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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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핵위기 시대에 다시 피폭체험을 상기한다는 것

이영진

러시아-우끄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으로 촉발된 전쟁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전세계적으로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202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일본의 반핵단체인 ‘피단협’(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이 선정된 것 역시 이러한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수많은 반핵운동단체 중에서 왜 피단협인지, 그리고 피단협이 어떤 성격의 단체인지에 대해 보도하는 기사들은 드물었다. 사실 일본을 필드로 하는 인류학자인 나에게도 일본의 반핵운동단체하면 떠오르는 원수협(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 원수금(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 같은 단체에 비해 피단협은 생소한 이름이었다. 아니, 그 생소함은 ‘세계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슬로건에서 느껴지는 ‘피해자주의 내셔널리즘’(victimhood nationalism) 때문에 한동안 히로시마에서 발신하는 목소리들을 멀리했던 탓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찾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서 전시기 군사도시로서 히로시마의 역사와 원폭 투하에 이르는 과정의 전시를 후경으로 배치하고, 기념관 입구에서부터 피폭의 압도적인 피해를 감성적으로 배치한 리뉴얼 전시를 보면서 느꼈던 ‘위화감’과도 맞닿아 있다. 평화로운 일상을 한순간에 빼앗아버리는 원폭 투하의 압도적인 하이비전 CG영상과 피폭이 야기한 인간적 비참함으로 가득한 전시물들 앞에서 그 피해에 공감하기보다는, 지난 시기 자국이 주도한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인식하고 반성하는 역사관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먼저 들었던 것은 ‘입장 지어진 주체’(positioned subject)로서 나 자신의 인식의 한계인 것일까.


피단협의 수상 소식을 들은 후, 그 전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흥분 속에 서가에서 꺼내둔 그의 작품들을 일단 책상 가장자리로 물리고,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히로시마 노트』(이애숙 옮김, 삼천리 2012)를 펼쳤다. 『히로시마 노트』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오에가 1963년에서 1965년에 걸쳐 히로시마를 방문하며 보았던 풍경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뽀이다. 나를 계속 사로잡는 위화감의 정체, 나아가 히로시마로부터의 메시지, 그리고 피단협의 활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기. 이것이 이 책을 다시 펼친 이유였다.


『히로시마 노트』의 첫 장은 1963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9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풍경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제1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열린 해는 1955년이었다. 피폭으로부터 10년, 여전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히로시마 사람들이 이 대회에서 느꼈던 소망을 오오에는 피폭 당시 어린아이였던, 그리고 지금은 20대로 성장한 한 여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려낸다. 피폭 당시 입은 화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켈로이드 때문에 집에서 계속 숨어 지내야 했던, 그리고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지향과 뒤이어 닥치는 절망의 시간으로 가장 끔찍한 신경증의 나락으로 내몰린 히로시마 아가씨들. 그런 아가씨들 중 한명이었던 그녀가 광기나 절망 끝에 이르는 자살이나 신경증적 은둔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던 계기가 1955년 히로시마에서 열렸던 제1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집회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득 모인 집회현장에서 그녀는 “고통받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이후 적극적으로 피폭자 평화운동에 참가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다른 사람이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렇듯 제1회 원수폭금지대회는 피폭자들에게 인간적인 자기회복의 계기를 마련해줌과 동시에 일본과 전세계의 평화운동가들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준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피단협이 결성된 것은 제1회 대회가 끝난 다음 해인 1956년이다.


물론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해를 거듭하면서 점차 분열의 양상을 띠며 그 성격도 변해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오오에는 자신이 직접 찾아갔던 1963년 제9회 원수폭금지대회에서 드러난 운동 주체들 사이의 혼란과 분열, 그리고 피로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소련의 핵실험에 대한 일본공산당의 지지 때문에, 일본공산당이 주도하던 원수협(원수폭금지협의회)이 1965년에는 원수협과 원수금으로 분열되는 정치적 격류 속에서 피단협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도 히로시마에는 두개의 피단협이 존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이유로 인한 분열이 아니라,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피폭자들이 자신의 체험을 전세계에 발신함으로써 반전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왔다는 사실이다. 피폭 이후 비참한 죽음에 ‘대하여’ 또는 비참한 죽음에 ‘저항해서’ 새로운 생명에 이르는 것이 아닌, 비참한 죽음을 ‘향한’ 싸움,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서 오오에가 발견한 것은 히로시마적 휴머니즘, 나아가 인간의 ‘위엄’이었다. 핵무기의 위험이 아니라 핵무기가 초래한 비참함을 상기하면서, 그리고 전인류를 대신해 자신들이 몸으로 겪은 원폭의 비참함을 오히려 활용하고, 스스로가 느끼는 수치심과 굴욕 그 자체에 무기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피폭자들의 활동에서 핵무기 전면 폐지운동을 향한 가장 본질적인 사상적 근간을 찾아내기. 피단협의 지난 70년의 역사에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위엄’이 오롯이 깃들어 있다. 


과연 그 위엄이 현실정치에서 어떠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피단협은 얼마 전 선출된 이시바 총리에게 핵무기금지조약(TPNW)을 비준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시바 총리는 “핵금지가 됐을 때 여기저기서 분쟁이 빈발하지 않을까 하는 점도 생각해야” 하고, “핵무기뿐만 아니라 전쟁 없는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는 어려운 문제”라며 신중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사실 이시바가 언급한 아시아판 나토 구상에는 일본 내 미국의 전술핵 반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어, 전후 일본이 원칙으로 삼아온 ‘비핵 3원칙’(그 결과가 이 원칙을 제창한 전총리 사또오 에이사꾸의 노벨평화상 수상이었건만), 즉 “핵을 보유하거나 만들거나 일본에 반입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에서 보더라도 후퇴한 셈이다. 


전후 8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피단협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피폭체험자들도 거의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의 피폭체험을 어떻게 계승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1965년 이들 히로시마의 ‘정통적인 인간’, 즉 히로시마의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지나치게 절망하지도 희망을 품지도 않는 현실적인 인간들 속에서 오오에가 찾아낸 “일본의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적극적 상징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피해자주의 내셔널리즘’으로 포섭되어가는 상황에서 피폭체험을 어떻게 인류 보편의 자산으로 공유할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이 들 때마다 나는 얼마 전 작고하신 이와마쯔 시게또시 선생이 예전 『반핵과 전쟁책임(反核と戦爭責任)』(三一書房 1982)에 남긴 한문장을 상기해본다. 나가사끼의 피폭자이자 전후 평생에 걸쳐 원수폭 금지운동에 참여해온 운동가이자 학자로서 그는 피해자로서의 입장을 철저히 추구해나갈 때 열리는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체험의 사상화’라는 길을 모색함에 있어 여전히 귀 기울여야 할 목소리이다.


피해자로서의 입장을 마지막까지 추구해가면 두개의 국면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하나는 타국의 피해자와의 공통성이라는 인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엾은 피해자를 만들어낸 가해자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전자는 전쟁피해자로서의 공통 인식에 의한 국제연대의 자각이며, 후자는 피해자 인식의 극한에서 가해자 인식으로의 의식의 전환이다.


이영진 /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2024.11.5. ⓒ창비주간논평

커버이미지: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일본 히로시마 시가지. 한국원폭피해자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