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돌아가지 못한 영국군을 생각하며
기차는 천천히 달렸다. 폭염에 철로가 늘어나서 그렇단다. 런던에서 출발한 열차는 맨체스터역에 40분 늦게 도착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는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 자기 얼굴을 모를 테니 개찰구에서 짐 그룬디(Jim Grundy)라고 쓴 쪽지를 들고 서 있겠다고 했다.
나는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노인의 모습은 바쁘게 지나가는 주변 사람들을 어두운 배경으로 만들면서 가만히 도드라지는 법이다. 오후 12시 30분. 오래 기다리셨냐고 물으니 11시에 왔단다. 걱정 말라고, 자기는 기차역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4월 26일 남북한 두 정상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그렇게 가볍게 넘나드는 것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도 마음이 들떠서 며칠 동안 하루 종일 뉴스만 보며 지냈다. 가슴 벅찬 이 역사적 순간에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영국에 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전쟁과 분단, 그리고 영국을 연결하는 고리로 겨우 찾아낸 것이 참전군인이었다.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장병을 파병했는데, 정작 나는 이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종전선언’ 이야기가 나오는 이 시점에서 이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만나자고 생각하니 궁금한 것이 생겼다. 세가지쯤 된다.
우선 그들이 그 먼 나라의 전쟁터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런던에 있는 한국전쟁기념탑에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영국군 장병들의 희생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는데, 정말 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서 싸웠을까? ‘수호’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같은데, 1950년 한반도에 우리가 수호할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었을까. 기념탑 바닥에는 2013년 11월 5일 기공식에 참석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름을 영예롭게 새겨놓았는데 하필이면 박근혜 대통령이다. 내가 그곳을 찾은 날은 또 하필이면 5월 18일이었다. 마음이 복잡해져서 고개 숙인 병사의 동상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첫번째 질문이다. 한국전쟁에 온 외국군은 무엇을 위해서 싸웠을까?
슬퍼진 것은 이 글을 봤을 때였다. 기념탑 주변에 있는 양귀비꽃 화환(포피라고 불리는 붉은 양귀비꽃은 영국에서 전몰장병의 상징이다)에 이런 쪽지가 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는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글 마지막에 ‘한국전 참전장병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느님은 잊지 않았다는 그 말이 사람들은 다 잊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서글펐다. 포피가 놓여 있는 기념탑 석면에는 영국이 81,084명을 파병했고 그중 1,106명이 전사했다고 새겨져 있었다. 영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불린다. 전사자들도 영국에서는 잊혀진 것 같다. 미국은 전사자를 본국으로 송환하여 알링턴국립묘지에 안장했지만 영국군 전사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전사자 중 885명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묻혔고, 나머지는 유해를 찾지 못했다. 나는 살아남은 이들을 만나 물어보고 싶었다. 한국전쟁은 정말 잊힌 전쟁인가요? 당신 심정은 어떤가요? 당신은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나요? 두번째 질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이 최근 한반도 뉴스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본 소회는 어떤지? 젊었을 때 참전했던 그 전쟁이 이제 거의 70년 만에 끝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나는 왠지 그분들이 진심으로 기뻐할 것 같았고 나도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어쩌면 ‘주술’을 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자꾸 ‘종전’과 ‘평화’를 이야기하면 그게 주문이 되어 정말 평화가 오지 않을까 해서. 천천히 오는 것은 괜찮은데 멈추거나 딴 데로 가버릴까봐 조바심이 생겼나보다.
사실 이 질문들은 영국군 참전 장병에게만 묻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에서 싸운 한국군, 북한군, 중공군, 미군을 비롯한 21개 나라의 유엔군은 어떻게 대답할지도 참으로 궁금하다. 우리가 진솔하게 물어보면 이제 거의 아흔살이 된 노인들은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을까? 그때 정말로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후대가 무엇을 기억해주길 바라는지, 지금의 한반도의 변화를 어떻게 보는지.
기억한다는 것
그룬디씨는 한국전쟁 중에 영국군 시신수습반(Recovery team)에 있었다. 1951년부터 53년까지 꼬박 2년 동안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었다. 부패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는데, 정작 그가 힘들었던 것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시신을 찾지 못했을 때, 발견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을 때, 그리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시신을 보았을 때의 괴로움을 이야기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잠을 설친다고 했다.
전사자들은 대부분 열여덟, 열아홉, 스무살이었다. 그룬디씨 자신도 참전 당시 열아홉살이었다. 당시 영국은 남자가 만 18세가 되면 군대에 가는 징병제를 실시했다. 한국전쟁에 나간 장병의 80%는 징집된 청년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한국이 어디 있는지, 이 전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잘 모르고 떠났다고 한다. 어찌 보면 우리 삶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예기치 않은 장면에 던져진다. 나는 그룬디씨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숭고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던져진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예우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룬디씨는 지금도 전사자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애쓴다. 지난 10년 동안 그는 전사자의 사진을 모아서 유엔기념공원에 보냈다. 유엔기념공원에는 이렇게 모은 약 600명의 영국군 전사자의 사진이 벽에 전시되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찾아주는 것, 그게 그가 이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전쟁에서 희생된 구체적인 개개인을 보여주는 것. 그들의 용맹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의 말대로 “이 전쟁에서 죽은 이가 누구였든 간에, 그는 한 어머니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알려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진에 있는 청년들은 하나같이 젊고 풋풋했다. 전쟁 중에는 전사자의 시신과 이름을 찾아주려고 애썼고, 지금은 그들의 얼굴을 찾아주려고 노력하는 그를 보며, 그는 아직 ‘수습반’을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처음 두가지 질문에 대해 어렴풋이 답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걸 정리된 언어로 쓰기는 어렵다. 짧은 지면 탓을 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그 복잡한 문제를 잘 쓸 수 있을 만큼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들의 이야기를 좀더 듣고 그 마음을 보듬으며 생각해보면 언젠가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그리고 전쟁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마지막 질문에 대한 그룬디씨의 답은 이렇다. 남북정상이 군사분계선을 함께 넘을 때 ‘이게 꿈인가’ 싶을 만큼 믿기지 않았고 설레었고 기뻤다. 미래를 향해 한걸음 내딛는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있는 전우들이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건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면 좋겠다. 글로 옮길 수 없는 그의 마음이 들린다.(「제임스그룬디: ‘종전선언’을 바라보는 한 영국인 6.25 참전용사의 이야기」, BBC뉴스 2018.6.12)
‘미국과 북한은 신원이 이미 확인된 전쟁포로(POW) 및 전쟁실종자(MIA)들의 유해를 즉각 송환하는 것을 포함해 유해 수습을 약속한다’고 했다. 북미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북한지역에 아직 남아 있는 미군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1차 송환이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나는 괜히 부산에 묻힌 영국군 장병 입장이 되어서 그들이 부러워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이. 잊히지 않은 그들이.
이향규 /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
2018.7.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