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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반격, ‘헬조선’의 황혼

염동규

염동규

광장은 알 수 없이 고요했다.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웅성거림으로 전해져왔지만, 어쩐지 그 소리들은 낮고 무겁게, 그리고 조용하게 들렸다. 환호하며 구호를 외칠 때조차 사람들은 침착했다. 집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책을 사러 간 거였다. 하지만 광장과 도로를 가득 메운 엄청난 수의 사람들과, 경찰도 자동차도 없이 텅 빈 거리를 보고 나서는 역시 생각이 달라졌다. 행진을 함께하고 싶었고, 좀 오버스럽긴 했지만 사실은 살짝 눈물이 나기도 할 정도로 감격한 마음이 컸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좌절 끝에 만난 ‘동료 시민’들

 

내가 참여한 행진은 종로와 을지로, 명동, 시청을 거쳐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박근혜는 퇴진하라” “범죄자는 구속하라” 등등의 구호를 목청껏 외치며 걸음을 이어나갔다. 나는 대오의 맨 앞쪽에 있었는데, 구호를 외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놀라움과 감격은 행진을 이어가는 내내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사람이 많은, 신기한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감격한 것은 아니었다.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지 몇년쯤 되었다. 인터넷의 댓글창엔 온통 ‘적의’만 가득해 보였다. ‘선동질’이나 ‘좌좀’, ‘씹선비’, 그리고 또 많은 혐오와 적대감의 표현들…… 인터넷 댓글을 곧장 여론과 동일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몇년 동안 이런 혐오 표현들에 노출되면서 나는 우리 사회에 ‘연대’라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할지, 정의를 말하고 옳은 일을 추구하려는 많은 행위들이 점차 고립되고 분쇄되어가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좌절해, 한참 동안 주먹을 꽉 쥐고 있곤 했다. ‘헬조선’이라는 키워드가 가히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했고 ‘청년들은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늙은이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러나 11월 5일, 내가 본 것은 이 희망 없는 나라의 현실에 공감하고 분노한 수많은 동료 시민들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후퇴한 우리 사회에서, 이 참담한 사태의 해결을 실천하고자 하는 동료 시민들이 정말 반갑고, 고맙고, 또 슬펐다. 다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먹먹하기만 하다.

 

12일에는 먼저 구 시청사를 개조한 서울도서관을 찾았다. 나라 걱정을 하느라 그랬다면 핑계이지만 미뤄둔 공부가 많아서 조금이라도 책을 더 보고 집회에 참석하고 싶어서였다. 세시 반쯤 도서관을 나와 집회에 참여했다. 사람은 정말 많았다. 앉고 싶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대충 뒤쪽에 자리를 잡은 채로 앞뒤를 둘러보았는데, 깃발과 사람의 행렬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했는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 ‘헬조선’의 황혼이 오고 있다

 

사람이 많아서 좋았다는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12일의 집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을 몇가지 적어두고 싶다. 이미 언론에도 보도된 것이지만, 100만명이나 모였는데도 시민들은 질서와 평화를 유지했다. 사람으로 가득 찬 거리에서 시민들은 한걸음씩 천천히 줄을 서서 움직였다. 하지만 불평 한마디 없었다. 딱히 방송차 같은 게 없을 때에도 시민들은 서로서로 구호를 주고받고 독려하며, 무능하고 몰상식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했다. 누군가 “박근혜는”이라고 외치면 주변의 사람들이 “퇴진하라”를 외치는 방식이었는데, 선창을 메기던 사람이 목이 아파 지치고 나면 곧장 다른 사람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서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래야 할 순간들을 자연스레 알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장벽 앞에서 격앙된 행동을 보였던 일부 시민들을 ‘비폭력’의 구호로 만류하고 대치 중이던 경찰을 다독여주는 광경까지 여러차례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바 역할을 올곧게 실천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고고한 반격. 12일의 집회에서 내가 본 것은 정확히 그랬다.

 

속 보이는 여의도의 ‘공범’ 정치인들과, 겁 많은 몇몇 논객들에 따르면 대통령의 퇴진이 나라에 큰 혼란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보아서 안다. 정의를 바로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모인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은 대통령 퇴진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스스로의 힘으로 돌파하고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거니와 가까운 미래, ‘헬조선’에도 끝이 온다면 바로 여기로부터일 것이다. 그러니 구중심처의 허수아비 대통령과, 비겁하고 졸렬한 공범들, 그간 이 나라를 아프게 감싸온 분열과 고통들은 그만둘 자리를 알고 스스로 물러나라. 100만 촛불의 불빛과 함께 ‘헬조선’의 황혼이 오고 있다.

 

염동규 / 고려대 일반대학원 총학생회 학술국장,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2016.11.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