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애도의 공동체에 돌려주는 일상의 깊이
백영경 白英瓊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대담집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및 공저서 『돌봄이 돌보는 세계』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배틀그라운드』 등이 있음.
paix@jejunu.ac.kr
화두: 4·3과 제주라는 공동체
지난 7월 8일, 장편소설 『제주도우다』(창비 2023)를 막 출간한 현기영 작가의 북토크가 제주문학관에서 열렸다. 제주라는 얕은 인연을 믿고 작가조명 인터뷰를 맡기로 하고부터 부담이 커지던 차였다. 아무래도 제주에서 듣는 작가의 말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싶어 그 자리를 찾았다. 북토크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제주문학관 개관 이래 보조의자를 놓고도 자리가 없도록 대강당이 가득 찬 적은 처음이라 했고, 주차장은 물론 도로변까지 차 세울 곳이 없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제주 문화예술계에서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나이대의 독자들이 함께 모여 일제강점기부터 4·3항쟁에 이르는 제주의 역사를 3권의 역작으로 펴낸 82세의 작가를 반겼다.
평생토록 제주와 4·3을 작품으로 써온 작가지만 4·3을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은 처음이라 했다. 현기영 작가에게도 4·3이란 그만큼 쉽지 않은 주제였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마이크를 잡은 작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내 소설 괜찮죠?”라고 말문을 열었다. 다른 무엇보다 지난 4, 5년간 씨름하던 장편을 마무리 지었다는 후련함이 큰 듯했다. 나이 먹으니 겸손하기가 어렵다며 뿌듯함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본인은 그저 4·3의 일부를 그려냈을 뿐이라는 말에서는 조심스러움도 묻어났다. 해방기의 제주가 4·3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로 치달아가게 된 원인을 나름대로 탐색하면서 사건을 총체적으로 다뤄보고자 했으나 4·3은 인간의 언어로 그려내기엔 너무나도 압도적인 비참함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북토크 내내 “어두운 방 안에서 코끼리를 더듬은 격”이라는 표현을 반복했다.
젊어서는 4·3의 수난을 주로 다뤘는데 나이 먹어서는 항쟁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가 말해주듯 수난과 항쟁은 떨어져 있지 않아요. 이번에 내가 한 건 4·3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탐구입니다. 역사가의 탐구가 이성의 작용이고 사실을 추구한다면, 문학가의 탐구는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죠. 4·3의 희생자가 3만명이라면 문학 하는 사람에게 4·3은 3만개의 사건입니다. 인물을 만들어내 현장에서 살게 하면서 그들을 따라가다보면 왜 항쟁에 이르게 되는지 알 수 있어요. 그렇게 내 방식으로 4·3을 탐구한 게 이번 작품이에요.
그가 찾은 키워드는 제주의 ‘공동체주의’다. 작가는 그때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제주 공동체를 그리워하면서, 지금의 제주가 대한민국의 일부라 해도 중앙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완전한 독립’과 ‘자치권’을 얻기를 소망했다. 국가 속의 자치공동체가 4·3 당시의 제주 사람들이 꿈꿨던 이상이자, 4·3 정신을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하는 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자본주의 일색의 육지와는 다른 헤테로토피아”로서의 제주를 꿈꾸면서, 이번 소설도 사라진 제주 공동체를 회복하고 대안적 삶에 이바지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거듭 강조했다.
4·3은 이념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투쟁’입니다. 이념적 문제도 물론 있지만 육지 경찰과 군대, 서북청년단, 미군정 같은 외부의 침략자에 대항해서 제주 공동체가 똘똘 뭉쳐서 일으킨 항쟁이에요.
민중이 단지 이념 때문에 봉기하지는 않는다고, 4·3은 제주에 닥쳤던 생명의 위협 앞에서 민중이 ‘공동체주의’로 맞선 사건이라는 해석을 들으면서 작가가 생각하는 이념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공동체주의는 이념이 아니라는 걸까. 왜 굳이 생존과 이념의 문제를 분리하려는 걸까.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제주 공동체는 어떤 것일까. 고민은 그밖에도 많았다. 4·3이 제주의 경계를 넘어 전국화하고 나아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부분은 없는 걸까. 작가가 소망하듯이 4·3의 기억이 미체험세대로까지 전승되려면 그 기억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과연 기억의 전승은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 가능할지, 생각할수록 쉽지 않은 질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인터뷰에 도움이 될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찾은 북토크 자리는 그렇게 어려운 질문들만 남겼다.
영원히 나이 먹지 않는 젊음
두 손 가득 숙제를 든 기분으로 7월 19일 다시 현기영 작가를 만났다. 신간 소설책에 자필서명을 하다 왔다는 작가는 기운이 좋아 보였다. 등단한 지 48년, 단편 「순이 삼촌」(1978)을 발표한 지 45년 만에 원고지 3500매 분량의 장편을 완성한 팔순의 작가에게는 늘 ‘청년’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닌다. 등단 4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중단편전집(전3권, 창비 2015)에 실린 사진보다도 젊어 보이는 그에게는, 청년이라는 말이 그저 건네는 덕담으로만 여겨지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다산책방 2016)라는 산문집을 펴내기도 한 그에게 청춘이란 한 인간의 젊음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젊음에 부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4·3의 주역들이 젊은이들이었어요. 이 소설도 젊은이들의 이야기지요. 그들의 정열과 열광. 나를 제일 이입한 대상도 바로 그 젊은이들이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도 십대부터 서른살 안팎의 젊은이들이에요. 봉기해서 항쟁에 나선 사람들이 다 이십대였어요. 결혼도 안 한 젊은이들이 해방 후에 밝은 미래와 새로운 국가를 꿈꾸면서 떼로 뭉쳐 다녔어요. 다닐 때 걷지도 않았어요. 반달음질로 다녔지. 어딜 가더라도 반달음질로 다녔다고요, 그때는. 그러다가 그 젊은이들이 다 사라진 거예요. 4·3으로 도민의 10분의 1이 희생되었다고 말하지만, 젊은이들만 따지면 반 이상이 죽었어요. 결혼도 못해보고, 자식도 못 낳아보고.
제주의 젊은이들이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해방공간을 누비던 당시 현기영은 예닐곱살 무렵이었다. 신이 나서 그 꽁무니를 열심히 쫓아다니긴 했지만 제대로 끼기엔 아직은 어린 나이. 너무나 대단하고 멋있어 보였던 형과 누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모두 사라져버린 세상은 작가에게 더는 밝고 신나는 곳이 아니었다. 4·3 직전 고향인 노형에서 시내로 이사한 덕에 학살의 피해는 면할 수 있었지만, 토벌대가 장악한 고향 마을에서 타오르는 불기둥을 바라보던 경험은 작가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다. 4·3의 참혹함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비로소 내 나라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흥분, 이웃을 괴롭히던 친일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보려던 열정과 대비되면서 더욱 도드라졌다.
『제주도우다』는 항쟁이 일어나기 이전의 제주를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해방과 함께 갑자기 인구가 6만이나 늘어난 제주는 들떠 있었다. 주인공 안창세가 조천중학원을 다니던 1946년에는 전도의 소학교 학생 수만 2만에서 4만으로 늘었다. 일본이 물러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와 조선말을 쓰고 자치조직을 만들면서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한 이들은 보통의 제주 사람들이었다.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제주 민중이 무얼 해서 먹고살았는지 소설에는 상세히 드러나 있다. 미싱을 돌리고 나무를 패고 대장간에서 일하거나 장사를 다니는 풍경은 물론, 바닷가 해녀, 목축하는 테우리(목동)들의 일상에 더해 심지어는 아이 낳는 장면까지 세세하게 그려진다.
미군정에 의한 탄압이나 친일파의 복귀, 돌림병에 의한 죽음은 독자들이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며 그들의 울고 웃는 삶에 익숙해진 후 찾아오기에 더욱 불길하게 느껴진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활력이 사라지고,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1947년 3·1절 집회에서 일어난 발포사건이었다. 여러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면서 제주는 1948년 4월 3일 ‘탄압이면 항쟁이다’를 외치며 봉기를 시작했다.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 대신 분단을 기획하는 5·10단독선거를 거부하며 산에 올랐던 민중은 그렇게 1948년 겨울 참혹한 떼죽음을 맞았다. 작가가 사랑했던 정두길 선생도, 부대림도, 따알리아도 죽음을 맞았다.
나는 그 사람들이 죽을 걸 다 알고 쓰는 거잖아요. 그래서 참 슬펐어요. 내가 그 인물들을 참 애정했거든. 그래도 어떻게 해요. 3만명이 죽었는데 그 사람들만 살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소설 속 인물들이 대체로 젊은이들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젊음에 대한 작가의 애착은 남다른 바가 있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아끼는 대목 가운데 하나로 일본에서 간호학교를 다니다 귀국한 따알리아가 산지항을 거쳐 조천포로 가는 선상에서 정두길과 함께 여명을 맞는 순간을 꼽았다. 제주 북토크에서 정두길과 따알리아가 돌고래와 함께 일출을 보며 사랑을 싹틔우는 장면을 직접 낭송하기까지 했을 때는 조금 뜻밖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혼도 못해보고 자식도 낳아보지 못한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작가의 말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그 역시 ‘요즘은 다 선택’이라는 유보를 달았으니까.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마도 작가에게 젊음이란 4·3으로 인해 사라져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나 덧없이 스러진 생명들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가치인 모양이라고 믿게 되었다. 갓 해방된 나라에서 바뀐 세상, 새 나라 건설의 희망으로 들떠 바쁜 일 없이도 절로 반달음질 쳐지지 그냥 걷게 되지는 않았던 그 젊은이들. 그들을 동경하며 나도 어서 자라 저기에 끼기를 소망했을 어린 현기영의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 나이 들어도 늙을 수 없는 소설가의 모습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리라.
저항의 공동체에서 애도의 공동체, 그리고 그 이후
현기영의 문학이 아주 섬세하다면, 4·3의 전국화나 세계화, 화해와 상생처럼 그가 글 밖에서 쏟아내는 주장의 말들은 친절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뜨겁다. 여전히 4·3 추념식에서 서북청년단의 깃발을 흔들며 추모를 방해하고,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4·3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세력이 준동하는 현실을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어느새 높아져 있었다. 지금의 4·3특별법이 말하는 해결은 무엇이고, 정말로 그런 식으로 4·3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다 그에게 북토크에서 언급한 ‘공동체주의’에 대해 물어보았다.
제주 사람들은 본디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이 심했어요. 중앙정부 없이도 상부상조 방식으로 똘똘 뭉쳐서 잘 살았거든요. 일제시대에도 농촌에서는 연자방아를 돌리는 말방아계, 바닷가에서는 멸치 잡는 그물계, 그런 게 아주 많았습니다. 그렇게 무슨 일이든 공동체적으로 대응했으니 4·3은 해방공간에서 자주독립국가를 꿈꾸었던 민중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동체로서 봉기한 것이라고 봐야 해요. 사실 처음 원고에는 ‘아나키즘’이라고 썼는데 교정을 보며 ‘무정부주의’라고 고쳤어요. 그런데 무정부주의는 무질서의 상징처럼 되어 있기도 해서…… 내가 보기엔 공동체주의예요, 공동체주의.
실제로 일제강점기 동안 제주는 다양한 계 조직을 통해 일제의 수탈에도 공동체의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1927년 결성된 우리계(宇利稧)는 계 조직에서 이상사회의 현실적 실마리를 발견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이었다. 제주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특유의 관습과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나오는 조밀한 사회적 관계망이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을 것은 틀림없지만, 역사적으로 제주의 공동체는 생활에 뿌리를 둔 저항의 공동체에 가깝다. 동학의 역사만 보아도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평등한 민중의 나라를 꿈꿨던 것이 비단 제주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주 공동체의 역사가 큰 전환점을 맞게 되는 것은 해방 이후 4·3을 거치게 되면서였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일본과 만주, 중국과 오끼나와 등지에서 2백만명이 훌쩍 넘는 조선인들이 귀환했고, 제주에도 6만 이상의 인구가 돌아오게 된다. 남과 북 사이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분단이 아닌 통일독립의 제3지대로서 제주가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번 소설의 제목인 ‘제주도우다’가 언급되는 장면만 보아도 제주 공동체의 의미는 단순히 육지와 구별되는 섬이라는 의식이 아니라 분단을 거부하는 자치독립에 대한 열망임이 나타난다.
작년에 삼팔선이 그어진 직후에 일본에서 귀향민이 들어올 때 맥아더 사령부가 물었주, 남과 북 중에 어느 쪽으로 가겠느냐고. 그때 우리 제주 백성들은 이렇게 대답했주. ‘우리는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다!(2권 164면)
그런 열망이 육지에서 건너온 토벌대와 미군정이라는 외세에 의해 참혹하게 꺾이고 약 3만명으로 추산되는 엄청난 희생자를 낳게 되면서, 제주의 공동체는 기존의 관계성을 상실하고 해체되었다. 젊은이의 반이 죽고 똑똑한 사람은 그때 다 죽었다는 이야기는 제주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다. 4·3이 일어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작가의 고향 마을 노형뿐 아니라 제주의 중산간 마을 130여곳이 불타 사라졌고, 입산자와 토벌대 사이에서 진압과 보복학살이 거듭되면서 전에 없던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생계를 꾸려가는 일이든 권력의 부당한 수탈에 대한 저항이든 그 모든 걸 함께 대처해오던 제주 민중의 힘은 돌이키기 어려운 타격을 받게 된다. 소설 『제주도우다』의 시간이 끝나고 난 후에도 제주에서는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학살이 자행되었고, 4·3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것은 한국전쟁을 거친 뒤 1954년 한라산 입산금지령이 해제되면서부터다. 해방공간을 채웠던 다양한 자치조직들은 사라지고, ‘속솜하라’, 즉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그 빈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해방기의 열정과 흥분을 잊지 못하는 작가에게 제주 공동체란, 그때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무엇이 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저항의 공동체로서의 제주 공동체가 사라졌다고 한들 온 섬에서 희생자 하나 없는 집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면 그로 인해 생겨난 공동체성은 없을까. 당시를 살았던 제주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참혹함, 제주 사람 전체가 빨갱이로 취급받은 경험, 심지어 그런 혐의를 벗고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자원입대한 군대에서도 제주 사람들은 차별을 겪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시기를 거쳐 진상규명 운동이 조금씩 힘을 얻기까지 4·3은 입에도 올릴 수 없는 경험이었다. 작가 자신도 「순이 삼촌」을 출간하고 나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바 있다. 그러니 4·3으로 제주에는 ‘가매기 모른 식게’, 까마귀도 모르게 몰래 지내는 제사를 함께 치르는 새로운 공동체, 어쩌면 더 벗어나기 어려운 공동체성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지는 않겠냐고 질문을 던져보았다. 실제로 제주의 배타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육지것’이라는 말 자체가 4·3의 경험 없이는 설명되기 어렵기도 하니 말이다.
작가는 그 공동체는 ‘애도의 공동체’라고 했다. 4·3 이후 제주에는 오로지 애도의 공동체 하나가 남았을 뿐이라며, 그 역시 공동체가 아니랄 수는 없지만 그걸로 이전에 사라진 발랄한 공동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한두다리 건너면 뉘 집 딸 아들인지 다 드러나고 혈연 학연 지연으로 총총히 얽혀서 이를 숨 막힌다 여기는 젊은 세대가 종종 탈출을 꿈꾸게 하는 제주의 인간관계는 어떻게 보시는가 물어봤다. “그건 그냥 궨당이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궨당이란 친인척을 뜻하는 제주말로 서로 피할 수 없이 얽혀 있는 관계를 두루 일컫는다. 그가 생각하는 제주의 공동체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였다. 작가는 다시 한번 제주의 공동체는 그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애도의 공동체도 궨당도 작가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작가가 바라 마지않는 대안적 공동체는 무엇에 기반을 두어야 할까. 현기영 작가에게 제주 공동체의 바탕은 아마도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열망을 품고 그를 만들어나가는지의 여부에 달린 게 아닐까 싶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얄팍한 결정론이나 동류의식이 아니다. 작가의 눈이 바라보는 곳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미래에 있었다.
어떤 기억을 어떻게 전승할 것인가
『제주도우다』는 1943년부터 해방을 거쳐 유독 눈이 많이 왔다던 1948년 겨울까지를 다루고 있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형식으로 소설의 시작과 끝을 여닫는 것은 주인공 안창세의 손녀 부부인 안영미와 임창근이다. 이들은 누나와 외삼촌을 한꺼번에 잃고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 바로 앞까지 갔었다는 안영미의 할아버지 안창세를 중심으로 그가 십대 중반 경험한 4·3을 다큐멘터리로 다루고자 한다. 이는 『제주도우다』의 중요한 주제가 4·3의 원인에 관한 탐구이기도 하지만, 4·3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세대로의 기억 전승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안창세는 4·3이 휩쓸고 간 제주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떨치고 자식을 기르며 사는 일에 전념하고자 한다. 자신 안에 존재하는 참혹한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때 폭음을 일삼다가, 나이 든 후에는 세상살이에 거리를 둔 채 입을 닫고 푸성귀를 돌본다. 안창세는 손녀 부부의 간곡한 설득에 힘입어 그동안 쌓인 감각과 기억을 열흘에 걸쳐 울며 쏟아내고서 탈진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기억의 자살과 타살을 이겨내는 순간’이다. “난 애당초 죽은 사람이여. 그 사태 때 이미 죽은 사람이라. 너희들 눈에는 내가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난 허깨비여. 이미 죽은 사람이란 말이여”(1권 19면)라고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안창세는 입을 닫고 살았던 그 안창세와는 이미 다른 인물임에 분명하다. 스스로 지우고 잊었던 기억, 기억하고 말한다면 자식까지 가만두지 않겠다며 겁박하는 탄압의 공포를 이겨낸 안창세는 정두길에게서 받은 만년필을 손녀 안영미에게 넘긴다. 자신이 꺼내놓은 기억을 이어갈 책임을 후대에게 맡기는 상징적 행위인 셈이다.
에필로그가 포함된 3권은 슬프다. 작가가 그렇게 공들여 묘사한 해방 전후의 일상성도 사라지고, 느릿느릿 천천히 한 사람 한 사람이 품었던 젊은 꿈을 그려내던 작품의 전개는 갑자기 빨라진다. 주인공들 역시 곧 죽음을 피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 읽으니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는 심지어 정두길이나 따알리아에게 장엄한 죽음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이 싹트는 장면을 묘사하면서는 일출 무렵의 선상에서 돌고래까지 출연시켜 특별한 낭만을 부여했던 것과는 대비된다. 대지에 안겨 잠들 듯 스러지는 무장대의 죽음은 오히려 너무 대단하게 그려지지 않아서 더욱 깊이 아프고 시리다.
작가에게 이런 마무리가 참 좋았다고 말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거기까지는 그들이 나무로 풀로 물로 이 제주 어딘가에 지금도 살아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 슬프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좋았는데요. 그런데 영미 부부는 영 미덥지 않더라고요. 다큐가 잘 나올까 싶고요. 사실 4·3을 다룬 재미없는 작품도 많지 않나요?” 비문학 전공자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예상 밖의 질문에 작가는 잠시 웃다가 답했다.
4·3은 감당하기 어려운 비참이에요. 학살 양상만 나열해서는 곤란하죠. 나도 가능하면 안 쓰고 싶었어요.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불편해할 수 있거든요. 너무 슬프고 처참하니까. 그래도 아주 안 쓸 수는 없어서 썼어요. 이 슬픔, 이 재앙을 기억해서 앞으로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고 독자를 설득하려면 공감이 필요합니다. 과한 애도는 독자가 감당할 수 없고 공감과 연민이 무화될 수 있어요. 앞으로 4·3은 여러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경우 에피소드 하나만 있어도 그걸 재해석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고요. 총체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어요. 현재와의 연결방식도 자유로워야 하겠죠. 아우슈비츠 문학을 보면 새로운 작품이 끝없이 나옵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 같은 작품이에요. 슬프면서도 웃음이 있고 웃다가도 슬프고. 원래 제주의 장례문화도 그래요. 우리 이모 돌아가셨을 때도 봉분 만들고 나서 그 옆에서 장구 치고 북 치고 놀았어요. 지나친 애도나 슬픔은 상주도 너무 힘든 거죠. 웃음, 유머가 필요합니다. 4·3은 어두운 방 안의 큰 코끼리예요. 얼마든지 새로운 방식으로 다룰 수 있어요.
작가 자신도 아직 못다 쓴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4·3을 소설로 쓰는 일은 더는 하지 않으려 하지만 에세이로 쓸 이야기는 많다고. 4·3 이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던 시절에 어떻게 서로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맞아요. 아주머니들이 그 이야기를 하던 목소리, 분위기가 있었어요. 목소리를 낮추고 웅숭깊게 수군수군. 그이가 그때 거기에서…… 이런 말을 나누면 그때 이야기인 줄 딱 알았지”라고 답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마치 그 시기에 침묵밖에 없었던 것처럼 묘사되지만,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제사나 굿, 아니면 일상의 분위기를 통해서 4·3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진상규명 작업에 부족한 것은 비단 증언이나 기록만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도 자리하고 있던 경험들을 읽어낼 귀와 눈일 터이다.
어느새 훌쩍 시간을 넘겨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영미네가 다큐를 찍는 게 정말 좋을까요? 차라리 『제주도우다』를 가지고 극영화를 찍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현기영 작가는 웃으면서 답했다. “4·3공부도 많이 했다고 했고, 안창세 할아버지로부터 이야기도 잘 들었으니까, 잘할 거예요.” 사실 소설이 안창세가 영미 부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구성을 취하고 있으니 이 질문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를 찍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찬찬히 돌아보다 깨달았다. 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그가 일생을 바쳐 보고 듣고, 이야기를 수집하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 써낸 결과물이지, 한 인물의 증언만으로는 복원할 수 없는 세계였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요즘 4·3을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 때로 아쉬움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그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4·3 이전 제주 사람들이 어떻게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며 살았는지, 어떤 일로 생계를 이었고 무엇을 믿고 받들며 살아왔는지, 그런 일상의 깊이 말이다.
4·3 이후 제주의 공동체는 저항의 기억을 지우고 애도에 침잠하느라 실은 그 당시의 제주 역시 일상적 시간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오래 잊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4·3의 비극성은 이후 이어진 삶과 일상이 그 시절의 참혹한 기억과 분열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 있었던 셈이다. 현기영 작가가 한 일은 바로 애도로만 남은 제주 공동체에 일상을 돌려줌으로써 달리 생동하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실마리를 던져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