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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사태와 시민적 교양의 의미: 매슈 아널드 『교양과 무질서』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 1822~88)의 『교양과 무질서』(Culture and Anarchy, 1869)는 빅토리아 시대로 불리는 영국 19세기 후반의 사회적 갈등과 혼란의 와중에서 출간된 정치평론서다. 도시노동자들의 선거권을 인정한 제2차 선거법 개정(1867)을 전후하여 1년 넘게 벌어진 정치논쟁에서 아널드가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해 교양이 다른 어떤 정치적 의제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최상의 것을 기준으로” 완성을 추구함이라는 교양에 대한 고전적 정의가 수립된 것도 바로 이 책에서다. 내란사태가 아직 종식되지 않은 이 봄밤에 150여년 전의 고전을 다시 펼치는 마음은 각별하다. 그가 말하는 교양이야말로 나라의 운명에 치명상을 줄 수도 있었던 이번 사태를 막아낸 힘의 원천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한밤의 계엄령 선포와 국회에서의 해제의결 그리고 이어진 대통령 탄핵소추와 체포라는 긴박한 내란진압의 과정은 고비 고비마다 모습을 드러낸 시민적 교양의 발현이 없었다면 지금의 국면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계엄령 소식을 접하자 국회 앞으로 뛰쳐나온 시민들을 시작으로 무도한 작전 명령에 소극적으로 임하여 사태의 악화를 막은 군인들, 그리고 대통령 체포영장의 집행을 막으라는 부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경호처의 일반 직원들은 저마다 상식에 기초한 그들 나름의 교양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번 계엄령의 시대착오적인 성격은 그 주동자들이 우리 사회 일반에 형성된 시민적 교양이라는 방벽을 고려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오늘의 군인은 더이상 저 1980년대의 군인이 아닌 것이다.


『교양과 무질서』는 논쟁적인 책으로 당대의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국면에서 교양이냐 무질서냐의 양자택일의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배경으로 하는 1860년대 영국의 정치환경은 21세기 한국의 상황과는 물론 다르다. 이 격동과 전환의 시기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와 극렬한 투쟁이 시민들에게 우려와 공포를 야기하기도 했다. 1866년 하이드파크 소요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개혁연대가 당국에서 불허한 야외집회를 강행하다 폭력 및 유혈사태를 빚은 것이다. 아널드가 말하는 무질서도 직접적으로는 바로 이 사태를 지칭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권리 투쟁과 선거권 획득 운동은 영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필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무질서로 규정하고 교양의 결핍을 거론하는 아널드가 이 논쟁에서 당대 진보 논객들과 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보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비판이 이어졌고, 사실 아널드 자신도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의 발언을 남겼다.


우리에게는 사회의 골격, 이 장엄한 드라마가 펼쳐져야 하는 무대는 신성하며, 누가 그것을 운영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그들의 운영권을 박탈하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그들이 운영을 맡고 있는 한 우리는 변함없고 일사불란한 마음으로 그들이 무질서와 혼란을 억누르는 것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질서가 없이는 사회가 있을 수 없고 사회가 없으면 인간의 완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69년 이 책 발간 100주년 기념 강연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비판하다시피 이 단언이 변화에 따르기 마련인 혼란을 ‘무질서’로 몰아붙이는 체제옹호자들의 반응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 짚어야 할 것은 당대의 현실에서 아널드의 입지가 보수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제기하는 교양이냐 무질서냐의 물음은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수립을 위한 좀더 장기적인 기획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민중의 통치라는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어떤 모순에 대한 인식이 내재해 있다. 권력의 분배를 좀더 공평하게 하는 정치적 조정의 차원을 넘어서 다수에 의한 진정한 통치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원 습격이라는 전대미문의 폭동까지 야기한 무질서의 충동이 난무하는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 진정한 민주사회를 구축해나가야 할 과제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국민이 권력의 주체라는 명제는 우리 헌법에도 규정된 민주공화국의 기본원리이지만, 과연 그 국민은 누구인가? 계엄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내란 종식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국민이라면 내란범을 옹호하는 무리 또한 자신들이 자행한 폭동을 국민의 권리라고 내세운다. 그렇다면 서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광화문 네거리를 사이에 두고 모인 이 두 군중을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다수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지만, 아무리 세를 과시하더라도 숫자의 우위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편협한 믿음이 아니라 상식에 근거한 올바름에 대한 인식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태도, 그리고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웃과 함께하려는 마음 즉, 시민정신의 유무가 이 두 집단을 구별하는 기준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아널드가 교양의 이념을 내세워 역설하던 바다.


아널드의 말썽 많은 앞의 구절도 이처럼 교양의 이념이 ‘사회의 골격’으로서의 국가와 결합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다시 읽어야 할 필요도 있다. 아널드에게 교양은 내면적인 완성의 추구이면서 동시에 민주사회의 토대라 할 시민적 주체의 소양과 맺어져 있다는 점에서 공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신의 계급이나 집단의 파당성이나 이해관계를 넘어서 공동체의 이익에 참여하고자 하는 시민으로서의 의식과 상통한다. 그런 까닭에 민주국가의 존립근거에 대한 위해가 닥치는 경우 국가의 공권력 행사는 정당성을 얻는다. 어디까지를 그 기준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남지만, 일부 국민의 집단적 주장이나 무질서한 행위가 국가의 권위로, 그리고 더 깊이에서는 교양의 이념으로, 억제되어 마땅하다는 것은 이번 내란사태 동조자들의 행태를 보아도 명백하다.


아널드의 국가론은 현존하는 국가라기보다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담은 이념적인 국가를 전제한다. 그렇지만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내부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길은 이같은 민주국가의 이상에 따라 시민주체들을 거기에 걸맞은 국민으로 형성하는 방법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아널드가 교양의 사회적 효용으로 내세우는 바이며, 앞의 구절에서 ‘사회가 없으면 인간의 완성도 없다’고 말한 소이다. 아널드는 커다란 변화가 필수이되 ‘법에 합당한 진행에 따른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 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한다. 그의 판단은 진정한 민주체제의 확립이 국가적 과제로 대두한 지금 이곳의 상황에서도 적실한 것이다.


법에 따른 변혁은 시민들 사이에 교양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을 때에만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번 내란사태에서 불거진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행태는 우리 사회에 잠복해 있는 반교양적인 무질서 충동의 일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또 이를 통해 증폭된 국민들 사이의 분열양상은 내란사태가 종식되고 나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과연 『교양과 무질서』에서 아널드가 지향하는 교양의 일반화가 이루어질 그날은 올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반교양적인 환경을 만들어내는 원인으로서의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구조화된 불평등이야말로 극단적인 무리를 키워내는 온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널드가 다른 무엇보다 불평등이 영국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병폐임을 강조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윤지관 / 문학평론가

2025.3.25.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