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돌봄의 위기와 ‘사라진 여자’
‘출산지도’라는 해프닝
얼마 전 행정자치부가 어이없게도 출산지도라는 이름으로 ‘가임기 여성수’라는 항목을 만들어 셈한 일이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다. 아이들을 낳고 오래 보살피는 일, 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돕는 일 모두가 (힘들지 않을 수는 없을지언정) 행복하고 보람있어야 하며 또 긴밀히 이어진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삶이 (역시 힘들지 않을 수 없을지언정) 행복하고 보람있는가 하는 차원과 관련되어 있기에 여성만의 일일 수는 더더욱 없다. 그 전체 과정에서 출산만 달랑 떼어내어 장려하겠다는 발상도 문제인데다 여성을 가임 여부로 분류될 대상이자 표적으로 취급한 것은 비난을 사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유의 몹쓸 헛발질이 거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헛발질들이 그렇듯이 이 역시 문제가 실재하고 따라서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지만 정작 해야 할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는 데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일러주듯이 자본주의에는 공식 경제뿐 아니라 그것의 “비-경제적인 배경 조건들”, 다시 말해 공식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고 유지하는 자원 공급, 돌봄 제공, 상호작용 활동들”이 포함된다. ‘밥’으로 대표되는 온갖 신체적·정서적·사회적 양분을 섭취해야 ‘밥벌이’도 할 수 있다는 건 굳이 설명이 없어도 누구나 아는 일이다. 하다못해 인간의 생체가 곧장 배터리로 활용되는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에서도, 그러니까 인간이 그저 숨만 붙어 있으면 돌아가는 경제에서도 ‘매트릭스’라는 복잡한 가상사회가 필요하지 않았던가. 프레이저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적 생산이 이런 사회적 재생산 활동에 의존하는데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한편, 더 많은 이익이라는 지상명령에 따라 재생산 과정과 역량을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든다.(Nancy Fraser, “Contradictions of Capital and Care,” New Left Review 100, July Aug 2016) 젠가게임에서처럼 자신의 토대를 무너뜨리며 그저 위로만 쌓아가려는 충동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내재한 또 하나의 근본적인 위기인 것이다. 출산지도는 이 위기의 심각성은 인지하면서도, 위기를 제대로 해결하는 일, 다시 말해 재생산 혹은 돌봄 활동의 ‘구조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중요성을 합당하게 반영하는 사회구조를 만드는 노력은 안하려다 빚어진 또 한번의 해프닝이다.
스릴러가 된 돌봄의 위기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이언희 감독)는 아이의 실종을 중심으로 삼아 ‘자본과 돌봄 사이의 모순’이 곧장, 그리고 고스란히, 온 존재의 위기로 전화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혼소송 중인 워킹맘은 위자료 없이 아이와 먹고사느라 일에 허덕이다가 어느날 보모에게 아이가 납치되는 사건을 겪는다. 결혼이주자였던 보모는 학대 끝에 낳은 병든 딸이 치료도 못 받고 방치될 상황이 되자 집을 나가 성매매와 장기매매로 치료비를 구하지만 끝내 아이를 잃고 말았다. 아이의 실종 이전에 이미 두 사람은 어떤 악연으로 얽혀 있지만, 그 악연의 지극히 ‘사회적인’ 연원과 정황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결말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는 가해와 피해 구도를 넘은 일정한 교감이 생겨난다. 이 영화가 여성을 또다시 모성적 존재로 환원시킨다는 우려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성적 존재가 되라고 명령도 하고 또 그렇게 되지 못하게 억압도 하는 사회적 분열증을 드러내주는 쪽에 가깝다.
‘미씽’이라고 했지만 이 영화의 부제가 사라진 아이가 아니라 ‘사라진 여자’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사라진’ 여자는 무엇보다 결국 죽음을 택한 보모를 가리킨다. 폭력과 불의와 억압과 좌절을 처절하게 겪고 사력을 다해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으나 그녀는 어떤 지속가능한 자기표현의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스스로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실종되었던 아이를 다시 품에 안은 워킹맘은 어떨까? 그녀가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생각하면 그 또한 답답하기만 하다. 실종에 책임을 지고 양육권을 빼앗긴 채 아이의 삶에서 ‘사라지게’ 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더욱 철저한 모성의 실천을 스스로에게 부과한 채 다른 모든 사회적 삶에서 ‘사라지는’ 쪽으로 가진 않을까.
‘사라진 여자’들을 다시 만나게 되기를
지난해는 전례 없는 페미니즘적 (재)각성의 해로 기억될 만하다. 되짚어보면 여기에는 크건 작건 전부터 쌓여온 무수한 움직임이 작용했으며, 좀처럼 바뀌지 않다가 노골적으로 뒷걸음질 친 현실이 그 가장 강력한 배후세력일 것이다. 프레이저가 말한 대로 자본과 돌봄의 모순은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것이기에, 그 모순이 삶에 ‘초기설정’된 여성들의 목소리가 총체적 변혁을 요구하는 광장의 촛불에 ‘전령’이 된 것은 필연적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일차적으로 혐오와 차별과 폭력에 대한 분노이며 궁극적으로 떳떳하고 지속가능한 정치적 주체화의 모색인 이 운동을 통해 모든 ‘사라진 여자’들이 빠짐없이 발견되기를 상상해본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7.1.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