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계속해보겠습니다’와 바틀비
황정은 장편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의 세 화자 중 하나인 ‘나나’는 이야기 중간중간에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예닐곱번 되풀이한다. 나는 최근 황정은론(「야만적인 나라의 황정은씨」, 『창작과비평』 2015년 봄호)을 쓰면서 이 말의 묘미를 헤아리다가 우연찮게도 멜빌(Herman Melville)의 작중 인물 바틀비가 되풀이하는 ‘안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나는 「필경사 바틀비」를 번역하면서 이 말의 역어로 ‘안하고 싶습니다’를 택했지만 바틀비의 거듭되는 거부가 가치판단이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안하렵니다’에 가깝다.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은 졸역 『필경사 바틀비』(창비 2010)에 따르고 면수만 표시한다]. ‘월가 이야기’(A Story of Wall-Street)라는 부제가 달린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1853)의 주인공은 그 특이한 어구를 약간의 변종을 곁들여 스무차례 가까이 반복한다.
시공을 넘어 함께 공명하는 작품
나나의 ‘계속해보겠습니다’와 바틀비의 ‘안하고 싶습니다’는 각각의 말이 나오는 시공간이 너무 다른데다 정반대의 삶의 태도를 함축하고 있어서 둘 사이를 관련짓는 것 자체가 어쩌면 엉뚱하달 수 있다. 나나의 말은 점점 망가져가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혼전에 임신한 한 여자가 용기를 내어 아이를 낳기로 하면서 스스로를 다짐하는 말이고, 바틀비의 말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확립되던 19세기 중엽 미국 월가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필경사(筆耕士)가 고용주의 모든 요청을 거절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 떨어진 소설 속의 두 말이 순식간에 마음으로 다가와 삶과 죽음, 지속과 멈춤의 감각을 고스란히 되살려놓은 것이다.
나나는 “나나입니다./말해보겠습니다”(86면)라고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중간중간 쉬었다가 “계속해보겠습니다”(100, 127, 137면) 혹은 “계속하겠습니다”(123면)라고 말문을 다시 열기 때문에 이 말은 처음에는 이야기를 계속해보겠다는 뜻으로 새겨진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 말이 이야기가 중간에 끊어지는 곳(143, 161면)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무엇’을 계속하겠다는 건지 살짝 애매해진다. 그뿐 아니라 소설의 마지막(228면)을 장식하고 책의 표제에까지 등장함으로써 이 말은 나나의 이야기에서 삶으로, 나나에게서 다른 화자들인 ‘소라’와 ‘나기’, 작가인 황정은에게로 계속 번져나가 마침내 소설 자체가 독자에게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른다.
한편 바틀비는 변호사의 필사본 대조 작업, 이런저런 심부름, 필사 자체 등에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거절의 뜻을 표하지만 비장한 저항의 태도는 아니다. 그가 “특유의 유순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 말을 할 때에 “불안, 분노, 초조, 혹은 불손의 빛”과 같은 “평범하고 인간적인 면모” 따위는 전혀 없었다(61면). 바틀비의 언행은 합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존재의 불가해성을 일깨워주면서 타자성의 신비를 빼어나게 구현한 인물로 다가온다. 체제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바틀비는 필사라는 모방 작업을 거부함으로써 창조적인 예술에 적대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비치거니와 고용주의 요청에 특이한 방식으로 대응함으로써 체제의 포섭력에서 벗어난 비범한 인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그런데 그가 거부한 것은 고용주의 요청뿐이 아니다. 구치소에서 음식을 거절해 죽음에 이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는 사실상 모든 삶의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죽음이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의 절대명령에 따른 순교인 것 같지도 않다. 그 이유는 수수께끼로 남지만 이로써 바틀비는 주어진 삶 자체를 인간적인 지평을 넘어서 집요하게 거부하는 존재라는 느낌을 준다. 바틀비의 존재와 말에 서려 있는 기운은 산송장같이 차갑고 집요한 의지이며, 멈춤과 죽음의 리듬인 것이다.
반면 나나의 ‘계속해보겠습니다’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생명활동의 지속과 유의미한 삶으로의 내뻗음을 내포하고 있다. 나나의 이야기에서, 아니 작품 전체에서 가장 주된 모티프는 나나의 뱃속에 있는 새 생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나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도 ‘계속해보기로’ 한다. 나나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리”(99면)는 어머니 애자를 요양원으로 보낸다. 또한 아이 아빠인 모세의 집에서 모세의 아버지가 사용하되 어머니가 비우는 요강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모세에 대해 “사랑스럽지만 더는 안되겠다”(146면)며 결별하기로 마음먹는다. 모세는 편부모 상태에서 “아이가 자라면서 받게 될 사회적 대미지”(158면)를 근거로 나나를 이기적이라 비난하지만 나나는 오히려 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모세와 헤어지기로 결단한다.
오래도록 기억될 ‘감염의 언어’
바틀비가 ‘안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자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 필경사 터키와 니퍼즈, 그리고 변호사까지도 ‘싶다’(prefer)라는 언어에 ‘감염’된다. 어찌된 일인지 이 말을 “딱히 적절하지 않은 온갖 경우에도 무심결에 사용하는 습성을 갖게”(77면) 된 것이다. 거부와 죽음의 리듬을 지닌 바틀비의 말은 ‘감염’의 언어인데, 그것은 온갖 ‘갑질’이 횡행하는 폭력적인 세상에서 ‘안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모세 그리고 모세의 가족과 관계맺는 일이 그러할 것이다.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끔찍하기도 한 애자와의 관계도 그렇다. 나나의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역시 감염의 언어이면서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에 감염됨을 의미한다. 가령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신체에서 모체로의 전환을”(124면) 느끼는 나나뿐 아니라 소 라와 나기도 점점 “쐐, 쐐, 쐐, 쐐, 쐐, 쐐, 쐐”(64면) 하고 “자그자그자그자그”(124면) 하는 새 생명의 힘찬 기운에 ‘감염’된다. 그들 역시 어느새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삶의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읊조리는 그들 각각의 삶의 언어에 마음이 동한 독자라면 자신도 계속해볼 의욕이 생기면서 ‘무엇을’ 계속해볼 건지를 스스로 생각해보게 된다. 나나의 말, 나아가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소설은 텍스트 속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 독자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동하는 물음이 되고 응답이 된다. 이를테면 세월호참사를 겪은 사람들끼리 ‘무엇을’ 계속해볼지를 묻고 교감을 나누는 행위가 된다. 나나의 ‘계속해보겠습니다’는 감염의 언어이자 ‘이심전심’의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삶에서 죽음을 떼어낼 수 없는 이상 우리는 바틀비의 말을 잊을 수 없지만, 나나의 말 역시 죽음을 직시하는 삶의 언어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한기욱 /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2015.3.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