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이진경 『대중과 흐름』
다시 열린 광장에서 ‘대중’을 생각하다
이진경 『대중과 흐름: 대중과 계급의 정치사회학』, 그린비 2012
지난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다. 여기저기서 축배를 드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며 헌재의 판결이 남아 있음을 엄중히 상기시키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기쁘고 감격스러운 내색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럴 만했다. 이제껏 국회가 국민들에게 제공했던 정치적 효능감의 정도를 고려해보았을 때—‘효능감’이라는 말보다 차라리 ‘절망감’이나 ‘무기력감’이라고 해야 옳긴 할 것인데—이번 탄핵안 가결은 국회가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대의하는 기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일종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이 사건의 주역은 의회에 모인 300명의 국회의원이 아니라 그들을 탄핵 투표장으로 몰고 간 광장의 대중이라는 점이다. 두달여에 가까운 기간 동안 매주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섰다. 한주 동안 쌓인 심신의 피로를 풀어야 할 주말마다 매번 이게 무슨 짓이냐고, 짐짓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시민들의 표정에는 어떤 고양된 감정과 뿌듯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들은 매주 촛불집회가 열리던 그 광장이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역사적 현장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멀리 제주에 살고 있었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비행기를 타고 광화문으로 날아갔다. 87년 6월항쟁 이후 최대 인파가 모였다는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얼굴과 말을 살피며, 나는 새삼 대중의 존재론을 되물었다.
‘대중’에 관해서라면 오르떼가 이 가세뜨(J. Ortega y Gasset)의 고전적 논의에서부터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의 ‘다중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적지 않은 논의가 이미 제출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매번 새롭게 마주하는 대중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아직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급작스럽게 출몰하는 대중의 형상은 근대 사회의 고유한 특징으로 이미 낯익은 것이지만 대중이 지니는 폭발적 에너지는 그 방향을 특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제나 미지의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에띠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대중들의 공포』에서 국가 그 자체에 대중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에 대해 논한 바 있다.) 한편 서구의 이론에서 연역해 우리의 경험을 풀어낼 때 발생하는 일종의 시차(視差)도 문제다. 남한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렬한 대중운동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일종의 활성화된 단층이다. 그렇다면 지리학자들이 활성단층이 있는 현장을 직접 찾아 탐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귀납하여 대중의 발생론과 존재론에 대한 토착적 이론의 형성 가능성을 얼마든지 타진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남한이야말로 ‘대중론’에 관한 한 일종의 ‘핵심 현장’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관련해서 1980년 5월 광주를 대중봉기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고찰한 김정한의 연구(『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가 제출된 바 있지만 2000년대 이후의 대중의 발생론과 존재론은 또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을 요한다. 적어도 내가 관찰한 촛불을 든 대중은 기존의 ‘봉기’라는 관점으로는 적절하게 포착할 수 없는 분산적이고 이질적인 흐름들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새롭게 등장한 대중의 존재로부터 촉발된 이진경의 『대중과 흐름: 대중과 계급의 정치사회학』은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대중의 존재론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가 되어준다.
이진경은 새로운 대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중은 이제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정신’을 갖는 거대한 집합적 군체로서 존재한다. 신경과 마찬가지로 전기적인 신호로 작동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와 그에 연결된 무수한 모바일 단말기—감각장치들, 그에 따라 모이고 움직이는 신체들이 존재한다.” 대중을 모바일 단말기로 연결된 일련의 네트워크로 보는 시각은 2016년 현재 더욱 큰 설득력을 얻는다. 광장에 모인 대중들은 이제 광장에 묶여 있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손에 든 그들은 광장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심지어 광장을 벗어난 시공간 속에서도 여전히 광장과 접속해 있다. 따라서 이제 광장은 물리적이고 영토적인 공간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은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체적인 의미에서도 이미 현실화된 광장인 것이다.
여기서 이진경은 대중을 이미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창출되는 존재로 인식할 것을 요청한다. 대중이란 “이탈의 벡터가 가동하여 어떤 감응의 전염에 의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바, 대중은 자신들의 본래적 특성으로부터 이탈하고 새로운 공동성을 획득함으로써만 비로소 대중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제 투쟁의 목표나 방향 역시 예전과 동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대중을 지도하고 흐름을 통제하는 지도부의 역량이나 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열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촛불집회의 성공 요인으로 최소화된 지도부의 역할을 꼽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가령 이런 것이다. “대중 자신이 그런 식으로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경험이며, 그런 집결을 통해 다른 이들과 나누는 공동성의 경험, 거기서 느끼는 기쁨과 해방감이다. 깨지고 패배했을 때조차 결코 소멸되거나 무화될 수 없는 그 감응과 체험.” 그렇다. 우리가 피곤한 일상을 뒤로하고 매주 광장에 모일 수 있었던 동력은 비단 분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진경이 제대로 지적하고 있듯이 대중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며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따라서 대중의 출몰에 무작정 환호하거나 불필요한 경계를 보이는 것은 언제나 성급한 일일 수밖에 없다. 대중 가운데로 들어가 전달과 증폭의 매개체로 존재해보는 것. 대중의 파동에 기꺼이 휘말림으로써 새로운 공동성의 경험을 창출해내는 것. 그 흐름 속에서 비로소 새롭게 생성된 사회적 신체를 마주하는 것. 어떤 선험적인 판단보다 중요한 건 바로 이런 ‘대중-되기’의 경험일 것이다. 물론 이진경의 이 책이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새로운 대중의 존재론의 모든 면모를 해석해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과제는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를 통해 또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 새로운 과제를 성실하게 대면하는 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작지만 소중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16.12.2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