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테러리스트가 칭송한 ‘단일민족 한국’과 지금, 여기의 불만들
지난 15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이민자 반대와 백인 보호를 외치며 총기를 난사한 태런트(B. Tarrant)의 선언문이 뉴질랜드 당국에 의해 소지와 배포가 금지되었다. 뉴질랜드 정부는 이 선언문이 헤이트스피치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살상과 테러 행위를 자극하려는 목적에서 쓰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같은 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70면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선언문에서 특히 중국, 일본, 대만, 한국 같은 단일민족 국가의 활약을 언급했다고 하여 이미 우리의 주의를 끈 바 있다. 이민자와 이슬람을 혐오한 나머지 90명에 이르는 무고한 이들을 살상한 한 백인 극단주의자에게 ‘단일민족 국가 한국’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국도 이제는 국가적으로 ‘단일민족’보다는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거나 다양한 ‘이민족’들과 섞여온 역사를 들어 ‘단일민족’은 단지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현실의 복잡성은 사실상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문제의 선언문에서 ‘단일민족 한국’은 하나의 정형화된 이상향으로서 제거되어야 할 ‘악’의 반대편에 서 있다. 한국에도 ‘복지낙원 북유럽’이라든가 ‘가난하지만 행복한 방글라데시’와 같이 성격은 매우 다르지만 우리 내부의 특정 이슈들을 문제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절대선으로서 정형화된 타자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다양성과 이민자를 절대악으로 간주하는 태런트의 상상 속에서 ‘단일민족 한국’은 그런 이상향으로 쓰이며, 여기서 ‘실제 한국’의 현실과 역사는 논외의 문제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일민족 한국’은 이제 뉴질랜드의 태런트, 또는 그가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노르웨이의 브레이비크(A. Breivik) 같은 백인 극단주의자들만의 절대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트-다문화’ 시대로 불릴 만한 현재 한국에서 ‘단일민족 한국’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전례없는 방식으로 재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이 개념이 국가 주도 경제성장과 근대화에 핵심적이었다면, 지금은 이주민과 난민을 반대하는 담론들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다. 여기서 ‘민족’은 더이상 전쟁의 참상을 딛고 일어나 경제발전에 힘을 모아야 할 그들이 아닌, ‘다문화라는 역차별’과 ‘난민이라는 공포’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자국민’ 또는 ‘일반 서민’의 모습을 취한다. 그리고 절대악은 무임승차하는 이주민과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난민이며, 절대선은 그들을 내보내고 다시 찾아야 할 ‘단일민족 한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런트의 선언문은 한국의 반다문화에서도 묘하게 동시대적이다. 태런트에게 도래해야 할 이상형으로서 ‘단일민족 한국’은 한국의 반다문화 담론에서도 문제 많은 현재가 아닌 도래해야 할 그 시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백인 극우주의자들과 한국의 반다문화주의자들은 분명 다르지만 또 같은 모습을 취한다. 이는 후자가 전자를 ‘다문화주의가 실패했음을 증명하는 실제 사례’로 반복해서 동원하는 과정에서 특히 강화된다. 하지만 다문화 대 반다문화, 이민 대 반이민, 또는 난민 수용 대 난민 반대라는 익숙한 구도는 그들이 강조하는 것만큼 현실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한국의 반다문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이른바 ‘민생 경제의 파탄’이며 이는 포스트 IMF 한국에서 누구나 지적해온 바로 그 문제 아닌가. 위기에 빠진 민생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주노동자 대신 국내노동자’에게 기회를 주고 ‘다문화가족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일반 서민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다문화는 반이민 담론이기 이전에 경제 담론이며, 더 정확히는 한국이라는 사회경제적 공동체 안에서 누가 더 정당한 노동과 분배의 자격을 가지는가와 같은 문제에 몰두한다. 반다문화는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족, 난민 등의 타자를 절대악으로 보는 이유로 인종적·민족적 차이를 강조하기에 앞서 그들이 한국의 발전에 어떤 공헌도 하지 않고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거나 도리어 안전을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반다문화의 논리는 일반국민의 지극히 합당한 요구로서 시민권을 획득한다. 공동의 안녕에 어떤 의무도 다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는 행동은 분명 이 시대가 가장 중시 여기는 도덕적 가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무임승차, 민폐, 역차별 등 형평성이라는 가치에 어긋나는 듯한 상황에 과도한 반응을 보여왔고, 그 분위기 속에서 반다문화의 문제제기는 합법성을 얻는다. 반다문화는 형평성의 과잉 강조 속에서 어느 누구도 ‘OO충’으로 명명될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금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특권인 ‘한국인 됨’에 대한 강박을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한국인’으로서 안전망을 보장받기 위해 반다문화는 부당한 특권의 수혜자 또는 기생충으로서의 이주민이라는 상에 매달린다. 여기서 ‘민족’은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이야기했듯이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해방의 공동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박탈을 상상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부정형에 가깝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다문화의 정동은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무한 재생되는 중이다. 여기서 관용과 포용을 영혼 없이 반복하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일일 뿐이다. 단순히 배타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스스로를 새롭게 단장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전의령 / 전북대 교수, 인류학
2019.3.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