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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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토머스 핀천 『바인랜드』

핀처네스크의 60년대식 점묘법
--토머스 핀천 『바인랜드』, 창비 2016

 

 

hkuykuy‘좋은 이야기는 두겹의 이야기다’라는 말이 있다. 겉에 드러난 이야기를 좇다보면 어느새 뒤에 숨겨진, 좀더 크고 거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이 『중력의 무지개』(Gravity’s Rainbow, 1973, 한국어판 이상국 옮김, 새물결 2012) 이후 17년 만에 발표한 『바인랜드』(Vineland, 1990, 한국어판 박인찬 옮김)도 그렇다. 겉보기에는 두살 때 떠나간 엄마의 삶을 추적하는 딸의 이야기지만 이야기에 몰입할수록 독자들은 1960년대와 그 이후의 냉전기, 두 시대를 통과하는 느낌을 준다. 

 

핀천식 수프에는 정교한 배경 설명, 꽉꽉 들어찬 고유명사와 상품명, ‘알맞게 빈정거리는 태도’를 지닌 세련된 찌질이들 같은 건더기가 떠 있다. 대단히 미국적인 배열이라고 할까. 기본적으로 문장이 무지막지하게 길기도 하지만 현학적이든 입심이 좋든 약간 수다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방대한 명사들의 행렬에 있는 것 같다. 주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명사는 피로감을 유발하지만 『바인랜드』 같은 작품들, 많은 인물과 사물이 점묘법처럼 콕콕 찍혀 당대라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방식에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프레네시의 전남편 조이드로부터 시작된다. 조이드는 정신병자에게 주는 연금을 받기 위해 주기적으로 미친 짓을 해야 하는데 그게 주목받는 행사처럼 변해 방송국 카메라까지 쫓아오며 ‘조이드의 창문 넘기’라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날도 여느때처럼 미친 짓을 하려는데 진짜 미친놈이 등장한다. 전직 마약감시반 소속 경찰이자 현재는 텔레비전 중독자인 엑또르. 조이드의 감찰 담당이었던 그는 간만에 나타나 전처 프레네시의 소식을 알려준다. 프레네시에게 집착하는 연방검사가 자기 딸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조이드는 위험을 감지하고 집을 떠난다. 그의 딸 프레리는 엄마의 옛 동료였던 디엘을 만나 엄마가 찍은 옛날 필름들을 보게 되고 과거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극적, 주로 비극적이던 삶의 비밀에 대해. 

 

소설은 ‘푸른 눈의 예쁘장한 버클리 여대생이 어떻게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속해 미국 전역을 떠도는 삶을 살게 되었나’라는 스토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프레네시는 연방검사 브록의 육체에 깊게 빠져 그에게 포섭되고, 동료를 죽음으로 유도해 그 모든 과정을 영화로 찍은 과거가 있다. 배신자가 된 그녀는 히피처럼 살아가는 조이드와 결혼해 도피하지만 다시 브록과 불륜에 빠지고 결국 브록을 등진다. 그리고 브록으로부터 숨어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가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만나 아들을 낳고 살아가고 있다. 

 

이 작품에는 크게 두갈래로 갈라지는 인물군이 있다. 히피와 좌파(조이드와 프레네시), 그리고 그들을 쫓거나 감시하는 검사와 경찰(브록과 엑또르)이다. 브록은 작품 내내 변함없이 위협적인 파시스트지만 엑또르는 경찰을 그만둔 후 프레네시의 삶을 영화로 만들 공상에 빠져 있다. 엑또르가 조이드와 프레네시 양쪽을 접촉하며 만남을 주선하는 것 또한 그것을 영화로 찍으려는 공상 때문이다(프레네시가 스무살 때 하던 짓에 전직 경찰 엑또르가 뒤늦게 열정을 불태우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브록은 그들을 쫓아 군대를 동원해 바인랜드에 오고, 떠돌며 살던 프레네시도 딸을 만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인랜드로 향한다. 이렇듯 등장인물 모두가 모이는 재회의 장은 떠들썩한 파티다. 프레리의 할머니이자 구식 좌파인 사샤의 집안사람들이 모이는 대규모의 파티에서 마침내 프레리는 엄마를 만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변형된 현대적 신화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신화에서 영웅은 남성의 몫으로, 어릴 때 떠나간 아버지를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딸이 비밀에 둘러싸인 어머니를 찾아나서고 마침내 해후한다. 한편 어머니 프레네시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귀향의 이야기, 즉 『율리시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의 주인공이 전쟁영웅이 아니라 동료를 배신하고 삶으로 그 댓가를 치른 젊은 여자라는 차이가 있지만. 

 

‘핀처네스크’(Pynchonesque)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복잡한 얼개와 구조, 작가가 만든 조어와 약어의 쉴 새 없는 사용 등으로 도입부라는 육중한 정문을 통과하는 것이 녹록지 않지만, 일단 소설에 실려 읽기 시작하면 매력적인 복도와 회랑이 줄줄이 나온다. 히피들의 후일담을 듣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600면이 넘는 두꺼운 책에 이따금 책갈피처럼 끼어 있는 뜻밖의 서정적인 장면이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거리의 이쪽저쪽에서 텔레비전 스크린들이 어둠속에서 푸른 빛을 발하며 조용히 깜빡거렸다. 근처에서 보지 못한 시끄럽게 울어대는 낯선 새들이 텔레비전에 이끌려, 몇몇은 야자나무에 편안하게 앉아 한쪽 눈으로는 수풀 속에 사는 들쥐를 찾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다른 몇몇은 창문 근처를 날며 화면을 앉아서 잘 볼 수 있는 각도의 자리를 찾고 있었다. 광고가 나오자, 새들은 다른 세상에서 온 듯한 맑은 목소리로 광고에 답례를 했고, 가끔은 광고가 나오지 않을 때에도 지저귀었다.(139면)


새들이 TV광고를 보기 위해 창밖에 앉아 있는 풍경이라니. 기묘하게 아름다운 이 몇줄은 등장인물의 운명과도 겹쳐 읽힌다. 영원히 어른이 될 것 같지 않은 ‘60년대 아이들’이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강압적인 정부나 냉전체제가 아니라, 텔레비전 앞이기 때문이다. 프레리가 처음 본 동복동생을 만나자마자 8시 영화를 나란히 앉아 보는 장면은 다음 세대의 권력이 어디로 넘어갔는지를 보여준다. 작품 전반에 걸쳐 영화와 드라마 제목이 쉴 새 없이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프레네시는 사람들이 신비스럽게 하나가 되어 빛의 최상의 가능성을 향해 함께 힘을 모으는 장면을, 한두번은 이루어졌고, 그녀가 그것을 거리에서, 시간을 초월한 순간의 폭발 속에서, 사방으로 오고 가는 인간들과 발사물들 속에서, 단일한 존재가 된 사람들, 마찬가지로 한자루의 움직이는 칼처럼 하나가 된 경찰들에게서 보았던 그런 장면을 꿈꾸었다.(196면)


이런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모종의 댓가를 지불하고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 모두 영성처럼 드리워진 텔레비전의 광채 속에 앉는 것이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엔딩까지 읽고 나니 작가의 공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나는 이 소설이 무엇을 덜어내려 하지 않아서 좋았다. 왕성하고, 결코 간결하지 않고, 아는 것과 알고 싶은 것을 향해 탐욕스럽게 뻗어나가려는 태도, 작가가 생물학적 나이를 떠나(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 핀천은 53세였다), 야망을 가지고 거대한 주제에 도전하는 태도는 글을 팽팽하게 만든다. 그리고 팽팽한 종이를 넘기는 것이야말로 독자의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에 수록되었습니다.

 

김성중 / 소설가

2016.11.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