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강의석의 경우
조광희 / 영화제작자
사람은 세계를 자신에게 적응시키려는 시도를 고수한다.
그래서 모든 진보는 비합리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
- 죠지 버나드 쇼
최진실씨의 애석한 죽음이 포털의 검색순위 1위를 차지할 때, 그 아래에는 건군기념 행진중인 전차를 알몸으로 가로막은 강의석의 소식이 있었다. 예상했듯이 그 시위 또는 공연은 뉴스에서 악플로, 찬반양론으로 번져갔다. 그는 고교시절 학내 종교수업을 거부하면서 알려진 이후 다양한 활동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아왔다. 개혁가와 언론노출이 지나친 사람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뒤따르는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넘어서 아예 '군대를 폐지하자'는 그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001년 임종인 전 의원이 후배변호사인 내게 '여호와의 증인'들의 병역거부사건을 함께 변론하자고 했을 때 처음에는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양심과 종교 때문에 군대를 안 가겠다면 군대는 누가 가고, 나라는 누가 지키나"라는 소박한 생각을 했을 뿐이다. 당시에는 여론도 그러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활동가들을 통해 이유와 배경을 알게 되면서 내 생각은 바뀌었다. 군사법원에서 열린 첫 재판 때 판사가 피고인에게 물었다. "지금은 전쟁중이 아니라서 적군을 죽이지 않고 군사훈련만 하면 되는데 굳이 훈련까지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에 대한 스무살 남짓한 피고인의 답변은 남달랐다. "여러분 같으면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까? 군사훈련은 제게 그런 것입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양심적 병역거부'가 어떤 사람에게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선택이자 가장 절박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채 논리만을 이해하고 변호인으로 나선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대체복무제는 실시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주장은 더이상 황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강의석은 왜 테헤란로에 나섰나
강의석의 주장은 어떠한가? '군대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결국 수용될 수 있을 것인가? '군대 없는 세상'의 정치적 기반은 세계공화국이다. 세계공화국은 역사상 가장 논리적인 사람 중의 한명인 칸트의 이념이었고,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이 유럽연합처럼 지역블록화되고 그 지역블록들과 블록화되지 않는 대국들이 세계공화국의 수립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할 때 '군대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아마도 실제적인 정치적 기반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가 정착되기까지 두자릿수 단위의 세월이 필요하다면 군대폐지는 세자릿수 단위의 세월이 필요한 문제다. 강의석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비현실적이라고 비논리적인가? 과연 현실적인 것은 무엇이고, 논리적인 것은 무엇인가?
세계를 휩쓸었던 68운동 당시, 대개 엄숙하고 비장하기만 한 다른 운동들의 구호와 달리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상상력에 권력을' 같은 색다른 구호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사랑을 해라, 전쟁을 하지 말고'(Make Love, Not War)지만, 미묘한 느낌 때문에 잊히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는 구호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양키 고 홈'이나 '독재 타도' 등은 익숙하고, 촛불집회의 "미친 소 너나 드세요" 같은 재기발랄한 구호도 감이 온다. 그런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는 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한껏 요구하여 상대방을 질리게 한 다음 현실적인 것을 얻어내자는 고도의 협상전략인가? 아니면 몽상가들의 넋두리인가? 강의석의 '군대를 폐지하자'는 요구를 들었을 때 나는 68운동의 이 구호를 떠올렸다. 그는 현재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존 레넌은 <이매진>(Imagine)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국경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서로 죽이지도 않고 무엇을 위해 죽을 일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에 공감한다. 그런데 그런 가사가 실제의 주장으로서 현실세계로 침입하는 순간 왜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되는가? 왜 어떤 주장은 여흥으로만, 예술로만 즐겨야 하고 실제로 주장하면 안되는가? 존 레넌의 상상은 엄격히 말한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인류가 합의한다면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은 지금 바로 이루어질 수 있다.
군대 폐지, 불가능하지만 논리적인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합의하지 못하는 것도 역사나 사회의 법칙이다. 하지만 그 법칙은 절대적 법칙은 아니다. '군대 폐지'를 요구하는 것이 비현실적일지는 몰라도, 인류를 위해 그토록 절실하고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논리적이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일지 몰라도 비논리적이다. 본래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알몸으로 전차를 막아서는 것보다 더 수상한 일이다. 그런데 왜 앞의 살인은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뒤의 행위는 당혹스럽다고 여겨지는가? 미국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라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은 것은 비록 격렬한 비난을 받기는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로 용인된다. 왜 우리는 가장 악몽 같은 일을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일까? 나라와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이성적이며, 그런 일이 벌어지는 끔찍한 세계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습관 때문이다.
군대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을 실제적인 정치적 의제로 주장하는 사람이 극소수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다수가 되는 순간 그 주장은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주장이 된다. 문제는 소수를 어떻게 다수로 변화시키느냐이며, 강의석은 논란과 비웃음을 무릅쓰고 자신이 앞장서겠다고 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공정하게 생각해보았을 때 강의석은 적어도 주장하는 내용 자체로는 매우 이성적이며, 지나치게 이성적이어서 도리어 이상하게 보일 따름이다.
그런데 강의석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었을까? 그의 주장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형식 때문에 정치적 요구라기보다는 예술적 발언이 되었다. 그의 몸짓은 시위가 아니라 공연이 되었고, 요구가 아니라 예언이 되었다. 기존 씨스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장 급진적인 주장이 반드시 가장 아픈 것은 아니다. 심지어 맥락이 모호한 급진적인 주장은 해프닝이 된다. 지금 그를 쫓는 매체들은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선정성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더이상 기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그를 그가 섰던 테헤란로의 차가운 아스팔트에 그의 주장과 함께 내동댕이칠 것이다. 내 생각에 강의석은 매체에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이 자신의 원칙을 실현하는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 매체의 노예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간혹 매우 가깝다. 나는 그가 매체조차 자신이 균열을 내고자 하는 견고한 매트릭스의 한 부분이라는 것, 자기 자신조차 매트릭스의 한 부분으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라깡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예술에서 악명 높은 '쎈세이션' 전시 스타일의 도발이야말로 규범이며, 예술이 규범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장 크게 위반하는 것이 바로 그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에 대하여 강의석이 들어본 적 있을까? 전차 앞에 선 그의 알몸이야말로 폭력 위에 구축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불안한 이데올로기를 보완해주는 알리바이로서 역설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 그렇게 소비되기에는 강의석이 너무 아깝지 아니한가?
2008.10.15 ⓒ 조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