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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진은영 陳恩英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등이 있음.
dicht1@daum.net
—처럼
거울 날씨는 몹시 추운 것처럼
거울 속의 집은 어디든 들어갈 수가 없는 것처럼
사물들은 얼음 주먹을 쥔 듯 단단한 것처럼
백만개의 조명등 아래
거울이 주연배우로 등장한 것처럼
거울을 위해서는 울어줄 수 없는 것처럼
그의 흔들리는 어깨는 우리의 포옹을 거부한다
우리의 눈물에도 젖지 않는 것처럼
생채기 하나 없는 표면을 따라 눈물 콧물 빗물이 아래로 줄줄 흐르는 것처럼
거울에 최초의 빛이 있으라, 감사합니다, 온갖 거울의 승승장구
거울은 대홍수로도 멸망하지 않는 것처럼,
물 위를 두둥실 잘도 떠내려가는 한개의 거울처럼
어느새 물질을 마친 노련한 잠수부처럼
바다 위로 떠오르는 무인도의 모래밭에서
맑게 갠 하늘을 비추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지긋지긋한 세계상(Weltbild)으로서의 거울
그 앞에 선 야자수에게 야자수를,
너 자신과 조각구름과 바다와 파도를 배달해드리는 것처럼
(덤으로, 밀물에 실려 온 남성용 하이힐과 찢어진 레이스 속옷도)
고요한 섬에서 상품들의 권태로운 무성생식을 반사하는
거울왕국처럼
이 완벽함은 깨지지, 깨지지 않는 것처럼
쨍그랑, 망치질은 고전적 비장미로 채색되고
한번 내려치면 수천개 조각마다
수천개의 완벽한 야자수가 비치는 것처럼
거울 앞에 세운 거울처럼,
무한히 늘어나는 거울 액자 속 거울왕국처럼
우리는 눈먼 사람들이 걷는 것처럼
자꾸 구겨지고 찢어지며 소리 내는 얇은 종이들처럼
심장 위에 빼곡하게 새겨진 필기체의 낯선 글씨들처럼
시끄러운 침묵이 들리는 것처럼
불과 회색 연기에 휩싸여 거울 속을 달려가는 엑스트라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한낮에, 젠장, 또 거울왕국에 있는 것처럼
돼지와 소와 인간과 닭들이 지르는 비명을 거울이 듣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가 거울 위를 분홍빛 귀의 따개비들로 뒤덮을 것처럼
매일매일 밤이 올 것처럼, 새로운 과거가 올 것처럼
『피리 부는 사람』 제2판
어린 시절엔
엄마의 자장가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지
좁고 불안한 은빛 톱 위에서—
세월의 거대한 밀가루 반죽 위에
무수히 찍히는
조그만 발자국, 늘 따라오던
환멸의 검은 생쥐들을
넘— 어— 서—
그는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
아무도 없는 불꽃 속에
양초를 따라 흘러넘치는 밀랍처럼 음악이 흐르지
어두운 마룻바닥에, 빛의 가느다란 틈새,
거기로 흘러들기 직전
굳었다는 흰 얼룩 이야기
늘 그렇고 그런, 슬픈 술잔 속을 떠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