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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특별기획│한강의 문학세계

 

‘시적인 산문’이라는 평가에 대하여

한강의 작품세계와 시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되찾은 ‘님’의 시간」 「돌봄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1. 한강의 소설과 한국시

 

한국은 시가 두텁게 살아 있는 나라이다. 시집 코너가 서점에서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시선(詩選) 시리즈를 몇십년간 발간해온 출판사도 여럿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이번 노벨문학상 심사평에 ‘시적인 산문’이라는 말이 등장한 바탕에도 한국시의 전통이 어느정도 기여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심사위원들은 한강의 작품들에 실제로 시가 용해되어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았을까. 가령 그의 초기작 「진달래 능선」(『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만 해도 떠올려볼 만한 시가 다수 있다. ‘진달래’가 들어간 제목에서 이미 소월풍이 감지되는 이 단편소설은 아이를 잃은 사내와 그의 집에 세 들어 살게 된 한 남자의 사연을 그리는데, 이 남자 역시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처지다. 죽은 아이가 좋아했던 나무를 태우며 심중에 남은 말이 많다고 회고하는 사내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소월의 시 「초혼」을 연상시킨다. 더불어 세상을 떠난 아이에게 가닿을 수 없는 거리를 꽃나무를 통해 그려 보이는 대목1은 이상의 시 「꽃나무」2와 닮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족을 잃은 화자가 여동생 또래의 처녀들이 떼 지어 몰려가는 것을 보면서 들뜬 희망을 환각처럼 느낄 때, 이 장면과 감정상태는 서정주의 시 「부활」3과 궤를 같이한다. 마지막으로 한강의 초기작에 종종 등장하는, 아픈 청춘의 형상과 특별한 병이 없음을 진단받는 상황은 즉각적으로 윤동주의 「병원」4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초기작 「진달래 능선」만의 예외적인 속성은 아니다.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에서 남자 주인공이 라일락 꽃그늘 아래에서 여자 인물과 다른 이가 입맞춤하는 모습을 본 뒤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라일락 향을 기억하는 장면에는 이시영의 시 「라일락 향」(『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이 녹아 있다. 사랑에 빠진 감각을 눈꺼풀이라는 사물과 귀신에 홀린 듯한 일에 비유할 때는 김행숙의 시 「눈꺼풀 속에 눈꺼풀이 감길 때」(『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가 연상된다. 또한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하는 관음보살의 형상을 마치 내리는 눈처럼 그린 단편소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에는 한국어로 시를 쓴 일본 국적의 시인 사이또오 마리꼬(齋藤眞理子)의 시 「눈보라」(초판 『입국』, 민음사 1993, 개정판 『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책 2018)의 잔영이 어른댄다. 「눈보라」에 담겨 있는 이 세상에 단 두 사람만 남은 듯한 분위기, 그리고 좁은 길에서 만난 두 사람이 각자 눈보라를 헤치며 오래 걸어온 사람임을 알아보며 서로에게 길을 내어주는 평화의 기운은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도 배음처럼 깔려 있다. 마지막으로 「채식주의자」 속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채식주의자』, 창비 초판 2007, 개정판 2022, 50면)라는 영혜의 발언에서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5는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면 과장일까.

이렇게 본다면 한강의 작품은 다시 한번 시가 두텁게 살아 있는 나라인 한국의 면모를 알아보게 만든다. 그의 소설에서 감지되는 시적 기운은 그의 작품 곳곳에 스민 한국시의 여러 장면과 이미지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산문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들과의 교류는 소설 속 한 장면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때로는 작품의 전체 구조 내지 분위기를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는 한강 소설이 보유한 시적인 면모의 일부분일 뿐이겠지만, 그의 작품을 읽는 과정에는 한국시를 읽는 일이 내재되어 있다고도 볼 만하다.

 

 

2. 시와 의미 혹은 리얼리티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경험하고 나서 ‘섬뜩함’이나 ‘귀기(鬼氣)’를 느꼈다고 토로할 때가 있다. 예술작품 안에서 파악하기 힘든 낯섦을 감지하거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를 보았을 때 주로 그런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를 문학과 관련한 어휘로 바꾸면 어떤 의미에 직관적으로 가닿은 ‘시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후술하기로 하고, 우선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그의 작품을 둘러싸고 대중이 놀라움과 경계심을 동시에 표한 일 역시 앞의 맥락으로 말해볼 수 있다. 이는 대중이 단순히 성적(性的)인 대목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는 작품이 지닌 불편함 또는 섬뜩함을, 외설을 빌미 삼아 방어하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창비 2014) 등을 영어로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는 『채식주의자』에 대해 “사회 금기에 도전하는” “잔혹하고도 지극히 시적인 연작소설”6이라 언급한 바 있다. 시적이라는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는 “작품 특유의 분위기와 어조와 결이 하나의 정제된 이미지로 다가오”며 “생생한 인상”을 받는다고 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작품을 사회학적 보고서와 구별 짓는 특성이라는 메시지를 더한다. 그는 『채식주의자』의 어조와 분위기를 “단정적인 어조와 무심함”이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는 작품에서 ‘영혜’라는 인물이 취한 주체적 태도와 관련될 것이다. “단정적인 어조”는 ‘단호함’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싫어’와 ‘아니’라는 말을 구차한 설명 없이 칼같이 내뱉음으로써 강력한 부정의 목소리를 구사하는 인물이다. 또한 “무심함”이란 영혜가 속된 세상으로부터 취한 어떤 거리감을 감지하는 말처럼 해석된다. “결”이라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무늬로 푼다면 말의 무늬인 문체를 말하는 듯 보인다. 대체로 수긍이 갈 만한 해석이고 표현이다. 하지만 좀더 살필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의 한 대목을 두고 시적인 것을 더 탐구해보기로 하자.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채식주의자』(210면)

 

세상의 나무를 형제라고 돌려 말하는 방식은 비유라고 설명할 것도 없이, 한국어 사용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적이라고 느낄 만한 문장이다. 그런데 한강의 작품이 주는 시적인 인상은 저같은 수사의 사용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보다 더 범위가 크다. 인용한 구절은 「나무 불꽃」에서 ‘인혜’가 동생 영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장면으로, 말을 거의 하지 않던 영혜가 드물게 입을 열어 읊조린 내용이다. 그러니까 저 말은 병실의 쇠창살 너머로 보이는 나무를 바라보며 나온 표현이며, 동생을 입원시키며 무거운 죄책감에 사로잡힌 언니를 옆에 두고 흘러나온 소리이다. 현실의 자매 한명이 다른 한명을 정신병원에 가두는 중이고, 갇힘당하는 존재가 쇠창살 너머 저편의 나무에서 우애를 느끼는 상황. 작품 속에 시적인 문장이 한줄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상황 하나가 통째로 던져져 있는 셈이다. 비정한 인간과 유정(有情)한 사물이 한 장면 속에 제시된 아이러니는 인간들 사이에 ‘자매’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이후 자연스럽게 ‘가족’에 대한 질문을 더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가족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도 묻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한강의 작품에 시적인 것이 발동하는 장면 하나를 보았다.

 

아까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뭘?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채식주의자』(215~16면)

 

동생 병문안을 왔다가 병동 안에서 ‘물구나무서기’라는 특이행동을 반복하는 영혜를 처음 알아본 인혜가 동생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나무’에 자매와 같은 친밀감을 느낀 존재가 얼마 뒤 ‘물구나무’를 서고 또한 나무들이 물구나무를 서 있다고 느끼는 상황. 이런 장면전환 또한 시적이다. 시는 의미적 유사성만이 아니라 소리와 문자의 형태까지도 연상의 소재로 활용하며 전개되는 특징이 있는데, ‘나무’에서 ‘물구나무’로의 이어짐은 그런 면에서 꽤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전환에서 시적 방법으로서의 연상작용보다 더 중요한 지점은 거꾸로 선다는 것 자체이다. 영혜라는 인물의 자리가 세상에 거꾸로 선 자리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러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자리라는 의미이다. 거꾸로 서서 꿈을 꾸는 자리라고 부를 만도 하다.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에 대항하여 거꾸로 서 있는가, 바로 그 내용이다.

「내 여자의 열매」에 기원을 두는 영혜의 모습은 ‘굶주린 자’이며 ‘헐벗은 자’이고 ‘목마른 자’, 그리고 ‘집이 없는 자’의 형상에 가깝다.7 영혜를 ‘식물 되기’를 수행한 것으로 읽어내는 독법에는 조금 문제가 있다. 식물을 둘러싼 다양한 상상력, 특히 신화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이를 순수한 태초로 돌아가려는 의지로만 해석한다면 독자를 몰역사적인 상징언어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 위험이 작동한다. 그래서 인물이 처한 현실과 역사적 맥락을 덜 읽어낼 가능성이 생긴다. 식물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반란 내지 항거이다. ‘어디에 살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는지’가 중요해진 세계에서, 영혜는 ‘우리가 먹는 것이 무엇이고, 입는 것은 또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에 갈증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그리고 여기에 더해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볼 수 있게끔 극한의 박탈 상황으로 자기 자신을 몰고 간다. 그 자리에서 그는 현실이 강요하는 ‘먹는 행위’(집어삼킨다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를 거부하고 그 대신 ‘삶의 의미’를 먹는다. 아니, 음미한다. 여기가 바로 한강의 작품 속 시적인 것의 중심이다. 시를 떠올리면 생각하게 되는 이미지나 분위기, 어조 등은 저 음미를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시는 최종적으로 삶의 의미를 묻는 자리에 이르러 완미한 상태가 된다. 저 의미 내지 진실에 가닿으려는 치열한 탐구에는 늘 시적인 것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현실의 정확한 인식은 ‘시적’ 창조의 과정에서만 가능”8하다는 말을 새삼 다시 떠올리게 된다.

 

 

3. 영혼과 영원, 시(민)적 덕성과 시적 시간

 

한강 작품에서 시적인 것을 논하는 자리라면 당연히 한강의 시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겠다. 그의 시와 소설은 상당히 밀접한 영향관계에 있으며 동일한 근원을 지닌 언어의 자장 속에 자리한다. 가령 ‘파란 돌’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시(『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와 소설(『노랑무늬영원』, 문학과지성사 2012) 모두에 있으며 거기서 다루는 꿈이 유사하다는 점은 아주 작은 사례일 뿐이다. 두 장르의 언어는 주제 면에서도 결정적으로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이로 인해 한강의 시를 읽는 일은 한강의 소설을 더 깊이 이해하는 일로 우리를 이끈다. 물론 그 역(逆)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전문

 

한강의 유일한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수록된 이 짧은 한편의 시에 한강 작품의 모티프가 꽤 많이 흩어져 있다. 우선 ‘흰빛’이 있다. 흰 밥공기와 그 안에 담겼을 쌀 그리고 거기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등등, 저 순하고 고요한 흰빛이 먹먹하게 시선을 붙잡는다. 그의 작품에서 ‘흰빛’은 어떤 순결한 것, 더럽혀지지 않은 것을 반복적으로 암시한다.9 중요한 점은 그것이 특별한 외부에만 있지 않고 나의 내부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먹는 행위의 어려움’이 있다.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주의자』에 그려진 일종의 금식 내지 먹는 행위 앞의 주저함은 과연 무엇일까. 작가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의 상황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소설 『흰』에서도 적은 바 있다. “방금 지은 밥을 담은 그릇에서 흰 김이 오르고 그 앞에 기도하듯 앉을 때”10라는 구절과 이 시를 겹쳐놓으면 시의 풍경 또한 기도나 애도의 장면으로 볼 만하다.

한강 소설세계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보자면, 먹는 일 앞에서 인물이 멈춰 서는 장면은 『여수의 사랑』에서 『내 여자의 열매』로 넘어오는 시점에 포착되며, 이는 그의 소설 속 인물의 사회적 계층이 바뀌는 양상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방 한칸에 세 들어 살며 ‘세상의 끝’과 같은 먼 곳을 동경하는 청춘을 조망하다가 자가를 소유한, 혹은 그것이 임박한 중년의 삶을 주목하는 방향으로의 변화. 달리 말하면 인물들이 ‘서울의 아파트’에 살기를 원하는 한국적 삶의 경로에 본격적으로 진입해간다고 볼 수 있다.11 이 변화 지점에서 한강의 여성 인물들은 먹는 일에 장애를 겪는다. 소위 먹고살 만해지는 시점에 이르자 먹는 행위가 어려워진 셈이다.

아마도 한강의 소설 속 인물이나 시 속 화자는 나의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남의 밥그릇을 탐했을지 모를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나 나의 생존이 빚진 어떤 무관심과 착취를 예민하게 감각한 것 아닐까.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이 늘어날수록 내가 죄지은 게 많아진 건 아닌가 하는 염결성을 띤 염려, 모두가 중산층 되기에 몰두한 삶에서 오는 갑갑함, 나의 영혼이 더이상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한자리로 불러모아 하얗고 순결한 것을 앞에 두고 의식을 치르는지도 모른다. 이 의식은 어쩌면 껍데기가 되어버린 자신의 삶에 대한 애도이면서 ‘서울에 사는 중산층의 삶’12이라는 목표에만 매달리며 상해버린 영혼을 위한 진혼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면 꼭 좌절과 패배감이 드리운 비극적 의례의 풍경만은 아닐 것이다. 저 예민한 반성은 물신숭배를 강화하는 삶의 방식과 충돌하는 자유의 의식과, “모든 인간의 근원적 평등성에 대한 긍정과, 이 평등성이 곧 인간역사의 창조적 가능성 그 자체라는 신념”13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화자는 마지막에 비로소 흰밥을 먹는 행위를 통해 저 순결한 것을 천천히 음미하듯 공들여 자신의 내부로 다시 들이고 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영혼’이 있다.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속에 영혼이라는 단어가 표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라는 구절에 숨어 있다. 특별한 의식을 치르는 장면에 지나간 것이 무엇인지 상상해보고, 또 “영원히”라는 글자를 소리 내어 천천히 발음해보면 자연스럽게 ‘영혼’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영혼, 영, 넋, 혼 등은 한강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놀라우리만큼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으로 찾아온다. 『소년이 온다』의 ‘동호’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의 ‘유령’도 그렇다. 또한 「내 여자의 열매」의 ‘식물’과 「작별」(『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의 ‘눈사람’같이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신한 모습 또한 영혼의 계열로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죽은 존재가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은 경건한 아우라를 품은 시적 인상을 야기한다. 그런데 저 존재들은 왜 그토록 자연스럽게 한강의 작품으로 찾아드는 것일까.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새벽에 들은 노래」 부분

 

이 단순한 반복 속에 어떤 넉넉함이 느껴진다. 한 글자로 된 어휘를 거듭 발화하며 단수(單數)적인 것을 복수(複數)적인 흐름 속에 배치해서일까. 이는 마치 고립된 존재와 행위란 그것들을 구별하는 의식을 바탕에 두었을 때만 가능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의 목소리는 숨과 숨을 연결하고, 넋과 넋을 이으며, 보는 행위 속에 이미 어떤 보는 행위가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니 보는 일도, 숨 쉬는 일도, 영혼을 갖추는 일도 이미 그 행위 이전에 세상에 자리하고 있던 존재들과의 교류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마치 숨어 있던 숨의 주인들(“숨은 숨”)이 갑자기 눈앞에 드러나는 느낌을 받는다. 이 ‘숨어 있는 숨의 주인들’이 바로 한강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그의 장편소설들이 주로 진혼제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 반복되는 중얼거림은 주문(呪文)처럼 작용한다. 그리하여 시의 뒷부분에 기다림의 지평을 열고 닫았던 입을 열게 만드는 장면이 펼쳐진다(“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기다려봐야지//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혀가 녹으면//입술을 열어야지//다시는//이제 다시는”). 한강의 작품에서 영혼과 조우하는 서사는 늘 인물이 세상과 건강한 연결감을 회복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이야기다. 그것은 인물의 삶이 의존해온 기제를 점검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삶의 양식을 바꾸어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선명해지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조정하게 한다. 이를 시(민)적 덕성의 구현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영원’이 있다. 한강의 작품에서 어떤 장면들은 무연히 흐르는 시간에서 비껴나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다시 앞서 인용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의 장면으로 돌아가자. 지나간 것을 불러와 의식을 치르는 순간, 오래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오지 않은 미래가 한자리에 모여든다. 그러고 보면 과거 시제 문장(“지나가버렸다고”) 뒤에 바로 진행형 시제 문장(“지나가버리고 있다고”)을 연결해 시제를 초월해버린 듯한 표현방식을 취한 것도 우연은 아니고, ‘어느’라는 시제 불특정의 수식어가 붙은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휴지(休止)와 행갈이를 통해 침묵과 전환을 품은 시의 운율은 시간을 압축하는 장치이다. 소설에는 운율이라는 장치가 없지만,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는 죽은 존재와 산 존재를 한자리로 불러와 둘의 대화를 통해 삶의 경로를 점검하여 미래를 결심하게 만들고 끝내 실현하게 하는 서사적 전환이 있다. 이는 인물에게 두터운 시간의 질감을 선사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소설의 주체에게는 내 삶에서 멀어진 과거, 내 삶과 동떨어진 미래란 더이상 없다는 의식이 발생한다. 한강의 작품에서 영원이란 현재에 개입하는 과거와 그 결과로 산출된 미래가 날카롭게 결합한 순간과 다르지 않다. 달리 말해 그의 작품 속 ‘영원’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어지면 좋을지를 고민하는 시간이다. 어쩌면 작가는 영혼과 결속된 영원이라는 두터운 시간을 탐구함으로써 우리 역사가 어떻게 이어지면 좋을지 고민해보는 데까지 자신의 서사를 확장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원이라는 테마에는 성찰의 시간이자 결단의 시간이라는 의미가 있다. ‘더 살라’는 명령14이 이 시간으로부터 건너온다. 저 ‘더’는 당연히 물리적 시간의 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어딘가에서 나에게 보내는 시선에 응답을 요구하는 ‘더’이며 행동으로써 삶의 의미를 구하라는 요구로서의 ‘더’이다.

 

 

4. 응답과 행동의 시

 

시 「새벽에 들은 노래 2」에는 한강이 자주 기대는 사물로서의 나무가 나오며, 그 나무를 통해 그가 진실로 기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여백이 많은 이 시는 낭독을 통해 들을 때 특히 깊은 울림을 준다(한강은 이 시를 직접 노래로 만들기도 했다).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하늘과//나를 이어주며 거기//우듬지//잔가지//잎사귀 거기//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내 마음//누더기,//너덜너덜 넝마 되었을 때도//내가 바라보기 전에//나를 바라보고//실핏줄 검게 다 마르기 전에//그 푸른 입술 열어”.

시를 읽고 나면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나무인지 하늘인지 고민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무언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감각이고 의식이다. 한강의 작품을 여럿 접해본 독자라면 그의 작품이 자주 ‘눈’〔雪〕을 그리거나 ‘보는 행위’ 속에서 시작되며 또는 마무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15 이때 눈은 눈〔目〕이면서 눈〔雪〕이기도 하며, 봄 역시 종종 봄〔視〕과 봄〔春〕을 같이 불러온다. 언어의 중의성을 활용하는 것은 시적 기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강의 작품에서는 이를 시적 뉘앙스를 자아내는 기법 정도로만 가볍게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새벽에 들은 노래 2」가 말하듯 나를 보는 시선은 내 주위에 상존하며 내게 깊은 안도감을 준다. 이 안도감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며 나의 나약함과 속됨 또한 숨김없이 내보이도록 한다. 다시 말해 이 시선에는 나를 섬세하게 살피고 또 자유롭게 내맡기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소년이 온다』(213면)

 

『소년이 온다』를 증언문학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소설이 처참한 현장과 고통들을 회피하지 않고 낱낱이 기록하여 기억하게 만든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그런데 한강의 작품에서 시선이 놓이는 장면들을 생각하면 저런 식의 설명은 진정 중요한 부분을 누락하게 만들기 쉽다. 인용한 대목에서 소설의 인물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학살과 고문과 강제진압의 장면’이 아니라 그런 끔찍한 경험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기억하게 하는 어떤 시선’이다. 말줄임표 이후에 오는 사건이 비극적 결말일지라도 그와 무관하게 끝끝내 눈을 뜨고 응시하던 시선과 응시의 대상으로서의 시선은 사건 이후에도 말줄임표처럼 우리 앞에 남는다. 무엇을 응시하는지는 차치해두고 응시라는 어휘 속에 이상한 긍정의 힘이 새겨져 있는 것은 분명하며, 작가가 증언하는 사건의 목록에서 이 힘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것도 사실이다. 무언가 우리를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제 저 ‘나를 보는 것’이자, ‘내가 보는 것’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묻자.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소년이 온다』(114면)

 

양심의 엄습을 말하는 이 장면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양심은 왜 무서울까. 우선 양심은 머리로 이해하는 일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양심은 이해를 넘어선 절박한 행동16 속에서 불현듯 모습을 비춘다. 그래서 양심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일은 난센스에 가깝다. 양심은 이해하고 나서 행동하는 식으로 순서대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행동 속에서 알아채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얼굴을 보인다. 또한 나의 행동이 공동의 뜻과 만나는 순간 행동은 양심뿐 아니라 우애의 의식도 싹트게 한다. ‘나’가 수십만 사람들에게 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와의 협동 속에서 우애와 양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애와 양심이 짊어진 책임은 꽤나 무겁다. 그 책임은 단번에 우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덕성의 오랜 누적과도 관련한다. 당연히 이는 한 개인의 노력으로만 한정되지 않고, 그가 속한 사회 전반이 덕을 쌓아 공들인 시간과 연결되어 있을 터이다. 소설 속 인물이 자신의 소속감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다는 식으로 겸허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한강의 작품 속에 눈이 등장할 때 우리는 그 눈에서 양심의 시선을 느껴야 한다. 작품 속에서 인물이 어떤 감정과 의식과 그 토대인 행동으로 양심의 시선에 응답하는지, 어떻게 역사를 이어나갈 것인가 스스로 고민하는지 자세히 살펴야 한다. 그 시적이고도 시민적인 고뇌의 장면을 손에 쥔 채 문학의 역사를 다시 볼 때, 우리는 한국의 한 시인이 시론을 펼치면서 ‘양심’과 ‘행동’이라는 단어를 동원해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비로소 또렷이 이해하게 된다.

 

 

  1. “한없이 넓고 황량한 벌판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 그 아이가 서 있소.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오……”(『여수의 사랑』, 259면).
  2.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하나도없소 (…)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이상 「꽃나무」,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 박상순 엮음, 민음사 2019).
  3.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어 수나! 수나! 수나!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서정주 「부활」, 『미당 서정주 전집 1』, 은행나무 2015).
  4.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윤동주 「병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미래사 1991).
  5.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전집』, 창비 2013.
  6. 데보라 스미스 「자극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질문하고」, 이예원 옮김, 『대산문화』 2016년 여름호.
  7. 「내 여자의 열매」(『내 여자의 열매』, 초판 창작과비평사 2000, 개정판 문학과지성사 2018)의 등장인물인 아내는 먹는 것을 힘들어하고, 옷을 벗어던지고 싶어하며, 물을 계속 원하고, 집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데 이는 「채식주의자」 영혜의 증상과 거의 같다. 또한 이는 기독교에서 특별한 주목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 ‘굶주린 자, 헐벗은 자, 목마른 자, 집이 없는 자’의 형상과도 유사하다.
  8. 백낙청 「리얼리즘에 관하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 민족문학의 현단계』, 창비 2022, 402면.
  9. 가령 한강은 『흰』의 「레이스 커튼」이라는 장에서 한 건물 이층의 커튼을 바라보며 이렇게 적고 있다.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흰』, 초판 난다 2016, 개정판 문학동네 2018, 70면)
  10. 「쌀과 밥」, 같은 책 110면.
  11. 「채식주의자」에서 수완이 좋은 인혜가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옮겨간 뒤 치른 집들이에서 영혜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또한 『내 여자의 열매』에 실린 단편 「철길을 흐르는 강」에는 서울살이라는 삶이 어떤 것인지가 인물의 입을 통해 직접 묘사된다. “수백만의 불행을 만들어내는 도시, 수백만의 피로한 인간들을 뱉어내는 도시에 대한 영화야. 제목은 ‘서울의 겨울’이라고 붙이겠어. (…) 더 이상 이곳에서 뭘 바라지? 이곳이 준 게 뭐가 있어? 밑 없는 갈증, 탕진, 굴욕, 상처, 환멸, 그 밖에 대체 뭐가 있었어? 언제까지 이곳의 비루한 각본에다 몸뚱이를 구겨 넣으면서 살아가야 해?”(362~63면)
  12. 최원식 또한 『채식주의자』를 분석하며 인물들의 삶에서 서울의 중산층으로 편입하기 위한 고투를 읽어낸다. 최원식 「우리 시대 한국문학의 두 촉」, 『창작과비평』 2016 겨울호, 83~85면 참조.
  13. 백낙청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216면.
  14.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작별」, 『흰』, 133면)와 같이 죽지 말고 삶을 살아가라 종용하는 목소리는 한강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15. 장편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 혹은 단편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이나 「작별」을 펼쳐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시집에서 눈을 그리거나 드러내는 장면은 너무나 많다.
  16. 그런 점에서 『소년이 온다』의 영역본 제목이 ‘Human Acts’인 것은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