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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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羅喜德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문턱 저편의 말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2015127일, 열아홉살의 증인들이 법정에 앉아 있다

 

광주고등법원 법정 201

해경 123정 정장 김경일 업무상과실치사상 재판

 

증인은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말해주십시오.

 

증인 A 아침 여덟시 오십칠……갑자기 배가……자판기와 소파……쏟아지…… 복도 쪽으로……캐비넷……구명조끼를 꺼내……친구들은……기다리고……문자를 보내고……가만히 있어……우현 갑판 쪽……커튼을 찢어……루프……여학생들……물이……바닷물이……탈출……아홉시 오십분……갑판 위로……헬기……해경……아무도……아무도……

 

증인 A 저……저, 저는……3층 안내데스크 근처……배가 기우는……미끄러져……벽에 부딪쳤……피가……매점에서……화상을 입은……좌현 갑판……비상구……열려 있었……승무원들……우리……대기하라고만……비상구……친구 셋이……끝내……아홉시 사십……물이……차올랐고……잠수를……4층 갑판 쪽으로……헬기 소리가……탈출 후에야……해경……와 있다는 걸……

 

증인은 마지막으로 할 말이 더 있습니까?

 

증인 B 할 말……말이 있지만……그만……그래도……할 말이……해야 할 말이……정신없이……살아나오긴 했지만……우리 반에서……저 말고는……아무도……구조되지 못했……친구들도……살 수 있었을……아무도……저 말고는 아무도……

 

간신히 벌린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말들이 있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말들이 있다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흘러내리는 말. 모래 한줌의 말. 혀끝에서 맴돌다 삼켜지는 말. 귓속에서 웅웅거리다 사라지는 말. 먹먹한 물속의 말. 해초와 물고기들의 말. 앞이 보이지 않는 말. 암초에 부딪히는 순간 산산조각이 난 말. 깨진 유리창의 말. 찢겨진 커튼의 말. 모음과 자음이 뒤엉켜버린 말. 발음하는 데 아주 오래 걸리는 말. 더듬거리는 혀의 말. 기억을 품은 채 물의 창고에서 썩어가는 말. 고름이 나오는 말. 헬리콥터 날개소리 같은 말. 켜켜이 잘려나가는 말. 잘린 손과 발이 내지르는 말.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은 말. 시퍼렇게 멍든 말. 눌린 가슴 위에 다시 내리치는 말. 땅. 땅. 땅. 망치의 말. 뼛속 깊이 얼음이 박힌 말. 온몸에 흐르는 전류에 감전된 말. 화상 입은 말. 타다 남은 말. 재의 말.

 

그래도 문은 열어두어야 한다

입은 열어두어야 한다

아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돌아올 수 있도록

 

바다 저 깊은 곳의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말의 문턱을 넘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