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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3년, 거대한 변화는 시작되었다

박래군

박래군

지난 3년,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그 시간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유가족들은 시계가 2014년 4월 16일로 멈췄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리고 매일 매일을 몇번째 4월 16일이라고 기억한다. 그러니까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도착한 지난 3월 31일 금요일은 1073번째 4월 16일이었고, 3주기 기억식이 열렸던 지난 4월 16일은 1091번째 4월 16일이었다.

 

3년의 시간, 1천일이 넘는 시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수장되어갈 때 국가를 믿고 의지했었던 ‘바보 엄마 아빠’들은 가만히 있으면 국가가 진실을 규명해주지도, 책임자를 처벌하지도 않을 것이고, 나아가서 안전한 사회도 만들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서는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들의 희생이 헛되게 될 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3년의 시간을 거리에서 살았다. 노숙농성, 행진 같은 시민사회활동가들이 하는 그런 행동을 밥 먹듯이 해왔다. 광화문 세월호광장과 안산 합동분향소를 당번을 정해서 지키고 있고, 팽목항과 동거차도에까지 순번을 정해서 지켜왔다. 그런 힘이 있어서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가만히 있지 않았던 3년

 

박근혜정권에 세월호참사는 두고두고 골칫거리였다.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만이 문제가 아니라 세월호참사 이후 구조하지도 않았고, 수습에도 소극적이었던 정부는 지속적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을 진압하려고만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진실을 원했던 유가족들을 자식의 시체를 팔아서 돈 더 받으려고 하는 시체장사로 매도했다. 진실은 가장 두려운 것이었으므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문화예술인들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탄압했다.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서 극우단체들을 청와대가 나서서 지원하면서 유가족들을 공격하게 했다. 세월호참사특별진상조사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박근혜정부가 얼마나 집요하게 사건을 덮으려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월호 인양도 마지못해 결정은 해놓고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야 본격적인 인양을 했다. 1년 6개월 동안이나 잘못된 인양공법으로 시간만 까먹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탄핵되니 세월호가 올라왔다고 말한다. 만약 대통령이 탄핵되지 않았다면 세월호가 인양되었을까?

 

대형 인명피해를 낳았던 참사 때마다 역대 정부는 매번 똑같은 대응을 고집했다. 진실은 서둘러서 덮고, 책임자들은 말단만 처벌하는 것으로 끝내고,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들에게는 돈으로 보상을 해서 적당히 무마한다. 단 한번도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수많은 참사 뒤에 언론이 앞장서서 이제는 그만하자고 했고, 경제를 살려야 한다면서 덮자고 나섰다. 그러면 정말로 세상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잊어버렸다. 유가족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피해자를 이간질시키고, 분열시키고, 회유하기에는 능했고, 그들을 고립시키는 데는 발 빨랐다. 어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가?

 

대형 해상참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70년의 남영호 사건으로 3백 수십명(이 사건으로 사망한 이들의 수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넘는 승객이 남해 바다에 수장되었을 때도, 1993년 292명이 수장된 서해 훼리호 사건 때도 그랬다. 세월호참사가 났던 그해, 2014년 12월에 참치잡이배 보령호가 러시아 서베링호에서 침몰하여 52명이 실종되었을 때도 국가는 잔인하게 사건을 서둘러서 덮는 데 성공했다. 어떤 배도 인양하지 않았고, 진상규명도 없었고, 책임자 처벌도 미미했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은 정부의 대응을 우리는 다른 참사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변화의 흐름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움직임은 느슨해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세월호 인양에 소극적이었던 정부가 되레 국민들에 의해서 탄핵되었고, 최고 권력자는 구속되어 수감되기에 이르렀지 않은가. 9명의 미수습자를 수습하고, 선체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져서 활동하고 있고, 국회는 2기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기 위한 법안을 올해 안에 다시 제정하려고 하고 있다. 아마도 새 정부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월호 유가족들의 쉼 없는 활동은 시민들을 자극했다. 돈과 이윤, 경쟁 제일주의가 생명과 안전을 뒷전으로 미루면서 이 세상은 지독한 야만사회가 되었음을 비로소 눈뜨게 된 시민들은 유가족과 함께 울었고, 아파했고, 다짐했고, 그리고 행동했다. 노란 리본을 만들어 나눠주고, 서명을 하고, 피켓을 들고…… 기억을 위한 일에 내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시민들이 3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이런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움직임이 지난겨울의 퇴진국면을 만들어냈다. 유가족과 연결되는 국내외의 네트워크는 갈수록 넓어지고 다양해지고 강화되고 있음을 매년 확인한다. 그래서 이 운동(416운동)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이 운동은 ‘위험사회를 넘어 생명존중, 인간존엄 사회로’ 가는 안전사회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기억공간을 만들기 위한 일도, 그 공간을 운영하면서 생명존중의 가치를 확산하기 위한 416재단을 만드는 일도 순탄치 않을 것이다.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3년의 시간을 통해 확인하는 바와 같이 거대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움직임이 부패한 권력을 응징했듯이 이 변화의 흐름이 결국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416운동은 세월호참사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박래군 / 4‧16연대 공동대표, 인권재단 사람 소장

2017.4.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