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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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디지털 민주주의가 우리의 멋진 미래가 되려면



권오현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스펙트럼 안에서


오늘날 디지털 혁신은 플랫폼을 통한 연결, 광범위한 데이터의 축적, AI를 통한 자동화를 기반으로 한다. 이런 기술들이 낳은 과잉 생산과 과잉 서비스, 과잉 개인정보 수집·분석이 마냥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디지털 시대에 왜 민주주의는 그대로인가’라는 질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답하기는 궁색해졌다.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연결과 축적을 만들어내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모든 시민이 목소리를 내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며, 때로는 직접 해결책을 찾아내고 실행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은 ‘디지털 민주주의’에 주목한다. 발안·숙의·결정 과정에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고 관련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대리자에게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던 정치와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에 더 많은 시민들이 직접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시빅해커’(civic hacker)들은 해커들이 시스템을 해킹하듯이 공공데이터와 공공서비스를 필요에 맞게 고쳐 쓰거나 정부가 만들지 않는 시스템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스스로를 이같은 시빅해커로 부르는 시민들이 활동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시민들의 노력과 제도정치 및 정치인들의 노력이 만나 오늘날 디지털 민주주의는 다양하게 시도되고 발전하고 있다. 정책 제안과 청원, 예산 편성과정에서의 시민 참여가 생겨나고, 시민이 공론과 숙의로 정책 결정과정에 함께하는 민관협력이 늘어나며, 단순한 제안을 넘어 시민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거나 의제별·마을별로 활동을 펼치는 등 분권과 자치도 확대되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에 청원을 올려 공론장이 펼쳐지고 일정 인원 이상의 시민들이 동의하면 기관의 답변을 들을 수 있거나 의제가 채택되는 시스템은 불과 지난 10~20년 사이에 도입된 것이다. 필자를 비롯한 시빅해커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정부에 마스크 재고 데이터를 공개하도록 요구하고 이를 통해 공적 마스크 재고 확인 앱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처럼 사회문제를 민과 관이 함께 해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디지털 공론장을 시민의 디지털 공공재로


현재 기술로도 국민의 정치적·정책적 선호도나 지지 여부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시스템은 가능하다. 조례 및 법률, 헌법 개정안을 누구나 발의하고 공론장을 열어 충분한 동의를 얻으면 투표에 부칠 수도 있다. 나아가 환경정책은 A정당과 정치인을, 경제정책은 B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는 식으로 세분화된 지지도 가능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모든 정책 제안을 데이터베이스화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이미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추첨제 시민의회도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면 더 많은 시민이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논의에 참여할 수 있으며, 실시간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시민의 참여와 위임에 따른 보상체계를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이런 모든 가능한 일들을 단순 도입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저절로 개선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건강한 ‘시민공간’(civic space)이 존재할 때 가능하지만, 현재 한국의 디지털 공간은 극단적인 주장만 부각되는 구조다. 미디어학자 이창현은 ‘사회대개혁 국회연속세미나’(2025.2.27)에서 이를 ‘여론의 역(逆)정규분포’로 설명하며, 극단적 의견이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인식되고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왜곡현상을 지적했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미얀마의 인종청소 선동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엑스(구 트위터)의 알고리즘을 조정해 자신의 게시물이 천배 더 노출되도록 만들었다. 한국은 대통령이 유튜브 알고리즘의 늪에 빠져 계엄을 선포하는 데 이르렀다. 더 많은 조회수를 확보해 높은 수익을 올리려는 플랫폼과 특정 개인이 사유화한 플랫폼이 우리의 사유와 공론장을 장악한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 트래픽의 절반이 프로그램화된 봇(bot)에 의해 생성되는 시대가 되면서, 디지털 공간에서 접하는 콘텐츠와 참여의 상당수가 비인간이 만든 것이 되고 있다. 생성형 AI와 딥페이크 기술은 해외에서는 정치적 왜곡에, 국내에서는 성범죄에 악용되며 많은 사람이 온라인 공간에서 침묵하거나 떠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디지털 기술이 가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연결의 기술은 기존에 고립되었던 소수자들을 결집해 안전감과 힘을 부여했으며 더 다양한 주장과 근거가 서로 경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축적의 기술은 다양한 지식과 경험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특히 AI로 대표되는 자동화의 기술은 인류가 그 어느 시절에도 도달하지 못한 진정한 해방의 시대를 만들 가능성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을 드러내 대화의 공간을 열어야 한다. 아직 주목받지 못한 소수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 시민들에게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혐오와 차별, 허위 조작정보에 강력하게 대응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는 공론장을 만드는 일을 더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이는 그러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제도 및 기술 개발에 나서야만 실현할 수 있는 일이다.


필자가 일하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서는 시민들이 대화하고 행동하는 디지털 광장을 만들고 있다. 디지털 시민광장에서 다양한 의견을 가진 이들이 용기 내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 동시에 혐오와 차별에 대해선 강력하게 대응한다. 의도적으로 공론장에 다양성·공정성·포용성(DEI,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을 더 강화하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시민들이 직접 허위정보를 판별하고 팩트체크 콘텐츠를 만들기도 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소와 함께 2년째 주관 중인 ‘한국의 대화’ 온·오프라인 프로그램도 공론장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을 좌우가 아니라 다양한 축과 그룹으로 분류하고, 그 안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모아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게 하여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취지에서 기획된 자리다. 시빅해킹 커뮤니티 ‘코드포코리아’(Code for Korea)의 설립으로 이어진 공적 마스크 앱 개발 사례처럼 시민들이 데이터를 활용해 다양한 사회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도 한다. 혐오와 갈등, 무관심과 각자도생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에도 존중과 포용, 협력과 신뢰를 믿는 시민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시민들을 모으고 연결하고, 대화하고 행동하는 디지털 광장을 만드는 게 디지털 민주주의의 목표다.


연결하고 협력하는 시민의 힘


경제와 글로벌 위기, 기후위기와 인구감소, 무엇보다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행복하지 않은 사회.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더욱 심각해져가는데, 극단적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정치세력과 미디어 시스템이 실제 현실까지도 왜곡하며 우리 사회의 신뢰 기반과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시대를 지켜보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헌법과 법률을 지키지 않는 정부, 정당, 정치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응원봉을 들며 광장에 나가고, 법률과 헌법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린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신뢰하기 때문일까? 아마 법률과 헌법 시스템이 우리 공동체의 최후 보루라는 절박함이 더 클 것이다. 경제가 어려우면 금붙이를 들고 나오고, 정치가 어려우면 촛불과 응원봉을 들고 나오는 ‘나라를 걱정하는 시민들’. 이런 평범한 시민들의 권한을 국가적 중대사를 비롯해 일상의 여러 사안들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썩 만족스럽진 않아도 현재 헌법이 그어놓은 테두리를 지키면서 시민들은 묻는다. 왜 당신들은 이 테두리를 지키지 않냐고, 왜 주권자인 국민에게 권한이 없냐고.


권오현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이사장

2025.3.18.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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