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김대중: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를 넘어선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다. 너무 많은 찬미와 너무 많은 증오의 대상이던 그가 떠났다. 그래서인지 그를 보내는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찬미도 증오도 눅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그 이름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얼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그를 한국 민주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민주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우리 삶 전반과 여타 의제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돌아보는 것이 그의 의미를 밝히는 길일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할 하나의 틀을 정치학자 박명림으로부터 빌려오고 싶다. 그는 작년에 발표한 〈박정희와 김일성: 한국적 근대화의 두가지 길〉이라는 흥미로운 논문에서, 1945년 이후 한반도 주민의 삶을 규정한 핵심의제를 국가건설·산업화·민주화로 규정하고, 이런 의제들이 각각 '이승만 대 김일성', '박정희 대 김일성', '박정희 대 김대중'이라는 세가지 대립구도의 조합에 의해 대표될 수 있다고 파악했다. 우리가 지금 김대중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세가지 의제와 역사적 대립구도 속에 그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김대중의 자리
먼저 생각할 점은 국가건설·산업화·민주화의 관계, 그리고 세가지 의제를 둘러싼 역사적 대립구도의 상대적 위상에 대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박정희 대 김대중'의 구도는 다른 두가지 대립구도와 병렬적인 것이 아니다. 국가건립과 관련해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각각 대안적인 길을 추구했다. 산업화와 관련해서도 박정희와 김일성은 각각 대안적인 경로를 선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가지 대립은 둘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 것과 그 역사적 귀결의 문제이다.
하지만 박정희와 김대중은 서로 대안적인 길을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 부정과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대립이 있을 뿐이며, 이 역사적 대결에는 승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실현되어야 할 가치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의제들의 관계 면에서도 민주화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수립이 어떤 국가수립이어야 하고, 산업화가 어떤 산업화여야 하는가를 내재적 가치에 입각해서 규정하고 향도할 수 있는 것이 민주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천사가 수호자를 자임할 쪽은 민주화라는 과제를 떠메고 간 김대중이며, 이는 4·19혁명과 6·10항쟁 그리고 촛불항쟁으로 대변되는 국민적 의지와 일치하는 길이었다.
민주화의 과제를 떠메고 간 정치인
오늘날 우리사회가 박정희로부터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는 논란거리이다. 용산참사, 미디어법 날치기, 쌍용차사태를 비롯한 숱한 사례에서 MB정부가 보인 행태나 공론장을 횡행하는 "좌빨"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이 그 거리는 지극히 가까워 보이기조차 한다. 어려운 살림살이가 낳은 퇴행적 심리의 여파로 박정희에 대한 숭배 또한 여전하다. 하지만 박정희 업적은 김대중 앞에서 두가지 이유에서 빛이 바랜다.
박정희의 산업화 업적은 그 자신의 지도력의 몫을 분명히 가진다. 하지만 그것은 두가지 요인에 크게 빚지고 있다. 하나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이다. 박정희가 주도한 남한의 산업화가 성공적일 수 있었고 또 북조선에 대해 우위를 가졌던 이유는, 그에게 하나의 조건으로 주어진 미국 헤게모니 체제로의 편입에 기댄 바가 크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한은 미국 헤게모니 체제하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도 냉전의 최전선이라는 위치 때문에 상당한 수혜를 입을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박정희체제가 밑으로부터의 도전과 민주화 요구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박정희 자신에게는 그것이 매우 고통스러웠겠지만 결과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강력한 도전이야말로 박정희체제가 더 나은 통치를 지향하도록 압박하는 요인이었으며, 체제의 결정적 실수를 방지하고 교정하는 효과를 가졌다.
우리가 덜 부끄러운 나라에 사는 이유
이 두가지 요인과 관련해서 김대중은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박정희체제가 김일성체제에 대해 우위를 가질 수 있게 한 바로 그 민주화와 아래에서부터의 도전의 대변자이자 주역이었다. 하나의 체제로서 박정희체제가 가진 생명력은 바로 김대중에게 크게 빚진 것이다. 다른 한편 김대중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 모두를 제약한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 조건에 순응했다. 하지만 김대중이 추구한 민주화와 인권은 역사적 조건의 속박을 극복하는 보편적 이상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었다.
이 보편적 이상의 힘은 심대한 것이다. 그 이상, 그리고 그 이상에 접근하려는 노력 때문에 우리가 덜 부끄러운 나라에 살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파들은 입만 떼면 북조선을 인권과 민주주의가 없는 미개 국가라고 조롱한다. 그렇게 상대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우파들이 자신을 인권과 민주주의가 있는 나라에 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인데, 김대중이 없었다면 그들은 북조선을 조롱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그렇게 우리의 현재를 만든 사람이거니와, 미래에 대해서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세가지 의제와 김대중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김대중은 민주화라는 의제를 떠메고 갔다. 그런 그가 없었다면 남한은 극우 반공국가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김대중은 극단적인 반공극우 사회에서 조봉암보다 조금 더 오른쪽에 정치적 위치를 설정했고 엄청난 탄압 속에서도 그 자리를 완강히 고수함으로써 남한을 민주공화국으로 이끌었다. 그 민주공화국은 여전히 보수적이긴 하다. 하지만 민주화는 종결될 수 없는,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야 할 과제이며, 김대중은 더 많은 민주화와 더 깊은 민주화로 가는 문을 열었다.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분단체제 극복의 길
산업화와 관련해서 김대중은 냉전하의 산업화가 체제의 동맥경화로 이어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산업화의 성공에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냉전하의 산업화라는 모델이 종결된 다음, 지구화된 개방경제하에서 경제발전의 지속을 실험한 첫 대통령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많은 논란이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양극화의 위기는 김대중 대통령과 뒤이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의 유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비상한 위기의 시기에 더 나쁠 수 있는 것을 덜 나쁘게 하기 위해서 진력했으며, 개방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조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좁게 열린 길 속에서 추구했다. 여전히 좁은 길인 이 과제에 대해 정교한 정치적·정책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김대중이 우리에게 부탁하는 바일 것이다.
국가건설이라는 의제 또한 김대중과 무관하지 않다. 해방후 국가건설기에 그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연배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승만과 김일성의 대결구도는 분단체제라는 질곡을 남겼고, 이는 국가건설을 종결되지 않은 과제로 만들었다. 그는 정치인으로 입문한 이래 이 문제에 대해 줄곧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와는 다른 대안을 추구했다. 그리고 집권기에는 분단체제의 질곡을 넘어서기 위해 커다란 걸음을 내디뎠다. 그 성과가 지금 후퇴한 면이 많지만, 그의 구상은 여전히 한반도에 더 나은 정치공동체를 건설할 유일하게 가능한 길의 지도로 우리 앞에 남아 있다.
그런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 모두를 넘어서는 면모를 지닌 그가 떠났다. 그의 떠나감이 장엄한 일몰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현재가 그가 성취한 지점에서 후퇴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향년 85세의 서거가 조금은 때이르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며, 그의 유지(遺志)가 우리가 향할 별빛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대연합이라는 구체적 지침이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민주당이 통합의 중심에 설 것과 진보개혁진영의 최대 분파로서 양보의 자세를 가질 것을 주문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적게 했던 그 양보를 민주당에 부탁했는데, 그
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고수했던 정치적 위치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곳까지 우리사회가 나아가길 당부한 것이다.
2009.8.26 ⓒ 김종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