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우리는 미적 공화국의 시민들이다
2014년 3월 한국작가회의 문인복지위원장으로 있던 시절 겪은 일이다. 한국작가회의는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와 손잡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주관하는 ‘현장예술인 교육지원사업’ 공모에 참여했다.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의 처지를 감안해 그들이 문학교육자로서 자기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좋은 작가라고 해서 저절로 좋은 교육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문인협회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측에서도 제안 취지에 십분 공감하고 신청서에 직인을 날인했다. 면접 심의 때는 세 단체를 대표해 실무 책임자인 내가 사업 취지와 방법에 대해 성의껏 제안 설명을 했다. 얼굴을 아는 몇몇 심의위원들 또한 호의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그런데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면접 심의 이후 한달가량 지난 2014년 3월 27일 이 사업 자체를 폐지한다는 결정을 홈페이지에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민간 파트너와의 신뢰가 기본이어야 하는 정부기관으로서는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어불성설의 ‘행정폭력’이었다. 변경된 예산은 긴급복지지원사업을 통해 보다 어려운 사각지대 예술인들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라고 했지만, 실제 기금의 용처가 어떠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한국작가회의는 즉각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문체부에 항의했으나, 2014년 4·16 세월호참사 이후 이 사태는 점점 잊혀져갔다. 그러다 최근 언론보도와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블랙리스트 수사 과정에서 박근혜정부의 문화적 반달리즘의 어두운 실체적 진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는 이명박정부에 이어 박근혜정부에서도 블랙리스트 단체였고, 당시 선정된 10개 단체 가운데 진보 성향의 민예총 같은 단체가 여럿 포함되어 아예 사업 자체를 없앤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심증’은 있었지만, ‘확증’할 길이 없었던 블랙리스트 사태의 한 장면을 나는 직접 겪은 셈이다.
‘정신의 운동장’을 상실한 한국
해방 이후 예술과 예술가들을 대하는 ‘체제’의 시선이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 또한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엘리트를 자처하는 문체부 관료를 비롯해 문체부 산하기관의 매개 인력들은 ‘혼이 비정상’인 한 사람 위정자의 심기 경호를 위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조직적으로 ‘부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명박정부 시절 낙하산 사무처장의 출근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하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들이 박근혜정부에서 어떤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물론 개인의 양심 문제로만 환원할 수 없는 전면적 관료화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권력은 규칙과 절차의 얼굴을 하고, 당연한 듯이 복종을 요구한다”라고 한 말은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전면적 관료화 시대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지금의 블랙리스트 사태가 장기적 과제라는 것과, 왜 헌법적 가치로서의 문예적 ‘공공성’을 회복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지점이다.
청와대가 주도하고, 문체부를 비롯한 산하기관이 마치 인체의 실핏줄처럼 블랙리스트를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동안 문예적 공론장이 소멸해가고 있다. 블랙리스트 파문은 문예적 공론장에의 참여 자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문화와 예술을 압살하며 상상력의 빈곤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 문학연구자인 브라이언 보이드는 『이야기의 기원』에서 “예술작품은 정신의 운동장과 같다”고 말한다. 정신의 운동장을 상실한 나라가 추진하는 문화융성이 ‘먹고사니즘’과 다를 바 없는 ‘사카린 다큐멘터리’는 아니었는지 자문자답할 때다. 그리고 우리는 한 나라의 문화(예술)정책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특검의 블랙리스트 수사에 대해 광화문광장에서 ‘블랙텐트’를 치고 즐겁게 농성하는 현장 문화예술인들을 비롯해 대한민국 절대다수 국민이 지지하고 성원하는 것은 그런 이유와 무관할 수 없으리라.
정의와 상식을 세울 때
문화의 힘과 예술의 가치는 내 안의, 우리 안의 상투성을 부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술 혹은 예술가의 가장 큰 적은 ‘진부함’이다. 블랙리스트는 진부함 그 자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기조가 되어버린 듯한 블랙리스트 관리 같은 적폐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마음의 문화를 형성해온 것은 아닌가. 더이상 블랙리스트 문건 같은 반헌법적이고 반문화적인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 견고한 문화(행정)의 토양과 마음의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 오직 한 사람 박근혜라는 위정자를 위해 블랙리스트가 꼼꼼히 작성되고 철저히 ‘잡초 뽑기’를 시행해온 시기가 2014년 4·16 세월호참사 이후였다는 점은 이 정부의 반생명적인 파괴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진실은 우울하다. 그렇다, 추악한 진실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분명 우울하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과 마주하며 점점 무덤덤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게 된다. 그리고 당연한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이규철 특검보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한 말에서 진짜 ‘말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국가경제에 미치는 사안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바로 이 ‘말’이 점점 무뎌져가는 내 마음을 움직인다. 블랙리스트 사태 연루자들에 대한 엄한 법 집행을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런 연후에야 말의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그런 ‘상식의 나라’ 너머로의 일탈을 여전히 꿈꾸고 감행하겠지만. 그런 ‘잡초’들은 뽑히지 않는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그런 야생성을 간직한 잡초들의 싹수를 아예 트랙터로 없애려는 처사였다는 점에서 그 죄상이 가벼울 수 없다. 예술이라는 텃밭의 생명력은 다양성에 있다. 나를 포함해 블랙리스트 예술가들 누구도 박근혜정부의 ‘뮤즈’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우리는 미적 공화국의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고영직 / 문학평론가
2017.1.1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