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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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전환의 여로에서: 백지연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사소한이야기의자유세상이 변하고 있다. 촛불이 타올랐던 광장의 열기가 식지 않고 이어져 정의가 무엇인지 묻고, 부당함에 대하여 힘을 합쳐 저항하고, 음지에 허술히 숨겨두었던 일들을 파내어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들이 벅찬 흐름을 이루게 되었다. 으레 ‘그러한 것’으로 치부되던 것들을 새로운 시선과 감수성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는 가운데, 우리 문학들 역시 과연 이러한 전환기에 스스로 무엇이어야 하고 또 무엇일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분연히 응답하는 중이다.

 

‘지금-여기’에 도착한 백지연 평론집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창비 2018)는 현 상황에 대한 ‘비평’의 가장 시의적절한 응답이면서도, 그러한 응답이란 어떠한 방식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적 부표까지 던져주는 듯 보인다. 도대체 작금의 상황에서 비평이 도맡아야 할 소임과 전망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페미니즘과 민주주의는 물론 공공성과 커먼즈(commons) 논의를 아우른 저자의 응답들은 이미 오래되기로는 2001년부터 집적된 결과물이다. ‘그 당시’의 ‘위기 상황’에 대한 첨예한 물음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던 흔적들. 그것들은 어떻게 ‘지금’ 우리에게 시의적인 응답이 되는가?

 

우선 저자의 ‘위기 상황’ 목록은 그 폭이 넓다.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 치솟는 실업률과 자살률, 점차로 가중되어가는 범죄의 강도와 마찬가지로 점차 가중되어가던 공권력의 폭력과 부정부패, 민주주의의 후퇴, 재난과 재해, 그리고 여성혐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중심적인 조건을 부식시키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 아닌가. 그러한 조건 인식하에 저자는 봉준호의 영화부터 김승옥까지를 아우르며 문학은 물론 문학‘적’ 텍스트들의 (무)의식적인 반응을 살피고, 그로부터 전망과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제1부 ‘한국문학과 공공성의 성찰’은 그러한 시도가 집약된 꼭지로서 이방인과 월경(越境)의 서사로부터 타자윤리의 변화를 읽고, 작금에 중요하게 부상된 사적 역사의 아카이빙 논의와도 맞닿는 르뽀르따주들의 가치를 조명하고 연대와 공동체의 문제를 ‘당위’도, 다만 ‘현상’으로서도 아니라 ‘차이를 직시한 질문’으로 환원하여 되묻기를 요청한다.

 

놀라운 것은 각각의 글들이 ‘그 당시’의 작품들을 읽어내는 감수성이 다만 지나간 흔적으로 남지 않고 여전히 유효하며, 어떤 의미에선 오히려 지금 더 첨예하게 부상한 현안들과 대단히 직접적으로 관계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저자가 배수아와 전성태, 공선옥을 경유해 이방인 서사가 “고통과 박탈의 경험을 표현하”며 “2000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지층을 형성하고 있”(14면)다고 진단한 첫 글만 해도 어떤가. 그것은 단지 10여년 전 문학작품의 지형변화이기를 넘어 미래에 도래할 사태와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대한 선명한 지침을 앞당겨 읽어낸 사례로 볼 수 있다. 2018년 제주도에 상륙한 예멘 난민은 실로 우리의 국경 안으로 타자가 새로이 스며들어오되 그들을 받아들일 의식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지체의 상태를 보이지 않았던가. “타자의 삶에 대한 각인과 관심” 그리고 “타자의 문제가 나의 일상, 나의 고독, 나의 자유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29면)에 대한 저자의 강조는 그저 ‘작품의 경향’으로 가벼이 읽고 넘어가기 쉽지만, 결국 더욱 거세게 회귀해온 현실의 사태 앞에서 소중하게 들춰보아야 할 예시(豫示)가 되었다. 반면 ‘불안의 시대’에 일상의 허위적 소통 양상을 깨고 “자기를 열어 다른 존재로 나아가”(38면)기를 꿈꾸고, 혈연에 기초한 ‘가족공동체’의 ‘바깥’에서 “‘함께-있음’의 관계”(42면)로 된 새로운 공동체를 희구하던 우리 문학의 감수성이 결국 광장의 촛불로 이어졌음을 다시 확인하는 일은 새삼 다행스럽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는 현재의 ‘전환기’가 완전히 전경화되기 이전, 한국사회의 ‘위기 상황’에 대한 예민한 당대적 감각을 바탕으로 문학들 가운데서 길어 올린 전환의 기미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근래에 비평의 새로운 소임과 역할을 모색하는 목소리들 가운데 ‘꼼꼼한 읽기’ 자체에 회의적인 쪽도 더러 없지 않은 모양이나, 백지연의 글들은 ‘위기 상황’의 인식하에 당대 문학과 시대의 호흡 사이에서 ‘전환기’의 미세한 기울기를 감지해내는 예민한 감각의 힘을 여전히 실감케 한다. 그러고 보면 이 저서의 한 대목이 ‘장편소설론’에 할애되어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장편소설은 정제된 형식미의 단편소설보다 당대의 사회문화적 맥락과 코드들이 풍부하게 투입되고 집적된 일종의 ‘사소한 이야기’들의 모자이크인바, 그 안에서 사회 현실과 개개인 사이의 다양한 관계망들을 포착할 수 있게 해주지 않던가. 요컨대 그것은 당대 현실에 대한 감각적 반응의 보고이다. “제때에 전환을 이루지 못할 경우 나라가 어떤 혼란과 난경에 빠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70~71면)이라는 백낙청의 세월호 ‘사건’에 대한 탄식을 염두에 두고, “비평이야말로 이러한 이야기의 해방적 힘을 이루는 분투의 상상력을 읽어내야 할 소임을 갖고 있다”(5면)는 저자의 전언을 받아 듣는다면 여전히 ‘꼼꼼한 읽기’는 당면한 위기와 전환의 요구 앞에서도 무기력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제는 여전히 있다. 그 문제라는 것은 간단치 않을뿐더러 나날이 복잡스럽게 뒤얽혀가기에 풀기가 쉽지 않다. 일종의 판단의 난경이랄까. 저자의 글들에서 그러한 난경과 분투한 흔적이 눈에 띄는 대목은 단연 제2부 ‘페미니즘과 공공의 삶, 그리고 문학’일 것이다. 그는 페미니즘이 사회적 변혁기마다 부상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혀왔다고 인정하며 지금 현재도 바로 그러한 시기라고 이해하면서도, 종전의 그것이 내포한 이분법적 프레임의 한계점을 돌파하고자 한다. 젠더와 혐오, 어머니상, 낭만적 사랑의 문제들에 있어서 ‘부정성’으로 치부되고 배제된 것들의 생산적 재독을 시도하는 것은 그러한 연유일 터. 특히 ‘여성혐오’의 맥락에서 ‘정전’들을 재독하고자 했던 흐름을 생각하면, 「도시의 거울에 갇힌 나르키소스」에서 펼쳐지는 저자의 김승옥 읽기에서는 ‘다르게’가 아니라 ‘더’ 읽겠다는 마음이 여실히 감지된다. 이미 숱하게 읽혀온 텍스트를 새롭게 읽는다는 건, 결국 우선은 다시 ‘읽는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하나 이때엔 다만 ‘다른 렌즈’만을 도구 삼아 보이던 것만 다시 보기가 쉬울 터. ‘더’ 읽겠다는 것은 채 의식에 포착되지 않았거나 (비)의도적으로 배제된 공간까지를 포섭하여 읽겠다는 각오가 아닌가. 그렇게 저자는 김승옥 소설에 나타난 ‘여성혐오’를 인정하면서도 시선의 지평을 모순되고 파탄된 인식이 은밀하게 강제되었던 60년대 근대경험까지로 확장시킨다. 이러한 대목에서 다시 한번, ‘꼼꼼한 읽기’의 힘을 체감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백지연이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이항대립 구도로 굳어진 근대 담론의 문제 자체라고 말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본디 유동적이고 양가적이었던 모더니티가 경질화되어 양가성의 한 축씩을 나눠들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데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소모적인 담론 자체를 ‘전환’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전환기’의 비평이 감당해야 할 소임이 아닐까. 그리하여 백지연은 간단하게 포착‧장악되지 않는 양가성의 난경 속으로 기꺼이 투신하여, 무수히 묻고 탐색함으로써 사태를 ‘직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잠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눈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잠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느 한순간의 의식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쉬운 믿음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 위기 상황과 전환의 기미들에 눈을 치뜨고 있다는 것은 한순간의 자문자답에 의해 완성되는 행위가 아닐 터. 차곡차곡 쌓아온 매순간의 과정들이 비로소 깨어 있으려는 몸짓을 만든다. 실천적 비평이자 비평적 실천이 만나는 지점이 그 어름이 아니겠느냐고,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를 덮으며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완전한 대답일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 채 기입되지 못한, 더욱 높아진 곤경들이 여전히 우리 몫으로 남아있다. 촛불혁명의 광장도 타자에 대한 배제의 논리와 여성혐오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 난민 거부의 한 축에 페미니즘이 놓여있었다는 사실 같은 새로운 난경들 말이다. 그렇다면 되묻자.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믿음은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얼마만큼이나 사실인가. 그것은 충분한 사실인가. 그것은 사실 약간의 변화일 뿐, 더 많은 오점은 은폐하고 더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는 것은 아니냐고. 아니나 다를까, 은폐되어 있던 부정(不正)이 매일같이 충격적으로 드러나는 요즈음이다. 전환은 완결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그 여로의 위다. 바야흐로 여전히, “곤경과 활로를 동시에 직시하며 작품과 함께 한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279면)는 때다.

 

김녕 / 문학평론가

2019.3.2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