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낙태죄 폐지와 공론화의 위험
낙태죄 폐지 논란과 그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
낙태죄 폐지가 한국사회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당장의 논란은 지난 9월 30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이 올라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추천한 ‘청원’에 대해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가 답변한다”라는 규정에 따라 한달간 최종 235,372명이 참여한 이 청원에 대해 조국 민정수석이 지난 11월 26일 공식 답변을 내놓았다. 이 대규모 청원운동은 작년 9월 보건복지부가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고 시술 의사의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낙태 처벌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이 확산되어온 흐름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
조국 수석은 “태아의 생명권은 매우 소중한 권리이지만 처벌 강화 위주 정책으로 부작용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면서 “이상의 것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은 물론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비혼이든 경제적 취약층이든 모든 부모에게 출산이 기쁨이 되고 아이에게 축복이 되는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할 것이며 국가의 의무와 역할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청원을 계기로 정부는 법제도 현황과 논점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면서 2010년 조사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던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내년에 당장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청와대는 인공임신중절 현황과 사유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가 선행될 때 그 결과를 토대로 관련 논의가 한단계 진전될 것이라고 보는 셈이다. 그런데 실태조사를 토대로 과연 청와대가 바라는 것처럼 ‘태아 대 여성’ ‘전면금지 대 전면허용’ 같은 식의 대립구도를 넘어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사회적 논의인가가 중요하다
여기에 대해서 낙태죄 폐지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성과재생산포럼(건강과대안 젠더건강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장애여성공감,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등의 연대체)은 청와대의 답변에 즉각 논평을 냈다. 논평은 일단 처벌 위주 정책의 문제와 이에 대한 변화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여성의 재생산권과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입법부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도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들이 많이 있음에도 정부 역할에 대해 지나치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청와대의 입장은 낙태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의 ‘출발’로서는 나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낙태죄 폐지와 함께 청원의 또다른 축인 유산 유도약 도입에 대해서는 “자연유산 유도약의 합법화 여부도 이러한 사회적, 법적 논의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기대합니다”라는 짧은 답변에 그친 데서 볼 수 있듯이 인공임신중절의 법적 지위 여부에 상관없이 여성의 건강권이나 최선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로서 다루어질 수 있는 부분까지도 사회적 논의를 통해 결정해야 할 사안으로 인식한 데 문제점이 있다. 조수석이 밝힌 바와 같이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진정성에 입각한 것이라면, 반드시 사회적 논의를 기다리지 않고도 적어도 즉각 검토할 수 있는 사안들조차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찬반 논란이 분명하게 예견되는 사안의 경우, 사회적 논의를 거친다는 것은 종종 실행의 책임을 면하기 위한 구실이 될 수도 있다. 오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공식 답변 직후 조수석이 낙태죄 폐지의 가장 큰 반대세력인 가톨릭교회를 직접 찾아가 사과한 데서도 청와대의 의도에 대한 의구심은 커지는 중이다. 현재 가톨릭교회에서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1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조직적 행동에 나서고 있다. 모두가 동의하거나 만족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정부가 확실한 정책적 방향 없이 사회적 논의를 진행한다는 것은 결국 찬반 구도만 강화할 뿐이다. 또한 그 사이에서 정부가 결단을 내리고자 할 때 부담만 더 커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섣부른 공론화에 대한 우려가 근거 없지만은 않은 것이, 청와대 논평 직후 신고리5·6호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론화위원회를 설치해서 낙태죄 폐지처럼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의견이 더불어민주당에서 흘러나왔다.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과연 누군가의 권리를 공론에 붙여서 여론조사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점이다. 고리원전의 경우에도 원전의 존재로 입게 되는 피해나 위험이 누구에게나 같지 않은 상황에서, 공사 재개 같은 문제를 어떤 방식의 공론으로 다루어야 할지가 논란거리였다. 하물며 여성이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서 안전과 건강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의 문제를 여론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타당한 접근이 아니다.
낙태죄 논의는 누군가의 존재와 인권은 찬성하거나 반대할 문제가 아니라는 소수자 권리의 논의틀과 더 닮아 있다. 생존을 위해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혐오발언을 일삼는 세력을 찬반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저울에 놓으면 안 되듯이, 여성들이 구체적인 삶에서 겪는 문제들을 두고 종종 그 현실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여론으로 판결하겠다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공론화라는 공적인 장을 통해서 혐오발언이나 특정 종교의 입장이 확산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책임 있는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낙태죄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 모두가 이 문제는 다수결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에서, 공론화위원회를 통해서 세련되게 해결될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촛불의 교훈을 낙태죄 폐지 논의에서도
일단 인공임신중절 논의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추상적인 생명권 담론과 그에 입각한 논의의 극단화 현상이다. 실제로 인공임신중절이 사회적 의제로 등장할 때마다 큰 힘을 발휘하던 생명권 담론이 최근 들어 힘을 많이 잃기도 했다. 여기에는 한국사회에서 비극적 사고로 희생되는 양상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해결에 대한 의지가 높아진 까닭도 있을 것이고, 언론이 사회문제를 보도하는 태도가 변화한 영향 역시 없지 않을 것이다.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측에서도 우리 사회가 이미 태어난 생명들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또 오랜 기간 국가가 나서서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해온 역사를 지적한다. 이들은 낙태죄가 죄라면 과연 그것은 누구의 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한국사회의 생명경시 풍토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쪽은 실상 국가임을 강조한다. 저출산이 국가적 위기라고 하면서도 정작 보육환경이나 노동조건의 개선은 지지부진한 상황, 어렵게 태어나 다 자란 아이들을 구조하지 못한 세월호사건 이후로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생명을 존중하는 안전한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현실을 그대로 두고서 왜 온 사회의 관심이 태아의 권리에만 집중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반도체 공장이며 구의역 등 수많은 노동현장에서 끝없이 들려오는 희생자 소식에 이어 얼마 전 산업현장에서 실습하던 고등학생의 희생까지 마주하고 보면 한국사회에서 생명의 권리를 위한 노력이 낙태의 단죄에만 집중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물론 이렇게 생명과 그 권리 논의를 확대하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 생명의 가치가 정권교체만으로 간단히 지켜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은 더더욱 분명해 보인다.
낙태죄 폐지 논의에서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낙태한 여성들을 형법으로 단죄해온 낙태죄의 역사를 단지 여성들의 문제, 그것도 일부 여성의 문제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긴급하게 청산해야 할 적폐로 인식하는 일이다. 국가가 나서서 낙태를 조장 내지는 때로 강요해온 국가폭력의 역사, 그리고 장애를 가진 여성에 대해서는 건강상태와 무관하게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는 것을 넘어 강요해온, 나치즘과 다를 바 없는 우생학적 조항이 모자보건법에 잔존하면서 장애와 질병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적폐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입장을 정해놓고 하는 세력 대결의 공론장이 아니다. 사람이 살 만한 사회,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추운 겨울 내내 촛불을 들었던 그 깨인 감각으로 한국사회에서 인공임신중절의 현실이나 여성건강권과 관련된 세계적 동향을 알아보고,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자세히 들어볼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백영경 /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2017.1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