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하라 다케시 『다키야마 코뮌 1974』
꼬뮌의 추억
―하라 다케시 『다키야마 코뮌 1974』, 이매진 2017
‘사회주의 혁명전사’를 키워내는 교육?
얼마 전 열린 김상곤 교육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는 오랜만에 과격한 ‘사상검증’이 펼쳐졌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자본의 족쇄를 거부하고 사회주의를 상상하자”는 김상곤 후보의 예전 발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며 전희경 의원은 “문재인정부가 김상곤 후보자를 중심으로 교육부를 사회주의 혁명 교육기관으로 만들고, 우리 아이들을 사회주의 혁명전사로 키워내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며 노골적인 언사를 동원했다. 이 과격한 ‘사상검증’은 김상곤 개인의 흠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기보다 그가 내정된 자리가 학교와 교육 정책을 담당하는 자리라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김상곤에게 집중포화를 가한 이들은 학교가 계급적 지배에 의해 확립된 질서와 규범을 주체의 신체와 정신에 아로새기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것을, 하여 학교와 교육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민 양성의 장(場)이 아니라 치열한 이데올로기 쟁투가 벌어지는 전투의 장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전사’가 양산될 수 있다는 ‘우파’들의 편집증적 공포와는 다르게 현재 한국사회에서 교육개혁을 둘러싼 진보적 담론은 점차 그 정치성이 약화되고 있다. 가령 출범 당시 전교조는 스스로를 계급적 질서를 공고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길 그치고 ‘참교육의 함성으로’ ‘민주화와 통일을 실천하는 민주시민의 양성’을 외쳤지만 현재 일선 학교에서 이같은 목적의식에 입각한 집합적인 교육실천의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한국교육의 과제는 주로 ‘공교육 정상화’나 ‘계층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교육이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희망의 전언’은 사실 현존하는 질서의 부드러운 재생산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체제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진보의 탈정치화’라고 할 수 있을 이런 현상은 물론 점점 수세에 몰려온 진보세력의 곤경을 대변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타끼야마 꼬뮌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한국의 진보세력들이 한때 목표로 했던 그 ‘참교육’ 혹은 ‘인간화 교육’이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실제 그와 같은 원칙에 입각해 운영된 학교의 모습은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역사적 실례(實例)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성취되지 못한 지향이자 이념으로만 우리 곁에 존재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정치사상 연구자인 하라 타께시(原武史)의 『다키야마 코뮌 1974: 민주적 집단 교육 공동체는 어떻게 개인을 억압하는 권력이 됐나』(조승미 옮김)는 우리에게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책에서 추억하는 ‘타끼야마(瀧山) 꼬뮌의 모델’이야말로 한국의 진보세력 역시 동시에 꿈꾸었던 교육현장에 방불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 책은 ‘정치의 계절’과 ‘사생활주의’ 사이의 경쟁이 ‘사생활주의’의 승리로 끝났다는 일본 전후 사상의 명제에 대해 저자가 표명하는 작은 의구심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타끼야마 꼬뮌은 일상생활 속에 드리운, 야위어가던 정치의 그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어릴 때 살던 타끼야마 단지를 재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타끼야마 단지는 1950년대 말부터 일본정부가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성한 대규모 단지 중 하나였는데 우리로 치면 분당이나 일산과 같은 교외 신도시에 해당할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다녔던 타끼야마 단지 제7초등학교를 무대로 “전공투 세대인 교사와 다키야마 단지에 사는 어린이, 제7초등학교를 개혁하려 나선 어머니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국가권력에서 벗어나 자립해 어린이를 주권자로 삼은 민주적 학교를 만들 목표로 생긴 지역공동체”를 ‘타끼야마 꼬뮌’이라고 칭한다. 우리로 치면 386세대 학부형이 전교조 교사들과 손잡고 급진적인 교육개혁을 추진한 것으로 이해하면 비슷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타끼야마 꼬뮌을 이끈 주축이 어머니들로 구성된 ‘학부모교사협의회’라는 점이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데 그래서인지 저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아놓고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1970년대는 몇몇 학생이나 지식인 말고도 적지 않은 이들이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여전히 믿던 시대라는 점이다. 정치의 계절은 끝났지만 사람들은 이상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타끼야마 단지 주민들 중 상당수가 일본 사회당 혹은 일본 공산당의 지지자였으며 이러한 성향의 ‘어머니’들은 진보적인 교사들과 뜻을 함께했다. 제7초등학교의 어머니들은 “지금 입시학원은 공부가 뒤처진 아이들이 아니라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는 아이들이 공립학교에서 하는 공부로 만족할 수 없어서 가는 곳인 듯합니다. 사회모순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교사의 말에 적극 동의하는 한편 학생 평가방식에 있어 “돈 받고 파는 시험지로 테스트를 해서 무슨 평가를 한다는 겁니까?”라며 학교 측에 따지기도 한다.
한편 타끼야마 꼬뮌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 것은 일본교직원조합 산하 전국생활지도연구협의회(전생연)였다. 전생연은 “전후 공교육의 기본 정신은 인간의 존엄과 개성의 존중, 평화와 민주주의 확립을 기본 원리로 한 헌법과 교육기본법의 정신”으로 규정했다. “아이들이 대중사회에서 갖게 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의식을 집단주의적 의식으로 변혁”하자거나 “집단은 ‘민주적 집단’, 곧 ‘민주적 집중 체제’를 조직 원칙으로 삼고 단일한 목적을 향해 행동을 통일한 ‘자치집단’이 돼야 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스딸린주의의 짙은 영향이 감지되기도 한다. 전생연은 이를 위해 학급집단 만들기에 공을 기울였는데 이는 학급을 몇개의 조로 구획한 뒤 조별 경쟁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저자는 전생연이 주장한 학급집단 만들기는 “최종적으로 그 학급이 속한 초등학교 학생 전체, 그 초등학교가 자리한 지역사회 주민 전체를 ‘민주적 집단’으로 변혁하는 수준까지 시야에 넣고 있”었으며 여기에 바로 “다키야마 코뮌의 사상적 모태가 자리한다”라고 말한다.
꼬뮌, 당신들의 천국?
하지만 저자는 학창시절 겪은 타끼야마 꼬뮌의 집단주의에 대해 체질적인 반감을 여러 군데서 드러낸다. 가령 축구대회 당시 펼친 “집단응원은 솔직히 말해 진절머리가 났다”라거나 조모임 활동에서 “마치 군대에 소속된 듯한 불편함”을 느꼈다는 식이다. 그리고 마침내 수학여행에서 아이들에게 자아비판을 강요받게 되면서 그 악몽의 기억은 정점에 달한다. 하여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제7초등학교에서 실천한 교육, 곧 권력을 배제하려는 교육 행위 자체가 겉으로 내세운 이상하고 다르게 실제로는 근대 일본의 천황제나 나치 독일이 보여준 권위주의를 내포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거리낌없이 이질적인 요소를 배제한 점을 비판하고 싶다.” 하지만 저자의 이러한 비판은 별 설득력이 없는데 저자가 배제했다고 비판한 “이질적인 요소”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입시교육’이기 때문이다. 가령 타끼야마 꼬뮌에서는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입시학원에 다닌다는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억압’을 받았다는 식이다. 더군다나 타끼야마 꼬뮌의 실험을 ‘천황제’나 ‘나치’, ‘소비에뜨’와 같은 역사적 파시즘의 경험과 조급하게 접속시키는 부분은 그가 겪은 개인적인 아픔을 고려하더라도 침소봉대에 가깝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그는 책의 말미에 과거의 자신이 부족했던 점을 비판하고 타끼야마 꼬뮌이 “획기적인 민주주의적 시도”였다고 기술한다. “코뮌을 향한 이상이 아직 빛을 잃지 않던 시대 속에 어떤 가능성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적어두는 일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거의 진행되지 않는데 이는 서술 분량의 균형이 어긋난다는 문제를 넘어 타끼야마 꼬뮌이라는 분석 대상에 대한 다층적이고 심도있는 탐구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저자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와 내면이 거의 제시되지 않으며 타끼야마 꼬뮌을 구성했던 다양한 인물들의 견해가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점 역시 큰 문제점이다.
옮긴이는 후기에서 “아무리 진보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가르치는 이가 그 권위에 내포된 위험성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교육은 실상 세뇌나 강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고 쓴 바 있다. 그 자체로는 타당한 말이지만 전교조가 좌편향 세뇌교육을 시킨다는 ‘우파’의 레퍼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다. 조별 경쟁과 입시경쟁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 역시 몰역사적이며 비사회적인 인식이다. 이렇듯 꼬뮌에 대해 무척 덜 말한 이 책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말할 여지를 우리에게 남긴다. 그 무한한 여백을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새롭게 창안되어야 할 공동체의 조건을 사유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면 이 책의 의의가 반드시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17.7.1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