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산불 이후의 세계: 신하림 『산불은 마을을 어떻게 바꿨나』
『산불은 마을을 어떻게 바꿨나』는 경제학 박사이자 강원일보 기자인 신하림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4년여간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삼척에 이르기까지 영동지역 일대를 취재하며 각지의 산불 피해를 기록한 재난참사 보고서이자 백서다. 산불이 발생할 때마다 언론은 연일 그 피해규모를 대서특필하지만 그 관심은 길어야 한달까지만 이어진다. 그뒤로 피해지역의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을 영위하는지를 다루는 언론은 극히 드문 상황에서, 지역 언론인의 이같은 끈질긴 탐사보도는 진정 귀하고 값지다. 이로써 근 10여년간의 영동지역 산불 피해자들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처지를 공론화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모르겠다.
이 책에서 줄곧 지적하는 것처럼, 이재민들의 피해는 생각보다 막대했고 보상은 그 피해규모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다. 내가 사는 강원도 고성에서는 2019년 4월 산불 한건으로만 이재민 수 1,100여명, 피해액 1,300억원이 발생했고 그외의 영동지역 산불(2019~23년 발생) 중에서 정부의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곳의 피해만을 따져보면 이재민 수 1,250여명, 피해액 2,950억원에 달한다(7~16면).
산불 피해자들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들에 대한 정부지원이나 시민들의 후원이 넉넉해서 재난 이전의 삶을 온전히 회복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산불이 난 지 벌써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본래 거처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임시 가건물(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그들이 왜 컨테이너에서 지내느냐고 묻는다면, 주택이 모두 불에 탄 경우 지급된 주거비가 총 3,300만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싶다(50면). 이 액수를 듣고 집을 새로 짓거나 다른 집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2019년 고성 산불을 직접 목격하고 그 후속조처들을 쭉 지켜봐온 나로서는 당시 재난지원금을 둘러싸고 행정안전부가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에 구상권 소송을 제기한 이유가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다. 구상권이란 사회적 재난이 발생하고 그 재난의 원인 제공자가 있을 경우 정부가 재난 처리를 위해 부담한 비용을 해당 원인 제공자에게 청구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서, 이 책의 필자 신하림은 이 구상권 소송을 끈질기게 보도해왔다(근 5년간 지역민들을 위해 관련 내용을 소상히 정리해준 이는 그가 거의 유일하다).
이 책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의 구상권 소송이 처음 제기된 것이 바로 2019년 고성 산불 때부터다. 당시 감사원이 정부가 3자 협의체(행안부, 지자체, 한전)를 구성해 해당 사안을 해결할 것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전을 향한 장기 소송전을 벌임으로써 사건 발생 이후 무려 5년이 지난 작년까지도 주민 배상이 지체되는 해괴한 일을 자초했다(작년 7월 대법원이 한전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전에 한전은 이 재판 결과와는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기준을 마련해 주민 배상을 마쳤다). 이 혼란 속에서 자구책을 마련하며 동분서주한 것은 오로지 이재민들뿐이다.
알음알음 크고 작은 대책위에서 혹은 개인별로 대책을 세워가던 이재민들은 이제는 거의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다. 더욱 큰 문제는 물적 피해를 넘어선 집단 내부의 심리적 상흔들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관련 사례들 중에 500년 역사를 지닌 속초의 한 마을이 산불 이후 사분오열되어 공동체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36~43면)와 고성의 이재민 비상대책위가 둘로 쪼개져 지금까지 서로를 비방해오고 있다는 이야기(124~38면)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산불 나기 이전에 있던 옛날 집들은 담도 없고 대문도 열어놓고 마당도 수시로 드나들며 왕래했는데 이런 문화가 사라졌어요.”(43면) “다른 이재민 단체를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철천지원수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127면)
대형 재난참사가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사실은, 이 책이 소개하는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건물을 임대해 펜션을 운영하다가 펜션 건물이 전소되며 전재산을 잃은 강릉의 이기동씨 사례는 참으로 안타깝다. 산불 발발 직후에 마을 노인들을 직접 대피시키고 본인 또한 피해자로 묵고 있던 임시대피소에서 빨래봉사까지 자처했던 그는 건물주가 아니라 세입자라는 이유로 900만 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액수의 보상금을 받았다(161~67면). 그가 자신의 막막한 처지를 호소하는 앞에서 ‘지원금을 더 많이 받으려고 저런다’는 말을 던진 이는 과연 이 실상을 잘 알고 말한 것일까.
재난 피해자들의 계층 분포는 또다른 문제다. 산불 이재민 중 고령층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은 곧 생산활동을 멈춘 세대의 경제적 불평등과 연관된다. 본래에도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던 경제적 지위는 재난 피해로 인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화되었다. 강원도의 조사에 따르면 이재민 중 60대 이상이 49%에 달한다. 그밖에 50대가 23%, 40대가 19%이니 중장년층 이재민만 91%에 달하는 셈이다(188면). 한마디로 “재난은 이 약점을 공격했고 약자에게 더 가혹”(107면)했다. 사회의 관심이 줄어들고 경제적인 여건마저 더욱 열악해진 상황에서 그들은 살아갈 의미를 어디서 찾고 있을까.
고성 성천리의 탁명순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마을회관이 불에 타지 않아서 집이 없어진 주민들끼리 모여 두 달 정도 같이 지냈어요.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그나마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됐어요”(190면). 삼척 원덕읍 사곡리는 2022년 경북 울진 산불로 인해 마을 뒷산 송이밭이 모두 타버렸다. 이에 마을 이장 김동화씨가 마을 회의를 소집했다. 정부의 대체작물 조성사업에 신청하되 지원금을 각 개인이 받지 말고 마을 차원의 영농조합법인을 세워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해 정부 지원 3억여원을 법인 명의로 수령해서 대체 작물을 상품화하고 있다(116면).
겨울철 적설량이 줄고 건조 일수가 늘어나면서 영동지역의 산불은 일상이 된 듯하다. 기후변화라는 점진적 위기는 인간의 경각심을 쉽게 누그러뜨리고 우리는 어느새 이 산불을 망각해버렸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인간 삶의 복구 중에서도 지역공동체의 관계 회복을 강조한 대목(178~82면)은 주목할 만하다. 필자는 2022년 3월 강릉과 동해에서 축구장 5,800개 면적을 태운 산불이 마을 토박이의 수십년간에 걸친 오해와 반목, 무시 때문이었다고 적으며 “단절된 관계, 누적된 사회 갈등, 불신이 대형 산불의 불씨”가 된다고 지적한다. 필자의 말처럼 “산불은 관계를 망가뜨리지만 반대로 망가진 관계가 산불을 일으키기도”(182면) 하는 것이다.
피해복구가 여전히 요원한 상황에서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는 게 조금은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다만 우리가 만약 산불이라는 거대한 기후변화의 결과물 앞에서 무력감만을 느낀다면, 그 무력감을 극복하는 데에 내 이웃과 곁을 살피는 일이 꽤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재난 피해 보고서이자 백서인 이 책의 행간에서는 인간 공동체의 복구뿐 아니라 자연 전체의 회복을 권한다. 송두리째 탄 자신의 집 앞에서 소나무의 안녕을 바라던 어느 노인의 말처럼 말이다. “낭구(나무)가 없어서 허전해요. 예전에는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낭구가 막아줬는데…”(201면).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박대우 / 출판편집자, 온다프레스 대표
2025.3.25.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