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유토피아를 향한 윤리적 열정: 이상철 『죽은 신의 인문학』
니체가 『즐거운 학문』(1882)을 통해 신의 죽음을 선언했던 바로 그해에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마침내 빗장이 풀린 쇄국(鎖國)의 문을 비집고 조선에 들어온 것은 비단 경제적 이익을 노린 상인들만이 아니었다. 1884년 미국장로교회 선교사 알렌이 조선에 도착했고 이듬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뒤를 이었다. 조선의 민중이 기독교라는 ‘손님’을 본격적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기독교는 오랜 차별의 역사를 간직한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교세를 확장해나가면서 이 땅에 커다란 물질적·정신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수차 지적된 바 있듯 우리에게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조선의 청년들을 황홀한 매혹에 빠지게 만든 새로운 근대 문명의 정수였으며 조선이 오랫동안 앓고 있던 구습과 적폐를 일거에 쓸어버릴 새로운 합리성의 형식이었다. 이광수와 전영택을 비롯한 식민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기독청년’으로 정체화하면서 자신들의 미래와 조선의 미래를 등치시킨 바 있는데 이는 기독교가 새로운 주체 형성의 담론적 자원인 동시에 유토피아적 사회상을 구축하는 상상력의 거처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김민섭 「1910년대 후반 기독교 담론의 형성과 '기독청년'의 탄생: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2013)를 참조.)
정신병의 증상을 앓고 있는 한국 기독교
유럽에서 기독교의 ‘종언’이 울려 퍼진 순간 조선에서는 바로 그 기독교가 억압과 차별 없는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열망하는 민중의 가슴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우리는 묘한 시차(視差)를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유럽에서 죽었던 신이 자리를 옮겨 변방의 조선에서 불타는 성령으로 재림한 셈인데, 그 신마저 지금에 와서는 공공연하게 ‘죽은 개’ 취급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유는 간명하다. 신의 뜻을 받드는 교회가 권력화되어 타락하면서 더는 이 땅의 민중에게 희망과 위안의 처소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신의 인문학』(돌베개 2018)의 저자인 이상철 목사는 현재 한국 기독교가 처한 참담한 실상을 정신병이라는 은유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타인과의 불화와 단절이 정신병의 증상”이라고 할 때 “우리 사회에서 한국 개신교가 벌이는 소동이 정신병의 증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생산/강화하는 전진기지로 변해버린 한국의 교회가 존재한다. 저자는 분단체제하에서 발생하는 빨갱이 혐오가 “동성애 혐오, 이방인 혐오, 여성혐오 등”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며 한국 교회가 그같은 차별과 배제를 증폭시키는 선봉에 서 있다고 진단한다.(335면)
물론 반공주의와 성장주의라는 대한민국의 적폐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었던 (혹은 그걸 적극적으로 창안하고 견인했던)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1970년대 거세게 분출되었던 민중신학에서 그 비판의 원류를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 책은 이와 같은 민중신학의 전통 위에 신자유주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실천적 문제의식을 결합시킨 뒤 이를 푸꼬와 데리다를 비롯한 비판적 인문정신의 프리즘으로 해석한 흥미로운 저작이다.
인문/신학 비평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인문/신학 비평’이라는 고유의 방법론을 통해 한국 기독교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혹은 인문학에 대한 신학적 재해석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렇다면 저자가 한국 기독교와 인문학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고안한 인문/신학 비평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문/신학 비평은 무엇보다도 한때 한 몸이었으나 이제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 재설정을 겨냥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현 시대 교회의 문제를 인문(학) 정신을 통해 교정한다는 논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보기에 한국의 인문학 역시 “자본과 결합하여 마치 도착증 환자처럼 더 큰 자극과 쾌락을 찾아 배회하는” “비정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15~16면)
저자는 신학을 “욕망의 법칙이 난무하는 현실의 세계를 뚫고 나가는 극단과 파국의 사고”로, 인문학을 “기존의 시스템에 대한 회의와 종전의 사유에 대한 의심”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인문/신학이란 인문학과 신학이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며 자본의 욕망에 잠식된 현실 세계를 끊임없이 회의하고 성찰함으로써 마침내 그 파국과 파국 이후에 찾아올 희망에 대해 사고하는 담론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신학 비평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개념을 꼽으라면 ‘파국’과 ‘유토피아’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잠깐, 파국과 유토피아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이미지를 동반하지 않는가? 유토피아가 파국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상향의 세계이며 끝나지 않는 연속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파국 혹은 파국의 윤리는 우리의 범박한 용례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자본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며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본의 작동 원리와 반대되는 삶을 실천하는 것은 곧 파국 아닌가? 지배 체제가 강요한 “가부장제, 여성혐오, 동성애 혐오, 외국인 혐오, 레드 콤플렉스” 등으로부터 단호히 절연하고 새로운 행위의 윤리적 근거를 자신 안에 마련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파국 아닌가? 이렇게 저자는 예수가 설파한 파국의 시간을 신비주의적인 메시아니즘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주체의 자기 윤리를 통해 실천 가능한 일종의 파레시아(parrhesia)로 제시한다.
그리고 유토피아
파국이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예비하는 사건이라면, 파국 뒤에 건설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꿈이 없을 수 없다. 수많은 디스토피아로 점철된 유토피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유토피아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유토피아에 대한 환상과 기대, 그리고 욕망이 없다면 어떻게 인류가 진보를 거듭해왔겠는가”, 205면) 이상철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검토하면서 유물론자를 신을 폐기한 존재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점근선에 위치하고 있는 존재”로 새롭게 규정한다. 속화된 유물론은 현실의 물질적 (생산) 관계와 그것의 변혁에만 골몰할 뿐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요청되는 “신학적 상상력”에 무관심하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반드시 기독교적 메시아의 도래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저자처럼 그것을 “하느님 나라”이자 “후천개벽한 세상”으로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리 역사 속에서도 그와 같은 유토피아적 충동이 담당해온 정치적 힘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따금 우리가 가진 희망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다른 세상’을 향한 은밀한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인문/신학은 자본의 질서를 거슬러 대안적인 삶의 질서를 모색하려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를 향한 은밀한 꿈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 은밀한 꿈은 19세기 말 이 땅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구체제의 억압 속에 신음하던 많은 민중이 함께 나눠 가진 것이었으며 한때 힘없는 노동자들 역시 현실의 고단함을 이겨내기 위해 기꺼이 수락했던 염원이기도 했다. 비록 한국 교회는 그 사람들의 낮은 마음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져버렸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파국과 유토피아를 향한 신실한 영성(spirituality)이 필요하다. ‘맘몬’이 교회와 인문정신을 모두 삼켜버린 지금과 같은 시대에 그의 인문/신학 비평이 반가운 이유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18.9.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