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헬리콥터 맘과 대학평가
김항 /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유명한 장 보드리야르는 한국에서 다소 불행하고도 공정하지 못한 처우를 받은 사상가이다. 물론 본인이야 신경쓰지도 않겠지만 《사물의 체계》에서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거쳐 《시뮬라씨옹》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들이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신기루 같은 조류의 대표격으로 취급된 까닭에 진지한 사상적 고투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신자유주의랄까,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삼라만상을 포착하고 배열하고 가늠하는 주류의 시선을 보고 있자면 보드리야르의 '하이퍼 리얼'한 작품세계가 자꾸만 뇌리를 스쳐간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 체제를 과거와 미래, 기술과 마술, 물질과 환영 등의 대립물이 키치적으로 뒤죽박죽이 된 형국으로 그려내는데, '갑을관계'라는 근대적인 법률적 계약관계가 봉건적인 비법률적 관계에 다름 아닌 기묘한 '시간도착적 키치'나, '1%'의 욕망을 나머지 '99%'가 공유하여 승산 없는 파괴적 경쟁을 추동하는 전사회적인 욕망의 스펙터클 체제가 그런 키치적 자본주의를 상기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스펙과 힐링이 지배하는 한국사회
그렇기에 파괴적으로 '스펙' 경쟁에 올인하고 잠시 동안 이 경쟁을 잊게 해주는 프로포폴 같은 '힐링'에 집착하는 까닭도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갑을관계나 경쟁이 삶을 지배하는 한, 불투명한 미래와 불안하고 초조한 일상을 견디기 위해서는 더 나은 사회보다 더 나은 '나'를 꿈꾸는 편이 속편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죽음과 유혹으로 추동되는 자본주의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 2013년의 한국사회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생존을 위한 스펙 경쟁이 죽음과 종이 한장 차이이기에, 또한 마음을 쉬게 해주는 힐링이 다시 경쟁으로 되돌아가도록 추동하는 유혹에 다름 아니기에 그렇다.
이렇듯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모든 이들이 철봉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산다. 남들보다 먼저 떨어지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재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유일한 정언명령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한국사회의 정언명령을 충실히 반영하여 미래세대를 길러내는 장소이자 제도는 대학이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대학 모습을 떠올리면 현재의 대학은 모종의 존재의의를 상실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자면 한국의 대학은 꾸준하고 충실하게 스스로의 존재의의를 지켜왔다. 사회를 이끌 지식 엘리트가 필요했던 한국전쟁 이후 시기에는 엘리트 양성에 힘썼고, 고도경제성장기에는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갖춘 대규모의 화이트칼라를 배출했으며, 민주화가 요청됐을 때는 민주투사들을 양산하는 기개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트나 화이트칼라를 민주투사와 동일선상에 놓는 것을 괘씸하게 여기는 분들도 계실 줄 안다. 하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은 있지만, 여기서의 논점은 어디까지나 대학이 사회로부터 요구받는 존재의의를 크게 거스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재의 대학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대학이 학생들을 철봉에 매달리도록 강요하기에 그렇고, 대학 스스로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철봉에 매달림으로써 증명하려 하기에 그렇다. 즉 남보다 먼저 떨어지지 말라는 정언명령을 대학은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생존하라! 대학이 마주한 정언명령
이런 정언명령의 이행을 위해 현재 대학이 목숨을 걸고 올인하는 것이 바로 '평가'이다. 지금 대학은 평가에서 시작하여 평가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의 성적도, 정규/비정규 교원들의 처지도, 대학 자체의 명운도 '평가'에 달려 있다. 물론 학생들의 성적을 매기는 일은 대학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고, 철밥통처럼 지위를 보장받았던 정규 교원들을 여러 잣대를 통해 평가하는 것은 진일보한 일일 것이며, 여러 대학의 특성이나 장점을 평가를 통해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학을 관통하는 평가는 그런 평가가 아니다. 그것은 평가를 통해 구성원과 자신의 상태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성찰의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저 파괴적 경쟁에서 비롯된 획일화된 기준을 내면화함으로써 스스로의 자율적 성찰과 판단을 포기하는 타율성의 전면화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서울 시내의 한 유력 사립대학에서 전체 교수들을 상대로 메일을 보냈다. 메일의 내용인즉슨 영상자료를 활용한 강의 공개에 적극적으로 협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대학의 강의를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했을 때 비록 명분뿐일지라도 대학의 공공적 기여 같은 상투적 구절이 제일 먼저 등장할 것이라 예측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놀랍게도 그 메일에 적힌 협조 요청의 이유 중 으뜸이었던 것은 모 일간지의 대학평가 항목에 강의 공개가 주요 항목으로 추가되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현재 한국의 대학은 강의를 공개할지 안할지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능력도 상실한, 철저하게 타자의 욕망이나 시선에 충실한 타율적 집단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이 한국 대학의 유구한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결과라고 하면 과도한 진단일까? 한국의 대학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가치와 전망을 창출해내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젊음을 배출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대학을 보면 한국사회의 대학에 따라붙기 마련이었던 계몽과 공공적 기능이 오히려 매우 예외적인 존재의의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단독정부 수립 이래 남한의 대학은 언제나 국가와 시장의 요구에 충실할 것을 넘어서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미리 판단하여 제언하는 기능을 단 한순간도 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타율적 욕망에 목매지 않는 '배움'이란
이제 진보와 평등이 아닌 스펙과 힐링이 일상을 지배하는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키워드가 되어 버린 지금, 대학은 누구의 욕망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자기 욕망이 아닌 것은 확실한 저 '평가'를 내면화하여 충실히 그것에 스스로를 종속시킨다. 그래서 엄마가 수강신청까지 해준다는 요즘 학생들, 즉 '헬리콥터 맘'의 아이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교수들을 보면 민망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 교수들이 녹을 먹고 사는 대학이야말로 덩치 큰 헬리콥터 맘의 아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간지의 천박한 평가에 목매는 대학은 엄마의 정체 모를 욕망에 충실한 아이와 마찬가지로 타자의 욕망에 충실한 보드리야르적 자본주의의 키치적 인격에 다름 아닌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아이들과 대학들은 어떤 미래를 마음에 그리고 있는 것일까? 이 물음이 끔찍한 타율적 욕망의 사슬을 끊어내는 첫 걸음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미래의 모델을 그럴듯하게 구축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마음에 스스로의 손으로 무언가를 그려보는 일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대학이 학생들과 더불어 가꾸어 나가야 할 ‘배움’은 거창한 전문지식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과 손을 가진 존재임을 경험하는 이 자그마한 몸짓일 터이기에.
2013.5.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