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권리를 가질 권리’와 평화의 조건
‘정치적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장 근본적으로 탐구한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지를 물어온 20세기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아렌트에게 인간은 타인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존엄은 타인과 더불어 말하고 행위함으로써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하며, 그러한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공적 공간이 필요하다. 아렌트가 폴리스(polis)라고 부른 이 공간은 인간이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상호 인정을 통해 공통의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이자 인간의 자유가 구체화되는 정치적 기반이었다. 이러한 폴리스는 단순한 제도나 도시국가를 의미하지 않고 인간이 서로를 인식하고 대화하며 공동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하는 평화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의 폴리스 개념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폴리스는 인간의 복수성(plurality)을 전제로 하지만, 동시에 그 복수성의 경계를 설정하는 제도적 틀 속에서 작동한다. 다시 말해, 말하고 행위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순간 폴리스는 평등의 공간이 아니라 배제의 공간으로 변한다. 고대의 폴리스가 여성, 노예, 외국인을 공적 행위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듯이 아렌트의 폴리스 역시 여전히 ‘함께 행위할 수 있는 자’의 범위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는 아렌트가 복수성을 인간 조건의 핵심으로 제시하면서도 실제로는 복수성 속의 이질적 타자를 수용할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점에서 드러난다. 폴리스는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며, 결국 그 안에서 평화는 불완전한 형태로만 유지된다.
이러한 한계에 대한 자각은 아렌트 자신의 사유 속에서도 중요한 전환을 불러왔다. 『전체주의의 기원』(1951)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저서이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20세기의 정치적 비극이자 지금까지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는 패권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전체주의를 분석하면서 폴리스가 붕괴될 때 세계와 평화가 어떻게 동시에 파괴되는지를 탐구한다. 근대 국민국가는 복수의 인간들이 함께 행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권과 경계, 민족과 혈통에 의해 구획된 폐쇄적 공동체로 작동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폴리스는 공존의 장소만이 아니라 배제의 체계로 기능하고 무국적자와 난민, 권리 없는 인간들을 양산한다. 나치 치하 프랑스에서 망명자로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이주하며 그 자신이 난민으로 살아온 아렌트는 “국적 없는 자는 자유에 대한 권리를 잃은 것이 아니라, 행동할 권리를 박탈당한 자”(532면)로 강조한다. 이는 인간이 세계 속에서 행위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질 때 인권이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더 이상 말을 하거나 행위할 수 없고 그 말과 행위를 기억에 남기기도 쉽지 않으며,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폭력이 등장한다. 행동할 장소를 잃어 행동할 권리를 박탈당할 때 평화는 붕괴의 징후가 또렷해진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제시한 “권리를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525면)라는 개념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응답이었다. 인권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함께 행위할 수 있는 정치적 세계가 보장될 때에만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권의 역설은 인간이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순간, 즉 국가와 제도의 경계 바깥으로
밀려난 바로 그때에 드러난다. 국가가 보장하지 않는 인간의 권리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 전체의 이름으로 선포된 인권조차도 정치적 공간의 부재 속에서는 공허한 선언에 불과하다.
이러한 아렌트에게서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며, 우주에서 유일한 인간의 거주지”(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9, 50~51면)란 사실 역시 중요하다. 지구는 인간이 함께 행위하고 말할 수 있는 보편적 폴리스이자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이자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에 아렌트의 지구적 폴리스는 위기에 처해 있다. 기후 변화, 생태계의 붕괴, 전쟁, 극우의 준동, 기술적 통치의 확산은 인간이 세계를 구성하던 방식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지구는 더 이상 ‘유일한 거주지’로서의 확신을 제공하지 못하며 인간은 지구 바깥의 달과 화성을 새로운 정치적 공간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탈주의 상상은 아렌트가 경고한 ‘세계로부터의 이탈’의 다른 형태일 수 있다. 아렌트가 경고했듯 인간이 자연과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욕망은 결국 인간의 조건 자체를 파괴하며 행위와 기억이 뿌리내릴 정치적 공간, 곧 평화의 장소를 소멸시킨다. 특히, 오늘날의 기후 위기는 단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와 평화의 조건이 붕괴되는 정치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저 지구 바깥으로의 탈주만이 아닌, 다른 방식의 문제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렌트의 사유는 오늘날 ‘행성적 평화(planetary peace)’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평화는 더 이상 인간 사회 내부의 합의나 휴전 상태로만 이해될 수 없으며 행성의 생명계가 지속될 수 있는 조건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행성은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라 비인간적 존재들과 얽혀 있는 복합적 관계망이며, 평화는 이러한 관계망 속에서 공동의 세계를 유지하려는 실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평화는 단순히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환경이 함께 지속될 수 있도록 세계의 조건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동시대의 상황과 더불어 평화를 단순한 질서나 안정이 아닌, 세계 속에서 다시 함께 행위할 수 있는 조건의 회복으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김은주 / 철학연구자, 이화여대
2025.12.2.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