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도르프만의 경계 넘기와 한국문학

유희석 | 전남대 교수


근래 우리 비평담론에서 주요 화제는 카라따니 코오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이 아닌가 싶다. 문학시장이 침체되면서 종언론이 뜨는 것도 희망의 어떤 역설적 징표일 수 있겠지만, 한국문학의 '보람'과 '종언'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다그치는 논객도 눈에 띈다. 종언론에 대한 섣부른 찬반보다 문학 자체에 대한 좀더 진중한 성찰과 더불어 한국문학이 당면한 문제들을 직시해야 하는 싯점이다.


때마침 신시뮤지컬시어터의 의뢰를 받아 고(故) 차범석의 희곡 〈산불〉을 대형 뮤지컬 〈댄싱 섀도우〉로 재창조한 아리엘 도르프만이 한국을 다녀갔다. 〈댄싱 섀도우〉는 몇몇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급조된 뮤지컬로선 도달할 수 없는 웅장한 감동과 매혹적인 순간도 분명 제공하였다"는 언론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희곡선집 《죽음과 소녀》도 최근에 번역되어 나왔다. 종언론을 '종식'시키고 한국문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는 데도 미국에서 활동하는 도르프만의 예술관과 창작적 실험만큼 신선한 자극은 드물 듯하다. 《죽음과 소녀》의 출간을 기념하여 마련된 한 조촐한 모임에서 귀동냥한 그의 강연 요지 중 일부를 여기서 소개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자본의 틈새를 창작의 자유 공간으로


세번째 방한으로 우리 독자와 관객에게 한층 친숙해진 도르프만은 소설가이자 시인이고 문화비평가인 동시에 극작가다.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에 섬세하게 기술되어 있듯이 칠레 아옌데 정부의 마지막 날 동지의 죽음이 새로운 삶을 안겨준 그의 파란만장한 역정도 한편의 드라마를 방불한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잡종 체질'의 소유자로서 이번에는 뮤지컬에도 손댔으니 전천후 창작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셈이다. 하지만 곱새겨야 하는 것이 그의 월경(越境) 행보 자체는 아니다. 자본의 틈새에서 비어져 나오는 민중의 창조적 활력을 흡수하여 자유와 희망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런 공간을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전유하는 도르프만의 문학적 감각과 상상력을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상업주의로 오염된 대중문화로 인해 일본의 본격문학이 고사되었다면서 남의 나라 문학까지 망조가 들었다고 과장하는 카라따니의--그에게 부화뇌동하는 이곳 비평가들의--문제의식도 계고(戒告)로서는 취할 바가 아주 없지 않다. 그러나 고답적인 문학주의와 그 반동으로서의 문학 해체담론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추(醜)와 노쇠(老衰)를 비추는 거울상(像)에 불과한가는 수준높은 상당수 장․단편 소설 및 희곡 텍스트가 뒷받침하는 도르프만의 실험과 장르의 경계 넘기가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믿는다.


대중문화가 주입하는 상투적 위안과 낭만적 환상 및 그로 인한 사유능력의 거세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성찰하면서 안이한 극적 해결에 저항하는 그의 극작가로서의 성취도 그런 믿음의 근거 중 하나다. 강연에서 부각된 것은 애매성에 대한 집요한 문학적 모색과 창의적인 형식실험의 의의이다. 그가 물었듯이 그 모색의 과정에서 "정치적이지만 정치 팸플릿과는 다른 언어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대중적인 동시에 애매한 이야기들, 다수의 청중이 이해하지만 양식상의 실험이 담겨 있고 또 신비하지만 동시에 피부에 와 닿는 인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해낼 것인가?"(〈죽음과 소녀〉 작가 후기)


이에 대한 실마리는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집에 불났어》를 비롯한 도르프만의 다채로운 소설도 그런 물음에 대한 그 나름의 열정적인 탐구의 결과다. 요컨대 〈죽음과 소녀〉를 읽고 보는 독자․관객은 거기서 더 많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대중문화의 유혹적인 형식, 즉 써스펜스․스릴러나 탐정소설적 묘미를 느끼게 되지만, 다른 한편 그런 형식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차용하고 전복하여 상투적인 도식에 자족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의 진실 모색으로 바꾸는 작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대중문화를 활용한 실험: 스타벅스 컵 캠페인

그런데 과연 어느 선까지 대중문화와 살을 섞어야 그런 모색이 온전한 창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창작자에게도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있어야 하는가? '선'을 넘어서 작품을 낳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상업주의의 '사생아'로 타기해야 하는가? 도르프만은 강연에서 그 '교접'의 위험성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대중문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 과정에서 작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대중문화 활용의 최신 실험으로 스타벅스에서 파는 커피컵에 자기가 쓴 문구를 새기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올 9월부터 미국 매장에 깔릴 예정이라고 한다. "The Way I See It"이라는 제목 바로 옆에 일련번호 279가 커피컵에 찍혀 있으니 도르프만이 처음은 아닌 듯하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 시간에 댓가로 얼마 받았느냐는 어느 시인의 웃음 섞인 질문에 그는 커피컵 스무개를 받았노라고 답했다)


그런 실험에서 일단 환기할 점은 우리사회에서 소비주의 풍토와 연관된 '된장녀 논란'의 상징성을 미국의 스타벅스에 적용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이다. 도르프만의 실험이 이곳에서보다 미국시장에 더 들어맞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매장에서 팔릴 영어문구를 번역하면 이러하다.


"그대가 정말 두려워하는 적으로 스스로 변하는 것을 경계하라. 그렇게 변하는 건 간단하다. 그대에게 어떤 끔찍한 해악을 끼친 사람을 폭력적으로 후려치고 이 세상에서 내 고통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된다. 그 순간 그대는 그의 신체에 대해서보다 자기 자신의 상상력에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도르프만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사람들이 스타벅스의 커피를 마시며 이런 문구를 읽는다고 이라크의 내전이 당장 종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스타벅스에서 팔리는 한 그의 잠언도 여전히 자본의 그늘 아래 있으며 사람들이 이 문구를 읽는 것에 비례하여 스타벅스의 시장도 커질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커피맛을 음미하며 우연히 이 말의 뜻을 사려깊게 헤아려보는 사람도 있겠고 그러다가 도르프만이 역설하는 상상력을 통해 자기 삶을 새롭게 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희망에 대해 ‘꿈깨라’라고 반응할 사람도 틀림없이 있겠고 깰 꿈이라면 하루 빨리 정신차려야 하겠지만, 선과 악 저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적 분투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인간윤리의 창발적 발현을 지향하는--도르프만의 상상력마저 팔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문학적인 것의 가능성과 한반도


스타벅스 커피컵에 씌어질 그 문구가 갖는 대중적 파급력이 겨자씨보다 크기는 힘들 것이다. 그의 소설이나 희곡, 〈댄싱 섀도우〉같은 뮤지컬은 분명히 겨자씨보다는 큰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하리라 믿지만, 정작 더 보듬고 키워야 할 것은 도르프만적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문학적인 것'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의 실현이 기존 문학을 어떻게 헐고 새로 지을지는 예단할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것은 차범석의 문자텍스트 〈산불〉이 〈댄싱 섀도우〉의 공연으로 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도르프만의 상상력과 그의 작품이야말로 근대문학의 정통적 계승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은 어떤가. 종언론이야 원래가 '종언'을 통해서 자기 목숨을 연명하는 해묵은 담론이다. 그에 관한 한 오늘로 이월된 20세기 한국문학의 유산 자체가 종언론자들의 객기를 드러내주는 바 있다. 비록 지난 100년 한국문학이 넘치도록 풍요롭지는 못하지만 격동하는 한반도 상황에서 근대문학의 적통(嫡統)으로서의 세계문학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행운인 동시에 시련은 남한 반쪽만의 문학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미 도르프만도 한반도의 분단현실과 평화로서의 그 극복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희곡 〈경계선 너머〉(원제 "The Other Side", 《죽음과 소녀》에 수록)를 한국의 독자․관객에게 선물하지 않았는가. '북을 향하며 남을 바라보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모험과 도약이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 동시대 문학이 '경계선 너머'를 몸으로 상상하는 도르프만 같은 작가들과 좀더 적극적으로 세계문학적 연대를 구축하면서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기를 바란다.


2007.7.24 ⓒ 유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