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우리 모두’는 누구인가, 국가/민족/나라 안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하기: 조앤 W. 스콧 『Parité!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의 표지에는 ‘빠리떼’(Parité)라는 커다란 캘리그래피가 그려져 있다. 패러티(parity), 균등(均等) 정도로 번역되는 이 단어가 책의 원제목이다. 이 글에서는 책에서 사용된 ‘남녀동수’라는 말 대신 빠리떼라는 원어 발음 표기를 사용하고자 한다. 단순히 선출직 공직에 남녀가 50/50의 같은 수로 들어가야 한다는 형식적 주장을 넘어서는, 근대국가의 시민민주주의와 대의정치의 기본 틀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한 것이 빠리떼 운동의 진정한 의미라고 보기 때문이다.
빠리떼는 2001년 프랑스에서 법제화되자마자 국내에 소개되었지만, 그 형식적 내용만 소개되고 운동의 철학적 토대나 맥락은 논의되지 못했다. 한국에 가장 먼저 번역된 빠리떼 관련 서적이 실비안느 아가젱스끼(Sylviane Agacinski)의 『성의 정치: 남녀동수의회 구성의 논리』(일신사 2004)였다는 점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1999년 헌법개정 직전 발간된 이 책에서 아가젠스키는, 당시 펼쳐진 ‘시민연대계약(PaCs)’ 입법운동 상황에서 만들어진바 성적 차이와 ‘커플(couple)’의 논리를 빠리떼의 이론적 기반으로 제시했다. 성적 차이를 정치적 주체로서의 개인과 정치체(body politic)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아닌, 각 개인들이 영위하는 친밀한 성적 관계와 재생산(임신·출산 및 부모되기)에 결부된 문제로 보면서 이것이 사회의 ‘토대’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이같은 아가젠스키의 논리는 빠리떼 운동의 철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빠리떼 입법을 앞당겼다.
조앤 W. 스콧이 보기에 빠리떼는 그 자체로서 프랑스 정치철학과 프랑스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이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여성들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기를 거부한 공화정치의 논리는, 여성들이 국가의 정치체를 대표할 수 있는 ‘추상적 개인’이 될 자질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민은 본인이 가진 재산·가족·일·종교·인종 등등의 모든 구체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추상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정치의 주권자가 될 수 있으며, 선출직 공직자는 국가(the nation)를 대표하는 것이지 자신의 개별적·구체적 존재나 집합적 소속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화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이었다. 혁명가들은 여성들이 성적 차이의 체현(embodiment)이기 때문에 추상적 개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적 차이는 추상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여성들을 시민권으로부터 배제했으나, 남성들은 성적 차이를 문제없이 초월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다. 즉, 이때의 ‘성차’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 그 자체가 아니었다. 성차는 그저 여성을 특수화하고 마침내 정치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강조된, 특정한 여성성의 표식일 뿐이었다.
프랑스 여성들은 1944년에 투표권을 갖게 되었지만, 선출 공직에서 여성의 비율은 매우 적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0년대 초 할당제 도입을 위한 입법이 시도되었으나 헌법심의위원회에 의해 위헌 판결이 났다. 이 법이 섹스를 기반으로 시민을 차별함으로써 ‘단일하고 분할할 수 없는’ 국가의 통합성을 저해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빠리떼는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이하던 1988~89년, ‘대의제의 위기’가 선언되며 다시 한번 추상적 개인과 대표성의 불가분성(不可分性) 원칙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였다. 교육적·계급적 배경이 동질적인 ‘정치계급’이 국가/민족을 대표하도록 위임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지적이 힘을 얻으면서, 성별이 동질적인 (남성) 정치계급이 국가/민족을 잘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제기될 수 있었다.
빠리떼 주창자들은 여성성이나 여성들의 구체적 경험에 대한 논의를 벗어나, 국가/민족/나라를 구성하는 추상적 개인이 성별을 갖고 있다는 점을 사실로 선언하는 데서 출발했다. 유성생식하는 포유동물로서 인간에는 남성과 여성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숫자는 대략 50:50이고 이는 국가/민족/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선출 공직자의 남녀동수는 국가/민족/나라를 제대로 대표할 수 있기 위한 길이다. “빠리떼주의자들은 남성들과 여성들의 평등을 주장함으로써, 그 어떤 추상적 개인도 모두 섹스화되어 있음(sexed)을 인정함으로써, 국가/민족/나라의 정치체를 구성하는 추상적 개인들이라는 덩어리를 탈섹스화하기를(unsex) 바랐다”(111면, 원저 53면, 국역 서평자).
프랑스 공화국의 정치적 몸을 특정한 성별이 아니라 남녀 모두의 것으로 상상하기 위해서, 그 속에 성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단순히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이 ‘성적 차이’는 남성을 기준으로 하여 폄하 혹은 찬양되는 여성의 특성이 아니며, 남성성이나 여성성 같은 이원적 기준으로 각각을 해명하여 그 차이를 준별해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차이도 아니다. 이는 위 문장에 이어서 스콧이 인용한, 초기 빠리떼 이론가 프랑쑤아즈 가스빠르(Françoise Gaspard)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빠리떼를 위한 우리의 투쟁은 다른 관점에 서 있습니다. 찬양된 차이에 기반하지도 부인된 차이에 기반하지도 않은, 초과된 차이에 기반한 양성의 평등이라는 관점 말입니다. 그 차이는, 그것이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더 잘 없애기 위해서, 인식됩니다”(같은 면).
프랑스의 빠리떼 입법은 여러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스콧은 그 한계를 여성 선출 공직자 수 증가의 답보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아가젠스키로 인해 추상성이 포기되고 이성애 커플이 대의제의 보편적 단위로서 추상적 개인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여성들은 개인이 아닌 여성으로서 선출 공직 진출을 인정받게 되었다”라고 평가하였다(274면). 민주정치의 기반인 정치공동체로서 국가/민족/나라 안에 존재하는 성차의 인정, 그리고 여성성의 잣대를 벗어난 개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여성주체에 대한 상상력이 제한돼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로, 남태령과 한강진을 거치며 새로운 광장민주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성별, 페미니스트 여부, 성정체성, 노동조합원, 농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등을 드러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주체들이 ‘우리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를 염원하였다. 헌재의 결정이 늦어지면서 조급한 마음에서인지, 이런저런 목소리를 소수자 집단만을 위한 ‘정체성의 정치’로 치부하고 단일주제, 단일대오를 강조하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하여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우리 모두’는 누구로 상상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정치공동체를 민주적으로 꾸려갈 것인가. 그 속에 차이가 존재함을 제대로 인정하는 것이 이 모든 성찰의 출발점이 아닐까. 스콧의 책이 2025년의 한국에서 현재성을 갖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배은경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25.3.25.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