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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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문학이 지닌 전환의 힘



정지창

문학은 전환의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얼핏 보기에 문학은 고달픈 삶에 위안을 제공하는 취미나 여가활동의 하나로 여겨질 뿐, 우리의 삶의 방식이나 생각의 틀을 바꿀 만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여겨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문학은 예컨대 종교나 교육처럼 인생의 행로를 바꿀 만큼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진 존재도 아니고,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도 아니니까요.


저는 문학이 지닌 전환의 힘은 당장 사람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삶의 흐름에 제동을 걸어 멈추어 세우고,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비유하자면, 무한공간으로 질주하는 설국열차 속의 승객들에게 이러다가는 공멸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면서 일단 열차를 멈춰 세운 다음, 열차의 최종 목적지와 행로를 곰곰이 따져보는 일. 그것이 바로 문학의 소임이고, 문학이 지닌 전환의 힘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빠른 열차도 언젠가는 멈출 때가 있지만, 열차의 엄청난 속도에 도취하여 그것을 멈춰 세울 적절한 제동장치에는 무관심한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끌려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신자유주의는 달리는 열차 안에서 끊임없이 희망을 강요하고 도전하라고 독려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생존 근거이고 존재 이유라고 가르치면서 인간을 무한경쟁으로 몰아넣지요. 신자유주의 시대의 교육과 문화는 대체로 이런 무한경쟁과 그로 인한 차별을 내면화시키는 제도적 장치로 작동합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맹목적인 질주의 결과가 바로 윤석열이라는 괴물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정지의 힘」이라는 백무산 시인의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정지의 힘」 부분,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 2020) 수록작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는 역설. ‘정지의 힘’은 말하자면 달리는 열차 속에서 열차를 멈추거나 탈출함으로써 생기는 힘을 말합니다. 저는 문학이 이런 정지의 힘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바로 인간을 바꾸는 전환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2024년 막바지에 벌어진 윤석열의 내란 사태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우연적인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는 긴밀하게 연관된 어떤 본질의 양면인지도 모릅니다. 좀 거칠게 도식화한다면, 신자유주의의 맹목적인 폭주의 힘과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려는 정지의 힘이 동시에 드러난 것이 윤석열의 내란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부장적인 폭력과 여성적인 사랑의 힘의 동시적인 표출이자 남성중심적인 선천시대가 여성중심적인 후천시대로 전환하는 음개벽(陰開闢)의 변곡점을 뜻합니다.


저는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가장 어두운 모순의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새로운 희망의 꼬투리를 보았습니다. 질주의 힘과 정지의 힘이 맞부딪히는 순간에 K민주주의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이 열린 것이지요. 계엄군의 총칼과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낸 시민들, 여의도와 남태령, 한남동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케이팝을 부르는 시민들, 자발적인 선결제로 연대하고 응원하는 시민들, 폭력적인 항의시위를 즐거운 축제로 전환시킨 시민들은 새롭고 독창적인 한국식 민주주의의 모습을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K민주주의의 주역은 바로 20대와 30대의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번 내란 사태를 통해 드러난 젊은 여성들의 저항과 반란은 음개벽의 징표임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계엄군의 총칼에 온몸으로 맞서면서 시민과 농민,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폭력적인 시위를 평화적인 축제로 전환했습니다. 다른 한편 그들은 결혼과 출산을 거부함으로써 일종의 파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폭력과 야만적인 무한경쟁을 내면화하여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설국열차를 멈추라는 강력한 경고인 셈이지요.


저는 트랙터를 몰고 온 농민들이 남태령에서 경찰에 막혀 있을 때 응원 차 달려온 젊은 여성들과 함께 밤을 샌 농민 강광석씨(강진군 농민회 사무국장)의 글을 읽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남태령에서 (…) 나는 불량한 자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이고 싶은 이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저들의 형식의 가벼움과 내용의 무거움을 이해하려 애썼다. 나는 저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싶어졌다.”


여성들이 이끄는 새로운 문화의 특징을 “형식의 가벼움과 내용의 무거움”이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얼핏 떠오르는 것은 “삶은 진지하고, 예술은 가볍다.(Ernst ist das Leben, heiter ist die Kunst)라는, 쉴러의 말입니다. 삶은 진지하고 무겁고 고달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은 일종의 미학적 가상현실이므로 가볍고 명랑하고 참을 만하고 즐길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가령 1980년의 5월을 겪은 광주 시민들은 당시의 고통과 분노, 고립감을 꿈에서라도 다시 겪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다시 경험하는 것은 견딜 만하고, 심지어는 그러는 과정에서 일종의 미적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젊은 여성들에게서 엄중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가볍고 명랑한 유희와 축제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미학적 전환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에서 의장석을 둘러싸고 외치는 구호들, 가령 ‘원천무효’를 ‘온천무료’로, ‘의장 사퇴’를 ‘의장 착해’로, ‘직권남용’을 ‘식권라면’으로 바꾸었습니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강변하며 윽박지르던 윤석열의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조롱하며 되받아친 것이지요.


이런 가볍고 명랑한 문화와 예술은 K민주주의의 새 세상을 열어가는 화해와 평화, 상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는 바로 한강 작가가 말하는 문학의 존립 방식과 존립 근거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폭력과 아름다움은 모순되는 것이지만 이 모순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기에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투쟁이 글쓰기를 해온 동력이고, 이러한 모순의 더 깊은 곳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언어라는 “금실”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 공감의 연대를 형성한다고 말합니다.


문학과 예술이 험난한 현실을 구원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며 잠을 못 이루면서도, 저는 문학이 우리의 삶에서 없어도 되는 잉여가 아니라 꼭 필요한 존재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작가의 믿음에 제 손을 포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농민 강광석씨의 믿음에 편승하여, 저도 폐허에서 새로 출발할 수 있는 ‘정지의 힘’으로 부지런히 읽고 쓰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정지창 / 전 영남대 독문과 교수

2025.1.21.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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