즘을 강의한다는 것, 페미니스트 학자를 키운다는 게 저의 자존감과 성취의 기반이 되어왔고 제가 가장 잘해낼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강의실을 인식론적 전환의 현장으로 다시 활성화시키는 것이 지금 제 일차적 목표예요. 학생들이 젠더 문제의 당사자로서 강의실에서 모종의 통찰을 얻고 관점을 갖추어서 사회에 나가면, NGO, 기업과 미디어, 정치권으로 진출하면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는 데서 희망을 찾고 싶습니다.
강이수 강의실을 현장으로 재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저는 주로 여성노동 쪽 강의를 해왔는데, 전에는 사회구조적 문제와 젠더의 문제에 대해 더 정밀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해줄수록 설득이 많이 될 거라고 봤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교양강의를 하면 학생들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느끼며 거부감부터 갖습니다. 교양강의를 어떻게 갱신할지 고민이 드는 지점인데, 동시에 전공 과정에서 페미니즘 관련 과목이 좀더 많아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이에 대해 별로 신경 써오지 못했고 개입해오지 못했다는 반성이 드는 거죠. 제 소속이 문화콘텐츠학과인데, 전공수업에서 여성 문화콘텐츠 기획을 하라는 과제를 내면 학생들이 정말 다양한 접근법을 보여줘요. 전공수업 내에서 학생이 직접 정보를 찾고 문제를 인식하고 학습할 때 젠더교육의 효과가 훨씬 높아집니다.
김현미 잘 모르는 영역에 있어서는 어떠한 접근법으로 젠더 관점 수업을 해야 할지 겁이 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그런데 더 많은 지식, 사례와 해석은 학생들이 가지고 있어요. 학생들의 주도적·능동적인 참여를 이끌면서, 우리 자신도 세상에 대한 정답이나 유일한 해석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을 겁니다.
강이수 그 문제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특히 이공계, IT 계열에 젠더 관련 전공수업이 늘어나도록 개입해야 합니다. 지금 사회가 디지털전환을 향해 가고 있고, 앞으로 일자리도 거기서 창출될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공계 전공은 여성 친화적이지 않다고 여겨지고 여성 전공자의 수도 부족합니다. 여성들이 그 영역에서 굉장히 열악한 상태에 있어요. 우리가 이를 넋 놓고 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접근해봐야 합니다. 가령 문학작품을 읽고 기억시키는 교육을 할 때도 남학생과 여학생이 다르다고 해요. 여학생은 어느 대목에서 주인공의 심리가 어땠을까 물을 때 작품을 잘 기억해내고, 남학생은 어느 장면에서 등장한 섬의 지도를 그리라고 할 때 더 잘 기억해내더라는 거죠. 이런 방식으로 IT와 디지털 교육에서 여성 친화적인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습니다. 디지털전환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가지 못하면 그동안 진보해온 성평등 지점이 다시 후퇴할 수 있습니다.
백영경 제주대를 포함해서 여러 대학이 WISET(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이공계 여학생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학교마다 편차는 있지만, 남자 교수들 중에도 공대 커리큘럼에 젠더 통합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도 보았어요. 이런 움직임이 더 활발해져야겠지요.
대학과 페미니즘, 상생의 선순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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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이제 얘기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입니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교수자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면에서 대학의 구조와 성격을 바꾸는 데 책임이 있다고 봐요. 특히 한국사회 전반의 보수화와 대학의 보수화가 맞물려 있기도 하기 때문에 대학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개혁해나가는 노력이 더욱 긴요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강조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김현미 대학은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사회 경쟁 시스템에서 얼마간은 구성원을 보호하며 모든 가능성을 탐색해보고, 다양한 차이가 있는 구성원 간의 상호 교류와 전문적 성장을 독려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이어야 합니다. 그게 지금 잘되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은 현재가 불평등하더라도 교육하고 토론하고 연대하면 달라질 것이라는 그 가능성에 투자하는 학문이니까요. 특히 사회변혁은 기득권이 아닌 주변부로부터 나옵니다. 지금 같은 전환기에 그 주변부의 당사자가 누구일까, 저는 대학원에서 연구하거나 제 수업에 앉아 있는 ‘우울한 여성들과 남성들’이라고 봅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때 고양되었던 20대 여성들도 지금은 다시 우울한 얼굴로 수업에 들어와 있어요. 그 우울은 자기 몫을 빼앗겼다고 분노하는 우울이 아니라, 앞으로 나는 어떤 미래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역량있는 주체의 모습입니다. 남학생들의 우울 역시 ‘난 이대남도 아니고 기성세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남성성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자신감이 부족해서 생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 지식이 이들에게 어떤 통찰력을 줄 것인가, 미래와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어떤 상상력을 줘야 하는가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대학은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대학 교육은 오랫동안 초부가가치로 일종의 특권적 위치를 갖게 됐어요. 그러니 주변부에서의 비판적 관점, 페미니즘과는 체질적으로 맞지가 않았고, 비판이 오면 방어하느라 바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하는 데 익숙해져왔습니다. 지금은 대학이 반드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엄혜진 지금 학령인구가 감소하고 지역 간 격차도 커지고, 학벌 위계는 더 강화되고 있어요. 학생 교수 할 것 없이 모든 대학 구성원들의 젠더경험도 굉장히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다층적인 차원이 얽히다보니 가령 지방대의 여학생은 생존이 더 어려워지는 식으로 문제가 드러나고 있어요. 이제 대학은 과거와 같은 엘리트교육이 아닌 대중교육 공간인데, 이 대학이라는 사회를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페미니즘 관점에서 계속 분석하고 공유해야 한다는 과제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강이수 위기와 어려움에 대해 많이 얘기해주셨으니 저는 희망으로 끝맺을까 합니다. 앞으로의 사회변화에서 성평등의 가치는 결코 후퇴할 수 없다, 단지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저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앞으로도 대학은 페미니즘 지식의 생산지일 것이고, 깊은 고민들이 더해지고 다양한 지식들이 축적되면 아마 지금의 학생들은 또다른 방식으로 성평등의 문을 열어가리라는 기대를 저는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백영경 대학 바깥에서 페미니즘이 많이 논의되고 있지만, 페미니즘 지식의 생산과 논의와 교육의 장이라고 하면 여전히 대학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 깊이 와닿습니다. 그런 공간으로서 대학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점을 우리 스스로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우리가 선명한 주체에 더 주목해왔던 편인데, 강의실의 우울한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말씀도 인상 깊습니다. 선명하지 않은 문제에 천착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상상력과 실천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공간으로서 대학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함께 노력해보자는 다짐으로 오늘 대화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2022.10.23.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