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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와 ‘국론 분열’ 담론

김태우

김태우

처음엔 그저 말실수려니 생각했다. 아니면 관련 발언의 맥락을 무시한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의 과장된 해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3월 14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분명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 해방 후에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또다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해주실 것을 말씀드립니다.” 나의원은 이튿날 의원총회에서도 반민특위 활동이 “국론 분열”을 가져온 면이 있다고 재차 언급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48~49년 반민특위 활동 당시에도 국론 분열 담론이 존재했고, 7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도 비슷한 담론이 여전히 운위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국론 분열’ 담론에서 거론된 당대 ‘국론’의 실체는 무엇일까? 반민특위 활동은 실제 그 국론을 분열시켰을까?

 

미군정을 위협한 친일파 청산 여론

 

1945년 8월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은 절대 다수가 동의하는 시대적 과제였다. 새 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적 과업 앞에서 일제에 적극적으로 헌신했던 사람들을 청산하는 일은 당연한 사회적 선결 과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38선 이남지역에 진주한 미군은 당대 민중의 보편적 소망과는 달리 공권력에서 친일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소위 ‘현상유지정책’을 채택했다. 실제 미군정청 중앙행정기구, 법원, 경찰 등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일제 시기 고위 관리들이 자신의 직위를 유지‧강화했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바닥민심에 가장 큰 악영향을 준 것은 미군정의 ‘일제 경찰력’ 활용 정책이었다. 이를테면 1946년 11월 현재 경위 이상 직급 경찰 1157명 중 무려 949명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활개 치며 돌아다니는 ‘일제 순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광범한 사회적 분노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의 정치‧경제정책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결국 10월항쟁이라는 전국적 규모의 민중항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이 항쟁은 이내 제2의 3‧1운동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가 73개 시‧군에서 12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대구‧경북지역에 국한해 살펴보아도 당시 전체 인구 317만 8750명 중에서 항쟁에 참여한 연인원이 77만 32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항쟁의 원인을 분석하여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실제 미군정은 이를 위해 조선인 정치인들과의 공식적 회의기구를 만들었다. 미군정 최고위급 인사들과 김규식‧원세훈‧여운형 등이 참가한 소위 ‘조미공동회담’이 꾸려진 것이다. 이 회담은 1946년 10월 23일부터 12월 10일까지 27차에 걸쳐 10월항쟁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 논의했다. 회담에서 거론된 항쟁의 원인은 크게 인사, 경제, 정치 세 범주로 나뉘어 논의되었는데, 미군정 미곡수집계획과 국가건설 지연 등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실제 회담 진행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문제는 ‘인사’, 즉 경찰과 군정청 내의 ‘친일파’ 청산 문제였다. 회담 참가자들은 민중의 주요 공격 대상이 경찰지서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회의 출석 증인의 대부분이 조병옥‧장택상과 같은 경찰 최고위급 인사로 채워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회담의 최종결과로서 작성된 조미공동회담 건의안의 제1항은 “일제시대 경감 이상으로 복무했거나 그 행위가 경찰제도 안에 확립된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경찰들을 점차적으로 제거할 것”을 제안했고, 제2항은 “군정은 군의 명부에서 가능한 모든 ‘친일파’의 기록을 찾도록 지시할 것, 그리고 군정법령 제118호 2항에 규정된 악명 높은 친일파는 가능한 한 빨리 애국자로 대체할 것”을 권고했다. 이상의 권고사항들은 미군정 내에서 진지하게 공론화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압도적인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미공동회담 종료 이틀 후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좌익과 중도세력의 절대다수가 참여를 거부했던 1948년의 제헌국회에서조차 의원들의 절대적 지지(재적 141명, 가 103명, 부 6명)하에 ‘반민특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에는 당대의 압도적인 친일파 청산 ‘국론’이 있었다.

 

국론 분열을 말하는 사람들

 

이렇듯 반민법과 반민특위의 존재는 당대 민중의 압도적 국론의 반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미 그 당시에도 반민법 제정 및 반민특위 활동과 관련하여 ‘국론 분열’을 운운한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1948년 8월 26일 국회의원 숙소와 시내 각처에는 “민족을 분열하는 반족안(反族案)을 철회하라”는 전단이 살포되었고, 9월 23일 반공구국총궐기 국민대회에서는 “동족 간의 화기를 손상케 하는 반민법을 시정”하라는 결의안이 발표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직후 시점에 조용히 침잠해 있었던 친일파들이 1946년 초 찬‧반탁 운동의 ‘국론 분열’ 과정에서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반탁론자)’로 분식시킬 기회를 잡았던 사실을 회고해 보면, 반민특위 활동과 관련해 다시 분열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독일에서는 한 축구경기 관람객이 “하일 히틀러”(Heil Hitler)를 외치면서 일부 국가대표 선수들을 모독한 사건으로 꽤나 시끄럽다. 현지에서는 이를 ‘나치 스캔들’이라고 부르면서 수배와 조사에 돌입했고, 전세계 언론들이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폭동’ ‘괴물집단’ ‘국론 분열’ 등의 적대적 담론을 쏟아내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반민특위 등의 역사적 성격을 훼손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다. ‘국가 신뢰 회복’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과거사 관련 활동에 대해 적대적 혐오발언을 쏟아낼 수 있는 한국사회의 평화 감수성에 대해 새삼 재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촛불로 촉발된 현시대 한국 민주주의와 평화의 일대 고양에도 불구하고, 폭력적 분단체제의 관성은 여전히 생동함을 느낀다.

 

김태우 / 한국외대 교수, 역사학

2019.3.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