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정희진 외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합의하에
―정희진 외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교양인 2016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증언을 토대로 조직된 연대 모임 페미라이터에서는 최근 “어떤 것도 사소하지 않습니다”라며 개별적인 폭력의 경험을 공적인 목소리로 전환하는 ‘말하기/듣기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해시태그 증언을 고발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두고 그 ‘증언의 타래’를 새로운 운동의 양식으로, 젠더정치학의 지형으로 옮겨가겠다고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응원하고 싶다. 새삼스럽지만 최근 페미니즘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가 연일 화제다. 물론 이때의 화제란 SNS상에 국한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와 ‘이년, 저년, 미친년 박근혜’라는 선전구호를 둘러싼 여성주의적 성찰에서부터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대체하는 근거로 사용되던 ‘이퀄리즘’에 대한 논의—최근 이퀄리즘이라는 말이 한 누리꾼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용어라는 것이 밝혀졌다—까지 페미니즘에 엮인 젠더 이슈를 살펴보는 일은 오늘날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지표가 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문단 내 성폭력·위계폭력 가해(지목)자들이 변호사를 선임해 법적 대응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증거는 모든 것이 ‘합의하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지난해 나는 이런저런 자리에서 나의 개별적인 폭력의 경험을 고백한 바 있다. 그 피해 경험담 속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에게 나는 사과받은 바 없고 사과받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피해를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해를 목격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모든 일에 합의를 보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 모든 일에 여전히 합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 고백들이 그때도 지금도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와 이성애 중심 가족주의, 남성중심주의에 합의할 수 없다는 ‘폭로’이기를 바란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자신들의 피해를 고발한 이들 역시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합의된 관계’로 묶어내는 일은 또다른 명백한 가해이다. 나는 그 또다른 가해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명예훼손’에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즈음 문단 내 성폭력, 위계폭력 가해자로 지명된 모든 이들을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합의하여 명예훼손이라 단죄하고 싶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는 이른바 합의된 것들에 재차 질문을 요구하는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은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합의(정희진),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자위행위는 음란하다’는 합의(루인), ‘청소년은 성적으로 가능할 수 없다’는 합의(권김현영),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남혐’이라는 합의(류진희), ‘동성애 혐오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합의(한채윤)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 물음들을 축으로 양성평등이라는 말이 어떻게, 어쩌다 ‘저들 편에’ 서게 되었는지 연원을 되짚고, 양성평등이라는 말을 새로이 해제하며, ‘양성’에 속했을 때 주로 지정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게 되는 두드러진 차별과 그것이 얼마나 ‘일반적인’ 것인가를 드러내며, ‘양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의되었을 때 성차, 성정체성, 성적 지향 등에 의해 많은 이들이 ‘투명한’ 채로 차별에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재검토한다. 이때의 재검토란 구조적인 측면에서 발생하는 차별에 대한 분석이다. “양성평등 담론에 대한 비판은 남성/여성의 범주와 개념 자체의 허구성을 밝힘으로써 개인이 좀더 젠더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성차별에 대한 저항)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성적 소수자로 불리는 이들의 존재와 투쟁을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젠더 개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한다”(11면)는 정희진의 말(‘들어가는 글’)은 이 책이 가진 열망을 손쉽게 요약해 보여준다.
내가 특히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루인의 「음란과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와 권김현영의 「미성년자 의제강간, 무엇을 보호하는가」였다. 루인은 공공장소에서 음란행위를 한 어떤 남성의 성추문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그러한 음란행위가 “범죄로 인식된다고 해도 이성애-이원 젠더는 안전하다. 범죄 행위를 성도착/정신병리로 추방하며 이성애-이원 젠더는 법을 통해 안전한 섹슈얼리티-젠더로 보호받”(88면)는다고 진단하며 그러한 ‘이성애 보호’ 행위가 성적 타자를 어떻게 어딘가에 위치시키는지, 퀴어라는 ‘공공연한 행위’를 어떻게 젠더의 범위 밖으로 내모는지 질문한다. 아울러 권김현영은 최근 차츰 논의되고 있는 청소년의 사회적 시민권과 성적 시민권의 분리를 논의의 바탕에 두면서 미성년자 의제강간을 둘러싼 ‘연령’의 문제가 기존의 양성 패러다임 안에서 어떻게 여성에게만 불리함을 안겨주는지를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탐색한다. 글의 말미에서 필자는 “선거연령을 낮추고 최저임금을 시행하고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하는 식의 조정”(124면)이라는 ‘상상’을 통해 새로운 쟁점을 환기하는데, 이는 “여성주의는 남성과 대립하고, 남성을 대체하고, 남성에 대항하는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제안하는”(12면) 정체성(사유)이자 삶을 관통하는 실천양식이며 권력을 질문하는 방법의 여정이라는 이 책의 호소를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합의되지 않은 것들을 상상해보자는 것. 이후의 삶이란 그런 상상에서부터 생겨난다는 것.
여담이지만 나는 같은 출판사에서 십여년 전에 나온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2005)을 읽으며 페미니즘에 ‘재미’를 붙인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는 그때 그 논의의 중심에 있던 양성평등의 실체를 분석하며 그들로부터 ‘잃어버린 말’을 폐기하고 새로운 말의 쓰임을 고심한다. 그 논의의 가운데에 젠더 퀴어 담론이 들어선 것 역시 의미심장한 변화이다. 여성주의란 과연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에 수록되었습니다.
김현 / 페미라이터, 시인
2017.3.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