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이별의 능력, 아니 큰 사랑- 김소월과 3·1: 김소월 『진달래꽃』
『진달래꽃』이 출간된 지 어느덧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시집이 1925년 소월의 스승이던 김억이 경영하던 매문사(賣文社)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127편의 시가 실린 234면의 두툼한 작품집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요즘의 출간 경향으로 보자면 시집 두권 분량의 두터운 시집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서지에 대한 정보 유무와 무관하게 이 시집에 실린 구절의 일부라도 모르는 한국어 사용자를 발견하기란 꽤나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뿐히 즈려밟고” 같은 구절에서 한국적 정한을 떠올리는 사람이거나 「엄마야 누나야」를 노래로 흥얼거릴 줄 아는 이, 혹은 「개여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노래로 먼저 접하고 그것이 소월의 시임을 안 뒤 화들짝 놀란 이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익히 알려진 시편들, 가령 「진달래꽃」, 「초혼」, 「금잔듸」, 「못잊어」만 생각해도 이 시집이 ‘이별’을 말하는 빈도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소월의 시를 이별의 정한으로 국한해서 읽는 일은 재고해야 한다. 시는 자주 감정을 다루지만 감정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니 소월이 이별의 정황을 그린 시들 역시도 단순히 감정의 문제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 시집에 기록된 이별이 어떤 능력을 불러오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님’은 나에게 ‘이별’을 경험하게 하면서 동시에 ‘말’을 준 사람이다. 사례를 들어보자. 먼저, 「먼 후일」. 시인은 이별의 시간 속에서 “내 말”을 특별히 구한다. 먼 훗날 당신을 잊었다고 말하지 않고, 당신과 이별한 먼 훗날 “그 때의 내 말”이라고 굳이 적으며, “잊었노라”는 그 말을 문장부호와 더불어 따로 적는다(처음 잡지 발표 당시에는 ‘ㅡ’ 뒤에 적었고 시집에는 낫표로 표기했다). 그러니까 님은 비로소 나에게 어떤 말문을 열어주는 사람에 가깝다.
「진달래꽃」은 또 어떤가. 이 시에서 님은 나에게 말의 정수인 ‘침묵’(“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을 가르쳐 준 사람이지 않나. 정리하면 님은 나에게 말을 주고, 말을 배우고, 말을 하게 만드는 존재인 셈이다(소월의 시에서 이 ‘말’은 자주 “소리”라는 표현으로 변주된다). 정신분석의 언어라면 이 구조에서 바로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아이에게 말을 주는 존재로서의 어머니라는 자리, 말과 함께 욕망과 그것의 좌절을 건네받는 그 자리 말이다. 그런데 사실 저 개념으로는 님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김소월의 님은 말만 주는 것이 아니라 ‘때’에 대한 감각과 ‘장소’에 대한 감각까지도 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구체적인 작품이 너무 많아 인용이 어려울 정도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의 ‘때’와 그 ‘영변의 약산’이라는 장소를 생각해보라).
도대체 저 님은 혹은 그와의 이별은 어떤 능력까지 불러일으키는가. 「진달래꽃」의 곳곳에는 물의 이미지가 넘친다. ‘말’을 새롭고 섬세하게 배운 사람이 ‘물’의 심상을 발견하는 시인이 된 셈이다. (실은 소릿결을 조합하는 측면에서나 형태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말’에서 ‘물’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자가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언어를 부리는 재주와 더불어 소월은 나의 내면과 다른 이의 내면 사이에 중첩된 지점들을 파고드는 능력을 시인의 주요 자질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말길’과 같은 ‘물길’을 열어 세상을 적신 사람이었다. 소월의 시에 등장하는 그 많은 물가들이 실은 타인이나 세상에 다다르려 그가 구축한 중간지대였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구름’과 ‘눈’ 또한 자연의 현상이면서 동시에 저 물의 변형이었다는 사실도 되새겨볼 만하다. 그래서 소월의 ‘님’은 나의 말문을 트게 한 자이면서 대화를 일으키게 한 사람이고 결국에는 내가 속한 세상의 ‘의미’에 이르는 길까지 인도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리고 의미가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발생하는지를 예민하게 감지한 사람이 바로 시인 김소월이었던 것이다.
저 대화를 만드는 과정에는 사회적 대화가 폭발했던 경험이 녹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시인은 시를 만드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말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시를 발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인 개인을 특권화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시의 출처를 시인 너머의 세계로 전환해준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길어올린 시적 목소리를 지면 위로 데려오는 자이다. 물론 이 과정에 어떤 변형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여기까지 에둘러 온 이유는 시집이 출간되기 여섯해 전에 3·1이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3·1의 여진 속에서 사건에 충실성을 더한 주체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지속되었으며 그 목소리가 변형을 통해 시의 지면에 올라왔을 가능성을 탐색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지금 분발하여 떨쳐 일어났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삼라만상과 더불어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 내게 되었다. 먼 옛날부터 모든 조상들의 영령이 우리들을 남몰래 돕고, 온 세계의 기운이 우리들을 밖에서 보호하고 있다.
―「3·1독립선언서」부분, 번역은 국사편찬위 홈페이지
3·1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때’의 지각을 증폭시킨 사건이었다. 이제는 낡은 사상과 당시 인류의 문제로부터 분연히 떨쳐 일어날 때라는 판단이 행동으로 이어졌다. 인류의 평등을 위협하는 제국적 질서와 전지구적 평화를 어지럽히는 전쟁세력을 잠재우고 양심과 진리에 따르자는 목소리가 거기 있었다. 그러니까 3·1은 양심과 진리의 ‘목소리’를 배운 경험이기도 했다. 더불어 그 목소리가 거족적으로, 말 그대로 방방곡곡에서 울려 펴지는 일을 경험한 특별한 사건이었다. 이 땅 전체가 새로운 의식과 감성으로 요동친 역사의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3·1은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독립을 후일의 일로 촉진시켰다. 이쯤에서 김소월의 님을 3·1이라고 단정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3·1과 무관한 일로 여기는 일은 세상과 문학을 절연시키는 단순논리이자 우리의 문학사가 순수문학이라는 어휘를 매개로 경험한 증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소월이 3·1을 크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떠올리게 하는 시편 하나를 부분 인용한다.
소박한 풍채, 인자하신 옛날의 그 모양대로,
그러나, 아ㅡ술과 계집과 이욕(利慾)에 헝클어져
십오년에 허주한 나를
웬일로 그 당신님
맘속으로 찾으시오? 오늘 아침.
아름답다, 큰 사랑은 죽는 법 없어
기억되어 항상 내 가슴 속에 숨어 있어,
미쳐 거츠르는 내 양심을 잠재우리
내가 괴로운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제이, 엠, 에스」 부분
소월이 자신의 오산학교 재학시절 스승이자 독립운동가로 이름이 난 조만식에게 헌정한 시이다. 소월의 생애로 치자면 세상을 뜨기 일 년 전인 1934년에 뜸한 시작활동 중에 발표했던 시이기도 하다. 본문에는 자신을 반성하며 다그치는 일과 관련하며 굳이 “십오 년”이라는 시간을 적시하고 있는데, 34년의 15년 전은 묘하게도 3·1이 있었던 1919년이다. 그러니 세상을 떠날 때가지 자신의 “양심”을 다스리는 데 힘을 주는 저 “큰 사랑”은 조만식이란 스승으로부터 받은 것이면서 동시에 3·1의 세상으로부터 배우고 얻어낸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소월의 시에 그려진 이별이 발휘하는 능력은 3·1이 일으킨 큰 세상을 기억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송종원 / 문학평론가
2025.7.29.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