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우리만으로는 역부족이야: 코레에다 히로까즈의 「어느 가족」
또 가족인가. 올해 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코레에다 히로까즈(是枝裕和)의 영화가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원제 ‘만비끼(万引)가족]인 걸 알게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의 영화라면 거의 덮어놓고 좋아하는 편이긴 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와 「태풍이 지나가고」(2016)를 거치며 답답함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어느 쪽도 ‘가족이여, 영원하(리)라’라는 모토와 무관하긴 했다. 그렇다 해도 ‘정상’가족이란 언제나 불가능했으며 ‘비정상’가족마저 해체 중이란 소식이 퍼진 지 이미 오래, 더구나 정상/비정상의 구분을 일축하는 대안가족이라는 발상도 벌써 익숙해진 시점이 아닌가.
사실을 말하자면, 이 감독이 참으로 꾸준하게 가족을 소재로 다룬다기보다 가족이라는 것이 참 꾸준하게도 문제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특정 형태의 집단은 지난 수백년 동안 대체로 역량이 축소되어왔고 때로 축소된 역량에 비해 과도한 비난과 기대에 시달리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중요한 제도로 남아 있다. 그 가늘고도 긴 생존에 관해서는, 자본주의가 무상으로 ‘아웃소싱’해온 사회적 재생산 혹은 돌봄을 떠안은 대표 조직이라는 설명만으로 수긍이 간다. 그렇기 때문에 해체되어왔고 또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해체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공짜로 활용해온 그 재생산 공간마저 유지할 여력이 없는 적나라한 이윤추구가 가속화된 지금, 위기에 처한 돌봄의 문제가 사회적 차원의 사태임이 한층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 와중에도 가족은 여전히 위기의 주요 현장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고, 위기의 현장이 곧 범죄 현장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상한 가족’과 비공식적 삶의 정치
「어느 가족」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면을 따져보면 죄다 돌봄의 위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대로였다면 독거노인이 되어 고독사했을 할머니, 일용직과 계약직 노동자로 다쳐도 산재 처리되지 않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워킹푸어 커플, 가출청소년 출신과 유기아동으로 이루어진 이 ‘가족’에 이제 친부모에게 학대받아온 아동까지 가세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들이 가족으로 보이는 것은 마침 연령대가 일가족 구성에 맞춤하는 것 외에, 주택 소유주이자 주요 수입원인 연금 수령자로 제일 ‘부유한’ 할머니가 가진, 코딱지보다 조금 클 뿐인 집에 빌붙어 오글오글 모여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자라기만 한 살림은 ‘아버지’와 ‘아들’의 좀도둑질(만비끼)로 보충된다.
테사 모리스스즈키(Tessa Morris-Suzuki)는 「지구화의 문화정치를 다시 생각하기」라는 글에서 체제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위기에서 비롯된 삶의 위협과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이들이 때로 거의 자포자기적으로 행하는 매일의 결정과 필사적인 자기보호 내지 자기실현 행위들을 “비공식적인 삶의 정치”(informal life politics)라 불렀다. 이런 ‘정치’는 어떤 이념이기보다 “실험적이고 즉흥적인 행위 방식”으로서, 그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순 없으니 어떻게든 뭔가 시도하면서 어떻게 될지 보는 일을 말한다.(Tessa Morris-Suzuki, “Rethinking the Cultural Politics of Globalization: Where Do We Go from Here?,” Chinoiresie, 2016.8.29.) 이 영화의 ‘가족’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정치다. 집이 없지만 어쨌든 누워 쉴 곳은 필요하니 받아주는 할머니 집에 들어가 사는 것이고, 돈은 없지만 생필품은 있어야 하니 좀 훔치는 것이며, 내버려두면 부모에게 얻어맞으며 추위에 떨 테니 아이를 거두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얼결에 가족이 만들어져 있더라는 식이다.
생존을 위한 임시방편들이 쌓인 결과인 이 가족은 여느 ‘정상’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만큼은 분명 돈으로 이어져 있지만, 이를테면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애정과 연민과 유대감으로 보는 이를 훈훈하게 만든다. 이 가족의 할머니와 (그녀를 버리고 떠난 남편이 다른 여성과 낳은 아들의 딸인) 손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그리고 오빠와 여동생 사이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어떤 애틋함이 잔잔하면서도 진하게 배어 있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역시 이 영화는 (대안적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채로지만) 또 하나의 가족이야기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들이 행하는 비공식적인 삶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공식적인 정치와 부딪힌다. 생필품 조달은 절도이고 학대아동을 거둔 일은 유괴이며 제대로 장례절차를 거치지 못한 할머니의 죽음은 시신유기로 분류된다. 두 정치가 부딪히는 긴장의 교차점에 아들 쇼타가 있다. 새로 여동생이 된 유리를 좀도둑질에 끌어들이는 데 처음부터 거리낌을 느끼던 쇼타는 아버지 오사무의 절도가 생필품을 넘어 본격화되고 슬슬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하는 것을 감지하며 한층 떳떳지 못한 기분이 된다. 마침내 유리가 시키지도 않은 절도를 혼자 감행하다가 들킬 위기에 처하자 쇼타는 일부러 소동을 일으켜 잡히는 선택을 하고 그 때문에 가족은 뿔뿔이 해체된다. 쇼타가 갖게 된 이 느낌이 단순히 ‘공식정치’의 이데올로기에 감염된 결과가 아니라는 데 「어느 가족」의 통렬함이 있다.
새로운 돌봄의 관계를 상상하기
이 점은 가족 가운데 가장 선명하게 삶의 정치를 옹호한 어머니 노부요에게서 재확인된다. 학대받던 유리를 따뜻이 품으면서 그녀는 선택한 가족이 주어진 가족보다 더 낫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후 경찰에게 추궁을 받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당신을 뭐라 불렀느냐는 질문, 다시 말해 아이들이 당신을 엄마로 부르지는 않지 않았느냐는 비난을 받고 조용히 눈물 흘리는 명장면조차 그녀가 마침내 삶의 정치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시체유기 혐의를 떠안아 실형을 살게 된 그녀는 오사무와 함께 면회 온 쇼타에게 친부모를 찾을 수 있도록 발견 당시의 정황을 상세히 일러준다. 당황하여 만류하는 오사무에게 그녀는 이렇게 일갈하는 것이다. “우리만으로는 역부족이야”라고.
역설적이게도 우리만으론 안 된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야말로 삶의 정치가 공식정치보다 우위라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입증된다. 이 영화에서 공식정치를 담당하는 그 누구도, 친부모도, 경찰도, 사회복지사도 ‘우리만으로는 역부족’임을 인정하는 통찰과 유연함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안가족의 힘을 고집하지 않는 이 순간은 공식가족의 손을 들어주기는커녕 가족에게 지정된 ‘돌봄’의 문제가 더 다양한 사회적 자원과 연결되어야 함을 요청한다. 노부요의 인정이 갖는 의의는 쇼타가 친부모를 찾는 대신 공식 대안가족이라 할 그룹홈을 택하고 오사무를 (비록 들리지 않게나마) 처음으로 아빠라 부르는 장면, 그리고 친부모에게 돌아간 유리가 다시 추운 베란다로 내쫓겨 밖을 내다보는 장면에서 반향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가족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공(公), 공(共), 사(私) 영역 전반”을 아우르며 “돌봄을 중심으로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상상하”는(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시도를 커먼즈(Commons) 운동으로 부를 수 있다면, 「어느 가족」은 커먼즈의 텍스트로 읽히기에 손색이 없다. 이것 말고는 없다는 주장보다 이것만으론 역부족임을 인정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공통적인 것의 상상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8.8.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