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촛불 1년, 새로운 민주주의는 소수자 인권 실현으로!
광장에 누군가 촛불을 들고 서 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1년 전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주권자인 국민이 권력을 가지는 나라를 염원했다. 그곳에 장애인, 청소년, (젊은)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등 이례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이들이 있었다면 그 얼굴을 상상하는 것으로 나는 촛불과 소수자 인권을 말하고 싶다. 시민의 얼굴을 다시 상상하는 것, 긴 세월 시민권을 박탈당했던 이들이 실로 오랫동안 들고 있었던 촛불의 의미를 되짚는 것이 시민의 힘으로 일군 촛불의 저항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실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촛불은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비출 때다. 커다란 변화를 이끈 하나의 촛불이 가지는 힘을 기억하면서도, 하나하나의 얼굴이 그려지는 촛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삶을 기반으로 한 시민권
시민권은 국민국가가 자격을 승인하는 통치수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기반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자격’이 아닌, ‘존재’로서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 진보적 장애인운동은 2001년 장애인이동권 투쟁을 통해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시민적 권리 주체로서 상상되지 못했던 장애인의 존재를 드러내며 장애인차별 문제를 사회에 제기했다. 타자화되었던 장애인이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다가온 사건이었다. 성소수자운동은 ‘이명박근혜’ 정권 아래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서울시 인권조례 투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등을 힘있게 펼쳤다. 나영정의 말대로 “한국사회를,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성적으로 단일하지 않고 다양한 성격을 지닌다고 밝히면서, 시민의 성격을 재구성하려고 애써왔다.”(「6·10항쟁 28주년, 성소수자는 민주주의를 묻는다」, 창비주간논평 2015.6.10) 그러나 올해 대선시기 TV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의 ‘(동성애) 좋아하지 않는다’ 발언은 시민권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에 누가 서 있는지를, 그리고 여전히 이들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제도권의 오만함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차별은 안 된다. 그러나 단계가 필요하다’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기다리면 해줄 것’이라는 식의 권리를 지연시키는 말이 합리적인 사유처럼 보이는 것은 위험하다. 현재를 미래에 맡길 수 없다.
광장은 더 구체적인 삶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연대의 장이 되어야 한다. 시혜와 동정이 아닌, 나와 너의 권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이 더욱 요청된다. 장애인은 오랫동안 돌봄이 필요한 의존적 존재라며 복지의 대상으로 한정된 삶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평등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장애인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돌봄과 지원이 필요한 삶은 독립적일 수 없는가?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가지지 않은 사람이 더 나은가? ‘장애인’이라는 구분된 표식 외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장애인의 삶을 떠올려본 적 있는가? 소수자 인권을 모두의 주제로 이해하기 위해선 이렇게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자’라는 구호는 타당하지만 구체적 경험 없이 공명을 부르긴 어렵다.
혐오와 차별에 맞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개혁을 외치지만 어떤 제도는 주목받지 못한다. 차별금지법이 그렇다.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나중’으로 미룬 지 벌써 10년째다. 2007년 병력, 출신국가, 언어, 성적지향 등 7개 사유가 누락된 차별금지법 사태 이후 17~19대 국회의 연이은 발의에도 제정은 무산되었고, 19대 국회에선 반동성애세력의 압박에 못 이겨 민주당 의원들이 자진철회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어제(10.7) 국정감사에서 이상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동성애 찬반 여부를 질문 받았으며, 지난 9월 19일 자유한국당 김태흠 의원 등은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마저 ‘성적지향’ 문구를 삭제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행법은 제2조 제3호에서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를 정의하며 성별, 종교, 장애, 성적지향 등 19가지 차별금지사유를 예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성적지향을 삭제하자는 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겠다는 것인데, 이를 시작으로 나머지 18가지 사유마저도 후퇴시키고자 하는 음모가 아니겠는가.
혐오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혐오의 원인을 개인적인 감정과 심리상태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강남역 10번출구’ 사건을 두고 경찰은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은 삭제한 채 가해자 개인의 심리적 원인으로 몰며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만 부추겼다. 소수자에 대해 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된 적대감과 증오의 표출이라는 맥락을 읽지 않으면, 반차별은 개인들의 도덕적 과제로 남겨지고 반차별과 평등의 가치는 시혜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평등은 늘 누군가에게 요청하고 승인받아야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은 채 한국사회 차별 현실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유예된 사람들의 권리이다. 그러니 더이상 미뤄선 안 되는 우리의 과제다.
소수자들이 등장하고 자기 소리를 낼수록 광장은 소란스러워진다. 광장이 긴장하고 불일치하며 시끄러워지는 때야말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치열한 순간이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현을 일굴 동료로서 촛불광장의 소수자들이 들었던 촛불을 주목하자. 그들의 주장을 중요한 의제로 채택한다는 것은 성별규범, 가족제도, 정상성과 비정상성, 돌봄, 독립과 의존, 보호와 안전 등 익숙했던 관습과 문화를 낯설게 보고 다른 사회로 이행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체제 내 표준적 시민이 아닌, 일탈과 비정상적이라고 규정된 시민들이 만드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자. 오랫동안 들고 있었던 소수자들의 촛불을 보자.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2017.11.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