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황규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책구름 2023
‘시인들의 시인’에서 ‘시민들의 시인’으로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korin2@hanmail.net
한 작가가 후대의 독자들에 의해 여러갈래로 해석되고 각기 다르게 평가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작가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주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문학사에서 김수영만큼 존재감이 뚜렷한 시인도 없다. 문학사적 평가나 비평적 자리매김을 둘러싼 논쟁만이 아니라 시인과 시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면에서도 독자들 사이의 격차가 자못 심원하다. 한편에는 그의 산문, 번역, 독서 목록들을 더해 열정적으로 읽어낸 ‘거대한 김수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교과서에 수록된 서너편의 작품과 편의적 해석으로 박제된 ‘납작한 김수영’이 있다. 한국문학사에 마치 두명의 김수영이 존재한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황규관의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김수영의 비원』은 두 김수영 사이에서 누구도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던 하나의 일을 시도한 책이다. 납작한 김수영을 계몽적으로 부풀리거나 거대한 김수영에 종지부를 찍는 대신, 누구나 자기 삶과 꿈을 던져 김수영에게 닿을 수 있도록 징검돌을 놓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김수영에 대한 저자의 두번째 저서이다. 첫번째 저서인 『리얼리스트 김수영』(한티재 2018)의 마지막 면은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김수영의 유산—인용자〕을 다 탕진했을 때 김수영은 드디어 ‘시인들의 시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를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있게 하는 것은 후대의 과오이다.” 그후로 저자는 김수영을 ‘시인들의 시인’에서 ‘시민들의 시인’으로 끌어오는 일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은 것 같다. 여기에는 “시를 통해 자기 삶과 역사의 변화를 꿈꾸는 일”(56면)을 시인들만의 것이 아닌, 시민 모두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저자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 실제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전주 금암도서관에서 시민들과 함께했던 ‘김수영 읽기’ 강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씨앗이 두툼한 한권의 책으로 피어나도록 물을 댄 것은 저자가 마음 깊이 품은 ‘일념’이다. 그것은 이 책의 부제인 ‘김수영의 비원(悲願)’이라는 말에 응축되어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수영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무엇, 그의 시를 관통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는 하나의 비원은 무엇인가.
저자는 이 물음을 단단히 붙들고 통사적인 시읽기를 수행하면서 김수영이 살았던 시대와 역사를 통과하여 시인의 내면과 정신을 촉진(觸診)하는 성실한 여정을 보여준다. 그는 김수영의 비원을 섣불리 몇개의 단어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조건을 넘어서고자 하는 ‘바람’”(83면)이기도 하고 “‘지금-여기’의 현실에 응전하면서 극복해가려는 태도”(107면)이기도 하며 “좀체 식지 않는 근원적인 그리움 같은 것”(261면)이기도 하다. 이렇게 역사적 상상과 현재적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김수영의 비원이 시 자체의 비원이며 시의 본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김수영의 시는 “삶의 진실과 우리가 사는 역사의 질곡을 시가 돌파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기쁨”(20면)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바로 이것이 수많은 시인과 연구자, 철학가와 예술가들을 매료시킨 김수영 시의 힘이며, 난해함과 어지러운 해석들 사이에 소외되어 있던 일반 독자들이 드디어 이 책을 통해 경험하고 느끼게 될 김수영 시의 매력이다.
좋은 글은 누구나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였지만 읽는 이의 관심과 수준에 따라 평범한 이해부터 깊은 통찰에 이르기까지 여러겹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김수영 시의 난해함에 주눅이 들었거나 흥미를 잃어버린 독자에게는 훌륭한 길라잡이가 되어주고 김수영 시를 열심히 읽어온 시인이나 연구자에게는 새로운 지적 영감을 선사한다. 「공자의 생활난」에서 시작된 꽃의 이미지가 「사랑의 변주곡」의 “사랑에 미쳐 날뛸 날”과 시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확신, 「사랑의 변주곡」의 씨앗 모티프가 동시대 사상가 함석헌의 ‘씨’사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 수 있다는 지적, 산문 「저 하늘 열릴 때」에서 보여준 4·19혁명에 대한 김수영의 인식을 ‘개벽적 상상’과 연결해볼 수 있다는 생각 등은 후속 연구를 독려할 만하다. 특히 「풀」에 대한 저자의 새로운 해석이 흥미롭다. 전작에서의 해석을 반성적으로 철회하고 전면 재검토를 시도한 저자는 역동성의 회복도 아니고 바람에 패배한 절망도 아닌, “ “풀”의 삶에는 쓰러지는 일도 곧 살아가는 일이라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 “‘때’를 믿으며 과거와 현재로 이루어진 ‘지금’을 사는 일”(397면)에 대한 김수영의 깊은 긍정을 읽어낸다.
김수영의 시는 분명 어렵고 까다롭다. 역사적 현실을 대하는 김수영 특유의 태도에서 비롯된 난해함이 있고, 한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 전생애를 관통하는 시인의 사상을 좇아야 하는 고단함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난해의 장벽을 넘어서려 노력한 자에게 돌아올 보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김수영의 시를 읽는 것은 테크놀로지에 장악당한 시대에 시의 책무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는 일이며,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시를 통해 다른 세계를 꿈꿀 것인지 고뇌하는 일이다. “김수영이 던져준 ‘물음 보따리’”(398면)는 시대에 물러서지 않고 시의 책무를 내려놓지 않은 ‘정직함’의 유산이다. 이 유산을 시민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저자의 사명감은 김수영을 높이고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시와 시읽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이다. 이 빛을 따라가면 우리의 내면과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시대의 어둠 속에서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용기있게 묻고 정직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두께는 김수영의 유산을 최대한 탕진하겠다는 저자의 의욕을 보여준다. 그래서 다행이다. 488면에 달하는 세심하고 정성 어린 징검돌 덕분에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사랑의 변주곡」)라는 김수영의 비원이 역사의 시간을 건너 우리의 시대로 오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