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찰과 검열의 통치술
‘권리장전(權利長戰) 2016─검열각하’, 박근혜정부의 예술 검열에 항의하여 진행되고 있는 5개월 릴레이 연극 공연의 주제다. 「검열언어의 정치학: 두 개의 국민」이라는 6월 9일 공연에서 시작해 10월 30일 「대한국사람」 공연까지다. 144일 동안 22명 연출가와 21개 극단, 332명 배우와 스태프가 참여하여 100회 넘는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릴레이 공연의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는 연극 「개구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연출가 박근형의 다른 작품인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창작산실 우수작품제작지원 선정에서 배제된 것이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이 심사위원들에게 선정작 제외를 요구하다 여의치 않자 연출가를 찾아가 사업 포기를 종용했다. 또한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지원에서는 심사위원이 선정한 이윤택 연출가의 작품 「꽃을 바치는 시간」을 탈락시켰다. 다원예술창작지원 심사에서는 연출가 윤한솔의 정치적 성향과 세월호 소재를 이유로 「안산순례길」을 배제하도록 심사위원을 압박했다.
대한민국은 검열왕국?
박근혜정부의 검열은 그 이전부터 허다했다. 이동연에 따르면, 개봉중단, 연재중단, 상영거부, 예산삭감, 사퇴압력, 대관불허, 압수수색, 검찰고발, 지원배제, 강제중단, 공연자 배제 요구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다(「검열에 저항하는 새로운 상상력」, 『연극평론』 2016년 봄호). 박근혜정부의 ‘문화융성’은 검열의 창궐이었다. 문화기관은 전문성과 무관한 친정부 인사의 낙하산 일색으로 채워졌다. 경쟁사회에서 공모(公募)는 거짓 공정성의 전형적인 방식이 되기 십상이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밀실에서 권력의 뜻을 관철하는 알리바이 구실을 한다. 당사자든 국외자든 저항하지 않고 실력이나 운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봉건군주제식 통치술을 구사함으로써 민주공화제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박근혜정부의 권력체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생물학적 아버지인 박정희에 대한 비판에 민감했다. 그것에 비례해서 국민들의 민주주의 감성은 무뎌진 듯했다. 검열을 검열로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검열이라 하면 대본을 빨간 줄로 벅벅 긋는 것만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재정지원을 받지 못했을 뿐이지 결국 공연을 한 사례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검열에 대한 진부한 잣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일제강점기 또는 독재시대의 검열 관념을 동원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툭하면 ‘준법서약서’를 내게 하고, CCTV 만능주의를 부추기며, 국가가 만든 유일 역사교과서를 강요하고, 정치적 표현 행위나 노동조합의 파업을 손해배상소송으로 가로막는 검열 천지였기 때문이다. 그 가장 밑바닥에는 정부 수립 직후 제정된 사상검열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자리잡고 있다. 민주시민이라면 인권 감성 또는 민주주의 감성을 날카롭게 벼려 예술가들과 연대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예술 검열이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동향을 전방위적으로 사찰한 토대 위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지난 10월 10일 도종환 의원은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예술위원회의 심사 및 심사위원 선정에 개입했음을 밝혀냈다. 이틀 뒤 한국일보는 2015년 5월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공개했다. 총 9473명이었는데, 세월호특별법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세월호 시국선언,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 박원순 후보 지지선언 등에 참여한 문화예술인이었다. 이중의 촘촘한 검열장치다. 사찰과 검열은 그렇게 한통속이었다. 국가기관과 그 산하기관 모두가 국가정보원의 분신임을 드러냈다. 국가는 몽땅 전체주의적 사찰기관이었다. 국가정보원의 댓글공작에 힘입어 출범한 때문인지 박근혜체제의 국가기관들은 사찰과 검열을 국력 삼아 대통령을 향한 소리없는 헌신을 바탕으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고 있었나보다.
대한민국은 민주시민의 나라다
그런데, 그런데, 희대의 검열 사건이 국민적 분노를 자아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최순실의 ‘빨간펜 검열’이었다. 연설문 검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20%대로 지지율이 떨어진 대통령과 그 추락한 권위는 문제가 아니다. 정작 모욕당한 것은 주권자다. 어렵게 되찾은 대통령직선제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문화예술계 검열은 그에 버금가는 주권자 모독이다. 검열 금지는 언론·출판의 자유 조항(헌법 제21조 제2항)에만 있지만, 학문·예술(헌법 제22조 제1항) 검열 또한 당연 금지다. 예술적 표현행위는 자율성과 비판성 그리고 창의성 면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헌법 제10조)의 본질적 내용(헌법 제37조 제2항 단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국가의 전체주의화 경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잣대가 학문과 예술의 자유 보장 여부이다.
문화예술계가 정권의 나팔수가 된다면, 그것은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사회의 부재를 증명한다. 예술가들이 자본과 정치권력에 결탁한다면, 막장 중의 막장 국가다. 검열이 의도한 내부 분열의 위험성을 이겨내고 묵묵히 자신의 방식으로 연대해서 검열에 항거하는 예술가들이 산소처럼 무척 소중한 까닭이다. ‘팝업씨어터’ 사건에서는 김정 연출가의 「이 아이」 작품에 수학여행과 노스페이스가 등장하는 것이 세월호를 연상케 한다고 공연예술센터 중간관리자가 공연을 방해했다. 실무담당자였던 김진이는 이러한 방해 행위를 공론의 장에 공개함으로써 검열에 항거했다.
이제 민주시민들이 답할 차례다. 사찰과 검열 체제에서 마땅히 해야 할 구실을 하지 않았기에 구조적 부정의(不正義) 책임을 공유하고, 함께 협력하여 한국사회의 검열 체제를 바꾸기 위한 정치적 집단행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그것은 몇 사람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식으로 해소할 일이 아님을, 대통령을 바꿔서 해결할 일이 아님을, 헌법 조문을 뜯어 고친다고 될 일이 아님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직접 결정할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결정할 것이며, 어떤 사람을 어떻게 뽑아서 어떤 일을 맡길 것인지, 그 밑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아무 거리낌 없이 서로 묻고 답하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오동석 /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6.10.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