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신학은 민중과 고통을 어떻게 읽는가: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지금 이 땅에서 저 고색창연한 주체 ‘민중’을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민중’을 외견상 정치가 아닌 신학의 이름으로 소환했던 ‘민중신학’의 과거는 과연 현재적으로도 유효할까. 또한 여기서 그러한 ‘민중’의 고통을 ‘신학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이상철 외 지음, 분도출판사 2018)는 이렇듯 제목의 단어와 개념 하나하나의 문제 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책이다. 그러나 물론 똑같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같은 곳으로 똑같지 않게 돌아오는가, 민중신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펴보는 이 책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물음이 바로 이러한 (같으면서도 다른) ‘돌아옴’의 질문일 것이다. 이 흔하디흔한 ‘민중’이라는 이름, 그저 ‘그들’로 뭉뚱그려 호명되었던 또다른 ‘우리’의 이름을 어떤 다른 방식을 통해 새롭게 소환하는가, 바로 이러한 물음이 저 귀환 아닌 귀환, 회귀 아닌 회귀 앞에 던져진 새로운 민중신학의 과제이다.
고통받는 다중의 현실에 주목하며 예수의 기본정신과 기독교의 초심으로 회귀하고자 했던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의 이름을 가진 여러 신학적 시도가 있다. 현세의 부를 찬미하고 부패한 권력에 친화적이며 교회를 세습 가능한 재산으로 여기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맘몬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한국 주류 기독교의 현실에서 민중신학은 여전히 유의미한 해방과 구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한국에 만연해 있는 정치적·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양극화, 미투운동 또는 LGBT운동 등 여성/소수자 인권 문제와 외국인 또는 난민에 대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편견과 차별의 문제에 대해 취하는 극우적 입장을 생각할 때, 기독교가 과연 ‘여전히’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종교로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회의적이고 심지어 절망적이다. 이 시급한 지점에 이 책이 ‘민중’과 ‘신학’과 ‘고통’의 개념을 다시 물으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제3세대’라 불리는 민중신학의 새로운 세대가 주목했던 문제가 민중이라는 주체의 정체성과 그 ‘고통의 신학’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의 1부가 구성되는데, 타자와 소수자로서의 여성, 성소수자, 난민 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최순양, 박지은, 홍정호의 글이 특히 그러하다. 신학이 과거 일반적 해방과 구원의 관점에서 포착하려 했던 ‘민중’의 일반적 개념과 이미지는 우리의 시대에 서로의 ‘차이’를 통해 호명되고 또한 각자의 ‘현상’을 통해 그려져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민중신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바로 이 모든 주체 아닌 주체들이 지닌 새로운 타자의 모습, 곧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그러한 타자들이 지닌 새로운 여러 ‘얼굴’들이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고통이 어린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 책의 제목이 지닌 여러 문제적 지형들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며 돌파한 것은 3부의 첫 글인 「왜 고통이 중요하며, 왜 고통이 문제인가?」(정용택)이다. 이 글에 따르면 민중신학의 이 (오래되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얼굴이란 결국 ‘고통과 폭력의 신학적 현상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여기서의 고통은 ‘사회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사회적’이라는 수식어의 의미가 무엇이며 ‘민중신학’이라는 영역이 ‘사회적’ 조건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며 실행해야 하는가 하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물음의 재설정이 바로 이 글의 핵심이다. 사회적 고통이라는 것은 구조와 제도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지시와 표지에 의한 고통을 보편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되고 있다. 곧 민중신학이 이 시대에 새삼스럽게 다시금 주목하고 재설정해야 하는 문제 지형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사회적 고통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영성’의 문제를 새롭게 환기하는 「유혹하는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영성」(정경일) 또한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글이다. 매우 다양한 모습의 ‘민중’으로 주체화되는 타자들의 사회적 고통을 마주하고 이해하며 그 해방과 구원의 문제를 새롭게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이 시대 민중신학의 과제라고 할 때, 특히 이러한 ‘사회적 영성’의 문제는 ‘사회적 종교’가 떠안아야 할 시대적이고 정치적이며 따라서 가장 종교적인 임무가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하나의 중대한 지표가 된다. ‘영성’이라는 개념이 흔히 종교의 정신적이고 개인적인 부분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왔지만,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떠나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신학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정신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민중’만큼이나 그 현실적 실체가 불분명한 ‘영성’이라는 종교적 언어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이라는 규정과 조건을 통해서만 오히려 그 해방과 구원의 가능성이 담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강렬하게 이별을 고해야 할 것은 ‘정체성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민중’이 되었든 ‘영성’이 되었든,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되고 고정된 하나의 정체성은, 이 세상에 존재하나 아직은 미처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주체 아닌 주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만드는 틀이다. 그런데 정체성의 정치란 바로 이렇게 정치적 주체를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정체성들의 대립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구성되는 정치만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러한 개념틀에 의해서는 현재 사회가 드러내는 다양한 주체화의 문제 지형을 다 담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민중’의 개념이 그러하다. 민중은 어떤 주체인가, 그것은 기존하는 주체인가, 우리가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정한 주체는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인가. 이러한 근본적 질문들이 가닿는 곳은, 민중이라는 정치적 주체성이 선험적이고 사전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이라는 이름의 주체가 매번 다른 정치적 주체화를 통해서 새롭게 탄생하는 주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민중신학’이 주목해야 할 ‘민중’이라는 주체는 기존하는 계급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계층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민중’은 오직 매번 상이한 주체화를 통해 새롭게 탄생하는 주체, 아직 주체화되지 못했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이기에 새로운 주체화와 호명을 기다리고 있는 주체 아닌 주체를 가리키는, 아무도 아닌 이들의 모든 이름이 될 수 있는 개념이다. 민중신학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민중의 이름 아닌 이름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쫓겨남’의 사회적 현상을 통해 하나의 사건으로 주체화하고 또 주체화되는 이들을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제안하는 「쫓겨나는 민중: 젠트리피케이션과 오늘의 민중신학」(박재형)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또한 넓게 보자면, 아감벤이나 바디우 등이 비교적 최근에 각각 『남겨진 시간』(한국어판 강승훈 옮김, 코나투스 2008)과 『사도 바울』(한국어판 현성환 옮김, 새물결 2008) 등을 통해 새삼스럽게 바울론에 주목하는 이유, 또 국내에서도 김진호, 김성민 등이 각각 『리부팅 바울』(삼인 2013)과 『바울과 현대철학』(새물결플러스 2018) 등을 통해 바울의 새로운 철학적·종교적 의미를 탐색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러한 맥락에 위치해 있다. 권리 없는 자들의 권리를 사유하는 정치, 몫이 없는 자들의 몫을 (되)찾는 정치, 목소리가 없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다시) 갖게 해주는 정치는, 결국 바울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근본정신이 담고 있는 (일반적인 것이 아닌) 보편주의의 정치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 아닌 정치, 따라서 어쩌면 역설적으로 가장 ‘보편적’일 수 있는 정치의 기본정신을 잘 담은 것이 바로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오클로스는 복음서에서 병자, 세리, 창녀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비귀속적 박탈계층’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비귀속적’이라 함은 그들이 기존의 사회 구조 내부 어디에도 귀속됨이 없는 외부적 존재, 즉 그들만의 언어와 목소리가 없는 비존재라는 성격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오클로스라는 제도권 밖의 주체, 아직 주체가 될 수 없는 주체, 구조 자체가 배제해버린 주체, 곧 이 주체 아닌 주체야말로, ‘유언비어’라는 제도화되지 않은 언어를 통해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의 언어화를 시도하는 주체, 목소리로 채 인지되지 못하던 것의 목소리를 듣게 만드는 주체, 이제껏 몫이 없었던 자들의 몫을 찾아주는 주체, 포함과 배제라는 체제 내 구분을 넘어 아예 그 체제 안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이들에게 설 자리를 제공하는 주체, 따라서 주체화라는 정치적 과정을 기다리고 시도하며 구성하는 (비)주체이기 때문이다.
오클로스론은 최근 정치철학계에서 랑시에르나 바디우 등의 이론적 논의를 통해 기존에 정치적으로 주체가 아니었던 이들의 정치적 주체화, 이전에 사회적으로 규정되거나 구획되지 못했던 일들의 사회적 사건화 등, 또다른 개념들로 표현되고 있는 ‘민중’ 주체의 어떤 이면이다. 이러한 ‘오클로스’의 개념을 통해 민중신학은 ‘민중’이라는 개념을 주체화 이전에는 기존할 수 없는 새로운 주체로, 메시아라는 이름의 타자가 드러내는 아직 규정할 수 없는 사건의 얼굴로 새롭게 다시금 정의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운동의 신학’에서 ‘고통의 신학’으로」(김진호)는 바로 이러한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민중신학의 지나온 역사를 전반적으로 정리하면서 새롭게 일어날 ‘제4세대’ 민중신학이라는 또다른 ‘사건’을 기다리는 글로서, 앞서 말했던 주체화와 사건화라는 새로운 ‘민중’의 얼굴이라는 맥락에서 책 전체를 갈무리한다. 우리는 새로운 민중신학의 문제 설정이 현대 철학과 어떤 부분에서 조우하며 또 어떠한 주체화 과정과 그렇게 탄생한 주체들의 어떠한 사회적 고통에 주목하는지를 살펴보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고통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와 제도의 문제를 직시하고 이해하며 개혁하려는 노력이 왜 ‘신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전개되어야 하는가 하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일 것이다. 왜 이 모든 것들은,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이 아니라 굳이 신학이라는 이름을 단 채로 사유되고 행해져야 하는가. 이 책의 모든 글들은 이 질문에 직면하여 그에 응답하고 있는가, 아니면 ‘신학’이라는 범주를 이미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면서 그 틀 안에서만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가, 어쩌면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일 이 질문은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하나의 ‘종교적’ 아포리아가 지닌 ‘사회적’ 고통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직 이 물음에 대답하려 하지 말고, 우선은 이 책과 함께, 이 책이 숨기고 있는 이 또다른 근본적인 문제와 직면하자.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결국 이러한 모든 물음을 새롭게 묻는 일이란 교회라는 공간의 성격을 새롭게 정의하고 다시금 확장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에클레시아’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단순한 공간적 성전이 아니라 해방의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 아직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장소 이상의 장소라는 의의를 갖는다. 예를 들어 「민중신학의 교회론」(김희헌)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의 새로운 의미 설정을 촉구하는 글이다. 언제나 ‘교회’라는 이름을 통해 원리적으로 제도화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현실적으로도 끊임없이 제도화되는 공간에 그 공간 밖의 진정한 ‘공간적’ 의미를 다시금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그것이 단순한 공간이 아닌 ‘비공간적’ 의의를 갖는다는 사실을 새롭게 환기하는 것, 아마도 거기에 진정한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근본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묻자면, 왜 신학인가, 이 물음은 바로 이렇게 새롭고 근본적으로 이해된 ‘교회’라는 공간 아닌 공간, 사회 아닌 사회의 의미로부터 다시금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이 ‘교회’란, 거대한 주체의 연대나 특정한 종교의 집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 이미 어딘가에 속해 있고 무언가로 규정되는 존재들만의 집합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되는 것, 다시 말해 언제나 이 사회의 구조와 제도의 모든 규정들을 빠져나가는 존재 아닌 존재, 주체 아닌 주체들의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 아닌 공간으로서 기능해야 하는 것, 바로 이러한 가장 역설적일 사회적 고통의 직시에 이 모든 논의들의 중핵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고통의 시대를 읽는다고 할 때, 그 고통이 무엇이고 그 고통의 담지자는 누구이며 또 그러한 고통의 해방과 구원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묻는다고 할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주체화와 사건화의 정치적 자장 안에서만, 또 그렇게 이해된 ‘교회’라는 공간 아닌 공간 안에서만, 바로 그 ‘민중’을, 바로 그 ‘신학’을, 그리하여 다시금 새롭게 이해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저 오래된 단어 ‘민중신학’의 의미를, 다시금 물어야 할 것이다.
최정우 / 비평가, 미학자, 작곡가
2018.12.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