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로버트 단턴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매혹과 미혹 사이, 그 오래된 미래
―로버트 단턴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알마 2016

 

 

ehwhe사람들은 ‘명의’를, 더 솔직한 표현으로는 ‘용한 의원’을 찾고 싶어한다. 텔레비전이며 신문이며 인터넷 커뮤니티며 용한 의사와 좋은 약을 소개하고 품평하는 정보가 가득하다.

 

의사들은 이런 식으로 의료와 의료인을 품평하는 일,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의료쇼핑’이 달갑지 않다. 단지 환자가 의사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권위의식 때문은 아니다. 의사의 숙련과 정성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근대 의료는 ‘명의’나 ‘비방’이라는 말이 필요 없는 경지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학지식은 동료집단의 평가를 받고 논문의 형태로 공개 및 출판되어야 한다. 모든 진료는 공개되고 표준화된 절차를 따라 이루어지며, 한국처럼 국민의료보험이 있는 나라에서는 그 절차 각각에 대해 제3자가 심사를 하기도 한다. 이같은 시스템은 근대 의료인들이 비방과 비기를 독점하려는 이들, 스스로 배타적인 명의로 자처하던 이들에 오랜 세월 맞서 싸운 결과로 세워 올린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일단 근대 의료가 추구한 이상과 환자들이 맞닥뜨리는 현실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환자들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크고 작은 의료사고와 부적절한 처치에 대한 이야기들은 굳이 찾아나서지 않아도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고, 각종 시술과 약의 효과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경험담도 곳곳에 널려 있다.

 

소외감과 음모론과 급진주의

 

이렇게 엇갈리기 시작한 의사와 환자의 마음은, 진료실이라는 조우의 공간을 통해 더 큰 폭으로 엇갈리기 일쑤다. 의사들은 환자들의 개별적 경험보다 다수의 사례에서 추출해낸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관점에 따라서는 환자의 주관이 개입된 구두 진술보다 모니터에 수치로 출력된 각종 진단과 검사의 결과들이 환자의 상태에 대해 더 믿을 만한 정보를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반면 환자들도 야속하다. 의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이고 마치 공장의 제품을 검수하듯 무심하게 수치를 살펴보고 처방을 내린다.

 

이런 경험을 거쳐 소외감이 쌓이다보면 근대 의료의 시스템 전체에 대해 반감을 갖는 이들도 생겨난다. 근대 의학과 의료체제 전체가 거대 제약회사나 보험회사와 같은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종속되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나 인터넷 문서는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소외감을 토양 삼아 자라난 음모론은 종종 정치적 급진주의와 연결되기도 한다. (음모론자들이 생각하는) 진리가 널리 알려지지 못하는 것은 부정한 현 체제가 그것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추기 때문이며, 따라서 현 체제의 기득권 세력을 타파해야 진리를 온전히 밝힐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이같은 주장은 소수 과격파 집단 안에 머물고 말겠지만, 사회적 불안정성이 높아지면 예상치 못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프란츠 안톤 메스머라는 의사가 자성을 띤 유체의 흐름을 조절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 크나큰 인기를 얻었고,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메스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과학아카데미가 메스머의 주장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이 ‘메스머주의’(mesmerism, 오늘날에는 최면술과 유의어로 쓰인다)의 인기를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대중은 과학계와 의료계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을 탄압한다며 기성 과학자와 의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팽배해 있던 구체제에 대한 불만과 결부되어 혁명의 에너지를 증폭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국내에 『고양이 대학살』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은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김지혜 옮김)에서 메스머주의에 대한 논쟁을 복원한다. 그의 출발점은 오늘날 우리가 프랑스대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떠받드는 책들이 당시에는 놀랄 만큼 많이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읽고 무엇에 대해 토론했는가? 오늘날에는 “사이비과학”이라는 오명을 쓰고 철저히 잊혀졌지만, 당시 가장 뜨거웠던 관심사는 바로 메스머주의였다.

 

그리고 메스머주의가 당시 지식인들이 뜨겁게 토론했던 유일한 과학적 주제도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뉴턴이 완성해놓은 고전물리학 체계가 수입되어 커다란 지적 충격을 주고 있었으며,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일군의 화학자들이 물질에 대한 이론을 완전히 새로 쓰고 있었고, 신대륙의 각종 기이한 동식물이 속속 소개되고 있었으며, 열기구를 타고 신들의 영역이었던 하늘을 침범하는 이들이 새로운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이렇게 옛것은 흔들리고 새것은 아직 확실히 자리잡지 못한 지적 혼란의 와중에서, 새로운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열광적인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살아남아 추앙받는 라부아지에의 학설과 오늘날 기각되고 잊힌 메스머의 학설이 비슷하게 놀라웠고 비슷하게 참신했으며, 비슷하게 어려웠으며 비슷하게 혼란스러웠다. 따라서 적지 않은 이들은 소위 전문가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참과학과 거짓과학을 판정하는지 의문과 반감을 갖게 되었는데, 뒷날 혁명이 급진화하면서 과학아카데미가 해체되고 라부아지에와 같은 저명 과학자들이 처형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렵지만 알고 싶은, 알아야만 하는

 

단턴의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는 사실 번역이 늦게 되었을 뿐, 서양 사상사와 과학사에서는 이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과학사가 정치사 또는 사상사와 동떨어진 별개의 분야가 아니라,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깊이 얽혀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이 얽힘을 다시 보고 있는 듯하다. 열기구와 새로운 원소들이 혁명 전 야 프랑스의 지식인들을 매혹하는 동시에 미혹시켰듯이, 알파고와 소위 “제4차 산업혁명” 등의 유행어들은 한국의 지식사회를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찬탄과 당혹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새로운 지식이 익숙한 믿음을 뒤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때와 지금은 비슷하다. 또 새로운 지식에 당황하면서도 매료되고, 그럼에도 하루아침에 새로운 흐름을 쫓아갈 수는 없기에 마음만 급해지고 때로는 헛된 정보에 길을 잃는다는 점에서도 그때의 지식인들과 지금의 지식인들은 비슷하다. 마치 혁명 급진파의 지도자가 되었던 마라(Jean-Paul Marat)가 구체제 말기에 열성적으로 과학아카데미에 아마추어 과학자로서 논문을 투고했지만 보내는 족족 퇴짜를 맞았던 것처럼, 열정과 관심은 넘치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범람하는 것도 이 책을 읽고 기시감이 드는 이유 중 하나다.

 

바야흐로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고, 새로운 것이 밀어닥칠 것 같다. 그러나 매혹이 미혹으로 변질되는 것을 피하려면 한발짝 떨어져서 차분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알파고는 어느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은 수십년 동안 수많은 과학자들이 일생을 바쳐 연구해 성장해온 분야이며,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동아시아인에게 친숙한 게임을 통해 그 성과를 시연한 것일 뿐이다. 도처에 떠돌아다니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도 정작 연구현장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또는 실체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진행 중이다.

 

이런 유행어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려면, 지름길처럼 보이는 유혹들을 거부하고 기본부터 착실하게 다져야 한다. 우선 “하룻밤에 읽는” 또는 “한권으로 이해하는” 등의 미끼를 제목에 내건 책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정말 하룻밤에 책 한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하러 전세계 수억명의 사람들이 과학기술에 일생을 바쳐가며 업으로 삼고 있겠는가? 정말로 과학기술이 우리 시대의 교양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시간이 걸려도 차분하게 익혀 나가는 것이 왕도일 것이다. 그리고 전문가와 비전문가(누구나 자기의 업을 벗어나면 비전문가가 된다) 사이의 오해와 소외감을 줄여나갈 수 있는 길도 거기에 있다.

 

김태호 /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2017.2.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