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전환과 창조의 시대를 맞이하는 새로운 다짐
이남주
우리의 시간감각에서 60년은 하나의 순환이 완료되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1966년 1월 창간 이래 『창작과비평』이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창간 후 상당 기간 한편으로는 신생 잡지로서 척박한 문화적 토양과 열악한 경제사정을 견뎌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과 5공 독재라는 엄혹한 정치환경과 그로부터 비롯된 폐간 및 출판사 등록 취소라는 시련을 이겨내야 했다. 잡지 운영에 참여하신 분들의 헌신적 노력과 사회 각계의 지원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1987년 6월항쟁 직후 부정기간행물 『창비 1987』(통권 58호)을 발행하고 1988년 봄에 이르러 ‘창작과비평’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찾아 복간호(통권 59호)를 발행한 뒤부터는 정치환경이 개선되고 한국의 문화적 역량도 크게 강화한 것에 힘입어 훨씬 안정된 토대 위에서 발간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글로벌 차원과 한반도 차원의 급속한 전환에 대응하는 데 사회적으로 힘을 모아야 했으며, 나라다운 나라와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새로운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
이 도전에 응하는 여정에서 우리 사회는 적지 않은 혼란도 겪었다. 6월항쟁 이후 민(民)의 주체성은 꾸준히 고양되어왔지만, 수구세력의 만만치 않은 저항이 있었다. 그때마다 지식인사회는 변혁적 전망을 열어가기보다 현실과 거리를 둔 비판에 자족하려는 유혹에 이끌리는 경우가 많았다. 문학과 문화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열렬하였지만, 상업주의와 다양한 포스트주의의 유행 속에서 문학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비관하는 정조도 적지 않았다. 이에 본지는 분단체제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질곡이 조성하는 어려움을 냉철하게 인식하는 동시에 민의 역량에 대한 믿음을 갖고 대전환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자 노력해왔다. 그 과정에서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동아시아론, 이중과제론, 변혁적 중도론 등 한반도 현실에 뿌리내린 담론을 발신했다. 촛불혁명, 빛의 혁명을 통한 민주주의의 고양과 한강의 노벨문학상으로 대변되는 한국문학의 빛나는 성취는 본지가 옳은 길을 걸어왔다는 보람을 선사한 사건이다.
이러한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힘을 모았던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자부심과 보람이 자족과 안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창작과비평』이 창간 이후 걷고자 한 길, 현실적 과제를 감당하며 궁극적으로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길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지난한 도정이다. 그렇기에 이 길을 가는 데 자강불식의 자세로 한결같되 나날이 새로워지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현재 우리는 글로벌 차원에서 선례를 찾기 어려운 전환기에 들어서 있다. 냉전체제 해체 이후 유지되어온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고, 한계에 도달한 자본주의 너머를 사유해야 하며, 인류세(人類世)라는 표현이 상징하는바 인류 초유이자 긴박한 지구적 과제 또한 놓여 있다. 그러나 전환의 요구는 창조적 실천의 계기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실천의 과정에서 우리가 최전선에 서 있다는 새로운 시대인식이 각별히 요청된다. 다른 나라의 모델을 잘 따르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안이한 태도와 결별해야 한다. 단지 다른 나라의 모델이 우리의 현실과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만한 모델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의 관성적 태도를 고수하려 한다면 그저 난감한 상황일 테지만, 적극적 태도로 임한다면 한국과 한반도가 세계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장이 열린 셈이다.
이러한 때에 무엇보다 ‘창조의 역량’이 중요하다. 문학이 창조적 사유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본지의 흔들림 없는 믿음이자 한국문학이 훌륭히 입증해온 바다. 근현대사에서 여러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아니 그 어려움을 분발의 계기로 삼아 정치·문화·경제 등의 영역에서 우리가 쌓아온 성과 역시 창조적 사유의 자양분이다. 한반도 차원에서 민의 창조력을 억압하는 여러 제약을 타파하고 문명전환을 앞서 촉진하는 사상자원을 만들어왔다는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본지는 한반도에서 축적된 ‘인류 공동의 사상자원’을 힘있게 모아내고 널리 발신하는 작업을 위해 창간 60주년을 맞으며 ‘K담론의 거점’이라는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감당하고자 한다.
우선, 한반도에서 축적되어온 사상·역사 자원을 정리하고 공유해나갈 것이다. 이는 단지 주목받는 우리의 성과에 ‘K’를 붙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성취를 가능하게 한 사상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규명하고 그 현재적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실천이 중도반단하지 않고 더 큰 역사적 보람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일이다. 나아가 한국의 사상·역사 자원에 담긴 현재성과 보편성을 세계적 차원에서 확인받고 나누고자 한다. 발화하는 쪽과 수용하는 쪽이 위계적으로 분리되는 대화는 지양하는 가운데 우리의 성취를 공유하는 일이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이 일에 임하고자 한다.
본지가 전환과 창조의 과제를 감당하기 위한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지는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학술장과 미디어 환경의 빠른 변화는 본지가 독자 및 사회와 맺는 관계에 새로운 어려움을 조성하고 있다. 문명전환의 지향을 현실과 밀착시켜 사유하고, 독자친화적·논쟁적인 글쓰기를 실천하고자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60주년을 계기로 혁신에 대한 각오를 다시 다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이 혁신은 여러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지면에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며 세운 다짐을 지켜가는 데 독자들의 관심과 충고가 무엇보다 큰 힘이 된다. 본지가 갈 길을 가면 지금까지처럼 독자들이 함께하리라 굳게 믿는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6년 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2026.2.2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