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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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드니 디드로 외 엮음 『백과전서 도판집』

겸손하게 쌓아올린 자신감의 탑
―드니 디드로 외 엮음 『백과전서 도판집』(전5권), 프로파간다 2017

 

 

pioop서울대도서관이 국내 최초로 『백과전서』 (Encyclopedie, 1751~72) 초판 원본의 전질을 구매하여 기념전까지 연 것이 불과 2010년의 일이었다. 전질의 번역은 아직 요원해 보이지만, 이번에 이렇게 도판집(정은주 옮김)이 누구나 구할 수 있게(물론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야 하지만) 발간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라는 점도 이채롭다.

 

계몽주의 또는 계몽적 같은 말들은 한동안 죽은 개 취급을 받다시피 했다. 1990년대 중반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면서, 역사가 특정한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이미 그 한계를 드러냈고 특히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계몽주의의 이상은 오만일 뿐이라는 강력한 주장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계몽사상가들은 실현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내달려 가는 돈끼호떼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여기에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논쟁과 같은 당시 한국사회의 독특한 맥락이 더해지면서 계몽주의라는 말은 점점 부정적인 색깔을 띠게 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의 목표가 원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당시 (서양의)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새로 정리하고 거기에서 신화나 종교의 그림자를 걷어내고자 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합리성이 그들이 바랐던 것처럼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지역이라는 틀 안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이상은 사실 완전하게 충족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백과전서』의 기술에 대한 접근

 

그러나 그들이 그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택한 전략은 대단히 견실한 것이었다. 디드로(Denis Diderot) 등은 세계의 지식을 수집하고 분류하면서 인문학(역사, 철학, 문학)과 과학뿐 아니라 당시까지 지식인들이 눈길을 주지 않았던 기술과 공예도 포함하였다. 그들은 장인과 직공들의 공방, 그 안에서 작업하는 모습, 그들이 쓰는 도구 하나하나까지 기록하고, 분류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각각의 기술에 대한 항목마다 그 기술에 필요한 재료, 그것으로 만드는 최종 산물과 그것을 만드는 방법, 필요한 도구와 기계에 대한 설명, 작업자가 실제 작업을 하는 방법, 고유한 용어에 대한 설명 등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디드로가 직접 공장을 방문하고 장인을 만나가면서 작성한 것이다. 『백과전서』가 인문학과 자연사에 치중한 당시까지의 다른 백과사전과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백과전서』는 장인이나 직공이 볼 만한 책도 아니었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책도 아니었다. 실제 기술을 익히려면 글이나 도판에 묘사된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어림없고, 실제 공방의 작업을 통해서 암묵적 지식을 손과 몸으로 익혀야 한다. 그리고 본문 17권과 도판 11권에 이르는 거질의 값비싼 책을 장인들이 사 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즉 『백과전서』에 소개된 기술들은 그것을 썼던 디드로와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다. 여기 소개된 도판을 매뉴얼 삼아 물건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이 도판을 본 지식인이나 부유한 이들이 자극을 받아 기술의 가치를 깨닫고 공장을 짓거나 기술을 후원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디드로가 기술의 가치에 주목한 것은 이처럼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지식이 인류 진보의 원천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홍성욱이 해제에서 인용했듯, 디드로에게 『백과전서』의 임무는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지식을 모으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식의 일반 체계를 상술해주면, 우리 이후에 오는 세대에게 이 지식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과거의 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대에 넘겨주는 것이 다음 세대가 “우리보다 더 잘 교육받아 더 고결하고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것이 계몽주의의 믿음이었다. 오늘날의 우리도 여러 측면에서 이런 역사관을 비판하거나 보완하고자 하지만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인류 공통의 자산 가운데 기술은 18세기 중반이 되면 무시할 수 없는 위치로 올라섰고, 그 위치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어쩌면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상상하지 못했을 수준까지 높아지게 되었다.

 

자신있게 미래를 맞을 만한 겸손함이 있는가

 

이렇게 지체 높은 지식인이 장인의 공방을 찾아 그들의 도구와 기예를 꼼꼼하게 취재하고 기록하는 모습은, 계몽주의자들에게 흔히(당대에나 “탈근대”의 담론이 난무하는 지금에나) 붙는 “오만하다”는 딱지와는 결이 다소 달라 보인다.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인류의 진보를 위해 기존의 위계에 얽매이지 않고 겸손하게 사실을 기록하는 방향을 추구했다.

 

이 또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전략이기는 하지만, 이 전략의 효과도 컸다. 도판집에는 농업, 해부학, 건축, 금속 가공, 화학 기술, 군사 기술, 저울, 섬유 기술, 문장, 음식료품, 마차와 마구, 가죽 기술, 생활용품 제조, 음악, 수예, 세계의 문자와 인쇄 및 제책, 목재 기술, 풍속, 미술, 요업 기술, 시계 제조,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지리학과 지도학, 동물, 식물, 지질, 취미와 운동경기, 어업, 의복 제조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당시의 프랑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실려 있다. 그림으로 제시되는 물질세계의 견고함은 화려한 언변을 무색하게 한다. 기술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가, 산업을 왜 진흥해야 하는가 따위의 백마디 웅변보다도, 철사를 늘이는 데 쓰는 수십가지 공구들의 정밀 도판이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견고한 현실에 발을 디디고 겸손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자신있게 계몽주의의 교의를 전파할 수 있었다.

 

요컨대 기술과 같은 대상에 대해 논할 때는 겸손하게 사실만 나열하는 것이 가장 강한 논변이 되기도 한다. 물론 무엇이 “사실”인지 재단하는 데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고, 실제로 계몽주의자들이 들었던 오만하다는 비판의 근원이 여기에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과전서』에서 묘사한 기술의 실상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윤경희가 해제에서 인용한 괴테의 말을 빌리면, 『백과전서』의 직조 관련 부분을 보고 나면 “거대한 공장에서 무수히 움직이는 실감개와 직조기 사이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고작 한 폭의 옷감을 제조하는 데 이 모든 게 소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몸에 걸친 윗도리에조차 진절머리가” 났다고 한다. 완성된 물건들에 둘러싸여 그 존재를 당연히 여기며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진절머리”를 되살려 주는 것이 『백과전서』의 도판들이 지닌 힘이었다.

 

이렇게 물질세계가 보여주는 견고함, 또는 물질성은 오늘날에도 음미해볼 만한 미덕이다. 아니, 어쩌면 오늘날에 더욱 중요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현대의 과학기술이 “굴뚝”을 벗어나 정보통신의 “깨끗한” 세계로 넘어갔다고들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위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인가? 대국실에 앉아서 알파고의 지시를 받아 바둑돌을 올리는 사람밖에는 기억에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알파고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큰 공간을 차지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얼마나 많은 전기를 소모하며, 그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얼마나 복잡한 전력공급체계를 구비하고 있으며, 그 하드웨어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굴뚝산업”의 도움을 받는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보는 정보통신기술은 물질성을 지워낸 깔끔하고 하얀 모습이지만, 2010년대의 정보통신기술도 반도체 공장에서 유기용매에 노출되는 노동자와, 1그램이 될까 말까 하는 금을 회수하기 위해 폐기된 전자회로 기판을 안전장비도 없이 녹이는 이들이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도처에서 들려오는 “미래 첨단산업”이니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구호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괴테가 느꼈던 그 “진절머리”를 되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상의 의미와 전망에 대한 복잡한 논쟁보다도 현상 그 자체의 견고한 물질성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인문학과 과학기술을 편 갈라 비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과의 연결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인문학은 인간을 둘러싼 물적 조건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않을 수 없고, 건전한 자연과학은 그것을 영위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태호 /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2017.4.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