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남아 있는 시간에 대한 두 질문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가 결정된 뒤,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송은경 옮김, 민음사 2010)의 한국어 번역 제목을 두고 SNS에서 작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영어를 잘 모르는 처지라 말을 덧붙일 계제는 아니지만, 나로서는 번역 제목에 이의를 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 영국 대저택 달링턴 홀의 집사 스티븐스는 미국인 새 주인의 제안으로 생애 첫 여행을 하게 된다. 주인이 내준 자동차를 몰고 영국 서남부를 도는 엿새간의 여정에서 아름다운 자연 풍광, 작은 마을들을 지나며 돌이키는 일인칭 화자 스티븐스의 회고는 조금씩 담담함을 잃고 분열되며 억누르고 외면했던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작가는 점증하는 자기기만의 아이러니를 화자의 어조에 섬세하게 새겨 넣고 있는데, 회고의 리듬을 여로를 따라 하루 단위로 설계하고 엿새로 나누어 배치한 것도 대체로 성공적인 서사전략이 아니었나 싶다. 엿새는 두번의 아침과 두번의 오후, 세번의 저녁으로 나뉘면서 모두 일곱개의 챕터로 구성된다. 마치 세상의 일주일처럼.
세상의 저녁에 대한 성찰
여로는 결혼과 함께 달링턴 홀을 떠났던 하녀장 켄턴 양, 그러니까 벤 부인과의 만남으로 끝나고 집사의 직업적 책임감으로 억눌러야 했던 사랑의 감정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시간으로 확인된다. 친나치 행각으로 얼룩진 달링턴 홀의 오욕에서 스티븐스의 성실은 보상받을 길 없는 맹목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스티븐스의 삶은 무엇인가.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웨이머스 바닷가 마을에 저녁이 찾아오고, 그것은 스티븐스 인생의 쓸쓸한 황혼이기도 할 테다.
소설에서 스티븐스는 바닷가 벤치에 함께 앉아 있었던 한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 일을 끝냈어요.” 정말 그럴까. 남아 있는 시간, 남아 있는 나날을 헤아리는 인생의 저녁에 저 노인의 말은 차라리 농담이 아닐까. 어쩌면 작가 역시 스티븐스라는 인물의 인생에 드리운 쓰디쓴 아이러니 앞에서 할 말을 잃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은 날의 부재
소설이 본질적으로 회고의 형식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것도 의기양양과는 거리가 먼 상실과 회한과 자책의 돌아봄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동시에 남아 있는 날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텐데, 거기에 성찰을 통한 성숙의 자리나 계기가 얼마간 존재한다는 믿음도 함께 있는 것도 같다. 나 자신 오래 그렇게 소설을 읽어왔지 싶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들과 함께 이즈음 그런 믿음이 자꾸 흔들리고는 한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읽은 한편의 소설이 전하는 급박함이 이상하게 강렬하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싱글맨』(A Single Man, 조동섭 옮김, 창비 2017)은 단 하루의 이야기다. 소설은 58세 대학교수 조지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날밤 같은 침대에서 돌연 숨을 멈추는 하루를 따라간 뒤 끝난다. 조지는 함께 살던 동성 파트너 짐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과 우울에 빠져 있다. 1904년 영국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베를린으로 건너가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쳤고, 나치를 피해 1939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캘리포니아에서 작가로, 문학 교사로 살다 1986년 세상을 떠난 이셔우드는 퀴어 문학의 선구자로도 알려져 있다. 1964년에 발표한 『싱글맨』은 로스앤젤레스의 대학가를 배경으로 이방인이자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한 대학교수의 우울과 분노에 찬 일상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얼마간 자전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소설 전체에 걸쳐 펼쳐지는 조지의 시니컬하고 엄혹한 자기해부는 문장 하나를 놓치지 못하게 할 만큼 신랄하고 강렬하다. 그 날카로운 집도(執刀)에서 조지는 무엇보다 욕망하는, 그러나 노쇠해가는 육신에 갇힌 존재다. 그의 정신은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으로 깊은 내상을 입었다. 문자 그대로의 상처인데, 그 상처는 조지가 바닷가 술집에서 짐을 처음 본 순간 그의 “관상동맥 주요 혈관에 생긴 어떤 변화”로부터 자라나온 것일 수도 있다. 출근길 대학 교정에서 테니스를 치는 두 젊은이가 늙어가는 육체에 주는 진저리나는 관능적 쾌감에 대해 묘사할 때, 우리는 전율한다. 조지의 말대로 이것은 ‘무자비한 게임’이다. 강의 시간에 “우리가 소수집단을 좋아하지 않거나 미워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짜 자유주의적 감상주의로 우리 감정을 속이는 것보다 낫습니다(이하 강조는 원문--편집자)”라고 조지가 말할 때, 거기에는 성소수자로 살며 겪어온 혐오와 위선의 폭력에 대한 깊고 깊은 분노가 차분히 눌러진 채 이글거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남아 있는 시간, 남아 있는 나날이 없다고 믿는 한 ‘독신 남성’의 이야기란 점에서 모종의 ‘자유주의적 감상주의’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둘러싼 여분이 별로 없다. 곧이곧대로 들을 말만은 아니겠지만, 조지는 인생에서 경험이 쓸모 있는지 묻는 제자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답한다. “글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경우는 내가 이야기할 수도 없고, 내 경우에는, 무엇에도 전혀 현명해지지 않았어.”
그러므로 소설의 그날 아침, 조지가 겨우 ‘그것’(아직 조지라는 육체적·사회적 인격을 입기 이전의 상태)으로 깨어났을 때, 그렇게 해서 겨우 “내가 있다”와 “내가 지금 있다”가 추론되는 낯선 상황이 그리 느닷없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단지 이 상황이 그를 아주 조금 안심시키는 것은 깨어난 ‘여기’가 ‘그것’이 그날 아침 자기를 발견하리라 예상한 곳, 그러니까 집이라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지에게 ‘지금’은 아주 가혹한 상태로 도래해 있다. 그에게는 지금 여기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소설의 두번째 문단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지금이 아니다. 지금은 잔인한 암시다. 어제에서 하루가 지난 때, 작년에서 한해가 지난 때. 지금에는 모두 날짜가 붙어, 지난 지금을 모두 쓸모없게 만든다. 어쩌면—아니, 어쩌면이 아니라—아주 확실히—조만간, 그날이 올 때까지.”(8면)
돌발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런 일에 부단히 마음과 행동을 모아가는 것은 언제나 소중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함께 그렇게 살아간다. 소설의 조지는 적어도 작가이자 좋은 문학 교사로서 그리했던 것 같다. 앞서 스티븐스의 삶도 제한된 대로 자기성실의 측면에서는 쉽게 비판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돌연 중단될 때도 있다. 아니 확실히. 완전히 혼자의 육신으로 돌아가서. 그런 생각도 여투게 되는 쓸쓸한 가을이다. 지난주 아는 선배의 상에 가서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7.11.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