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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사회에서 공산주의를 다시 말할 수 있을까: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025년 4월 17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항일혁명 조선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오랫동안 ‘죽은 역사’로 묻혀 있던 조선공산당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적 복권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기념식장 주변에는 극우 유튜버와 시위대가 모여들어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 기념식이 항일을 고리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북한의 ‘주체 역사관’과 똑같다며 거리낌 없는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 장면은 조선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는 한국사회에서 공산주의가 어떻게 소환되고 호명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분단과 냉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정치적 오용이 반복되었고,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는 역사적 맥락이나 이념적 복잡성이 제거된 채 단순히 ‘반국가적’, ‘비도덕적’ 사상의 상징으로 소비되었다. 그 결과 공산주의는 그 사상적 유산으로 성찰되기보다는 여전히 혐오의 레토릭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공산주의가 적대와 낙인의 언어로 기능하게 된 오늘의 현실은, 오히려 공산주의의 실제 역사를 복원하고 성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로버트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와 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바로 그러한 역사적 궤적을 방대한 자료와 이론적 틀을 통해 정리한 최초이자 가장 포괄적인 연구 중 하나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발생, 분열, 실패 그리고 북한체제의 형성까지를 촘촘하게 추적한 이 책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의 탄생과 좌절, 이념의 변형, 분단과 냉전의 내적 기원을 재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2025년 지금, 이 책을 다시 읽는 일은 단지 과거를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다. 이 책이 우리가 이념, 분단, 역사 인식 등을 둘러싸고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한국 공산주의운동을 한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의 사상과 실천, 조직과 권력투쟁의 실체로서 접근했다는 점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반복된 분열과 탄압 속에서도 제국주의와 계급모순에 맞서 대안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가 결합하기도 하고, 엘리트 중심의 계몽과 대중 조직화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저자들은 이 복잡한 운동의 흐름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운동 내부의 이념갈등, 국제 공산주의운동과의 관계, 민족주의와의 결합, 식민지 말기 조직 붕괴 등을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역사적 운동의 내재적 동력과 구조적 제약을 동시에 그려낸다. 특히 한국 공산주의운동이 단순히 소련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식민지 현실 속에서 민족해방, 사회개혁, 지식인의 이상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복합적 정치운동이었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어떻게 조직되고, 억압받고, 변화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기록이다. 따라서 이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것은 ‘이념의 실패’를 입증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잊힌 가능성’을 복원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1972년 미국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저자들은 미국 정부의 대(對) 아시아 정책에 협력하며 연구를 진행하였고 미국의 대학 내 연구소뿐 아니라 포드재단, 록펠러재단 등의 지원을 받았다. 즉, 이 책은 냉전이라는 세계질서와 미국이라는 지식권력의 결합 속에서 탄생한 냉전 지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의 힘을 빌려 아시아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회 중 하나인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개정판 587면)이라는 문장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한 정부의 수립이 소련의 ‘후견’으로 비로소 가능했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 남한 공산주의운동의 다양성과 대중적 기반, 노동·농민 운동의 자발성을 충분히 분석하지 않고 분열과 와해, 실패 서사에 집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보다 큰 한계는 이 책이 김일성의 권력 장악 과정을 파벌투쟁에만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해방 후 북한 권력구조가 다원적 세력 간의 경쟁과 숙청의 과정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이 파벌투쟁을 단지 권력 헤게모니 투쟁으로만 파악했을 뿐 그 배경에 자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이에 조응한 북한 내부의 이념적 논쟁 및 전략적 고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예컨대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 내 개인숭배 비판, 중소분쟁 등은 북한 지도부에 체제의 정당화 방식과 외교노선을 둘러싼 실천적 고민을 요구하는 결정적인 변수였다. 민족자주의 강조, 자력갱생, 주체사상의 정식화는 모두 이러한 국제질서의 균열 속에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 같은 맥락을 놓친 채 김일성으로의 권력집중을 국내정치의 배제와 숙청의 결과로만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냉전시기 미국학계가 북한, 나아가 아시아 공산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료라는 점에서 또다른 차원의 ‘역사성’을 가진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단지 20세기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역사와 북한체제 성립사를 이해하기 위한 텍스트에 머물지 않는다. 이 책은 냉전기 미국이라는 시공간적·이념적 조건 속에서 어떤 지식이 생산되었고, 무엇이 말해지고 말해지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 책은 냉전과 반공 담론 아래 ‘공산주의’나 ‘북한’을 어떤 언어로 이해해 왔는지, 어떤 개념은 정당한 설명의 도구로 수용되었고 또 어떤 맥락은 소거되었는지를 비춰주는 반사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엄선포의 명분과 내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 ‘종북 반국가세력’이라는 언어가 동원되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공산주의’와 ‘북한’을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진 않지만 적어도 공산주의가 정치적 공격의 무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분단과 냉전을 넘어 보다 성숙한 역사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는 점을 환기한다. 더불어 강고한 이념의 틀에 갇혀 지워졌던 다양한 역사적 가능성과 해석의 층위를 복원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운다. 그렇기에 2025년 지금, 이 책의 의미는 여전히 현재적이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문미라 /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2025.7.29.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