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호랑이 등에 올라타려는 모든 김의겸들께
“바지끈 우지끈” 하고 시작하는 민중가요 「달동네의 부푼 꿈」의 후렴구는 다음과 같다. “여보야~ 이번 임투에는 주택수당 따냅시다, 영원한 우리 집 만들어봅시다”. 그렇다. 이른바 전투적 노동운동도, 국가를 상대로 공공주택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회사로부터 수당을 더 받아내어 ‘내 집 마련’하길 꿈꾼 것. 각자도생의 전통은 깊고 넓다.
마지막 구절에서 “주택정책은 모두모두 뻥이야”라 한 것은, 자식에게 포르쉐를 사주기 위해 전세금을 올린 장관 후보, 진보적 언론인 출신 청와대 대변인이나 담당부처인 국토부장관 후보가 부동산 문제로 사퇴·낙마하게 된 2019년을 냉소적으로 예견한 걸까. 그러나 주택수당으로 모두가 자기 집을 가진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원래 집은 비싸거든요. 한푼도 안 쓰고 20년 모아야 간신히 살 수 있는 집이 반값 주택이 된들, 10년 동안은 어디서 사나요. 저축해서 현금 주고 집 살 수 있나요. 빚 내주는 시스템 없으면 절대 집 못 삽니다~
그렇다고 무리하면 큰일 난다. 사회 전체가 큰일 난다. 실제로 십여년 전의 미국발 국제금융위기는, 갚을 능력 안 되는 사람들에게까지 무리하게 대출해주고 집을 사게 만들어서 생긴 결과다. 미국 말고, 우리가 흔히 복지국가로 꼽는 나라들이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복지국가가 된 건 아니다. 이들의 자가점유율을 보면 대개가 55~60% 언저리로 한국과 별 차이가 없다. 요는 세입자들이 얼마나 마음 편하게 사느냐가 복지국가의 관건인 것. 어쩌면 이 복지국가들은, ‘모두가 자기 집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일찌감치 감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편 모두가 자기 집을 가질 수 없다고 해서, 모두가 공공주택이나 사회주택에서 살 필요 또한 없겠다.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자기 집을 소유하고 가꾸며 사는 건 본인들도 좋고, 덕분에 공공의 재원을 다른 데 쓸 수도 있겠다. 그러니 김의겸 전 대변인 정도 되는 분이 자기 집을 가지려 하는 것 자체야 탓할 일은 아니다. 30년간 전세에 살았고, 하는 부동산 투자마다 실패했다며, 그가 그동안 ‘고생’하며 살았던 것을 잘 아는 분들은 가슴 아파하기도 한다. “이 나이에 전세 살기 싫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실거주용이라고 하기엔 다소 통이 크게, 16억의 타인 자본을 빌려 25억짜리 부동산에 일생일대의 베팅을 했다. 알고 보니 임대수익도 기대했다고. 물론 대출을 받더라도 이자보다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면, 현명한 레버리지 투자가 되겠다. 은행대출만 해도 10억이 넘는다니, 연 3%로 치면 매달 250만원 넘게 이자를 내야 하지만, 누군가 충분한 임대료를 부담해주거나, 나중에 시세차익이 충분히 된다면 남는 장사다. 당신도 이렇게 다주택자나 건물주가 될 수 있다.
사실 난 다주택자에게 감사하다. 당장 집을 구매할 돈은 없지만 어디선가 살 집은 필요하니, 누군가는 집을 짓고 누군가는 그걸 사들여 세를 내줘야 내가 거주할 것 아닌가. 건설회사야 돈 벌러 집을 짓는 것이니, 누군가 돈 있는 분이 집을 사줘야 하는 노릇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느 회사가 짓겠으며 난 당장 어디에 살겠는가.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입자가 없으면 집주인들도 벽을 뜯어 먹고 살 순 없잖아요. 모두가 건물주가 되면, 건물주들도 다 굶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 서로 고마워하면 좋겠는데 말이다, 세입자는 많고 집주인은 적다보니 서로 감사하기보다는 갑의 횡포와 을의 원성이 커져왔다. 여러 세입자 보호대책이나 공공임대주택 정책이 나온 배경이다.
그런데 공공임대주택 말고 사회주택도 있다. 제3섹터, 혹은 사회부문의 성장에 따라 주택문제도 사회적으로 함께 해결하자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사회적 가치와 함께 비영리, 혹은 최소의 이윤을 추구하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이 있다. 여기엔 비싼 이자의 은행대출 대신, 저리의 공공자금이 투입된다. 토지임대부 주택에는 땅도 싸게 빌려준다. 시세차익을 입주자들이 나누어 가지면 안 되고 마음대로 비싼 임대료를 받지 않는 조건이 붙지만, 굳이 끝없이 달려야 하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비싼 대출이자를 감내하며 그보다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 정도의 자금으로도 세입자의 설움 없이 주거안정을 누리려는 사람들에겐 안성맞춤이다. 흔히 협동조합 주택, 공동체주택 등으로 알려져 있다. 입주자의 소득제한은 없지만 넓은 의미의 사회주택이고, 서울시에서는 아예 공동체주택이라 명명했다.
마음에 맞는 이웃과 함께 처음부터 주택의 설계과정에 같이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공동체가 구성되어 초기자금도 모으고 회의도 자주해야 할 터. 그럴 시간이나 자금이 없는 분들, 예컨대 청년 1인가구들을 위해서는 사회적 기업 등이 일단 집을 짓고 임대하며 커뮤니티 공간 및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도 있다. 좁은 의미의 사회주택이라 할 수 있다.
참 아쉽다. 그를 아끼는 분들도 많던데, 진작 (나를 포함해서) 누군가 사회주택이나 공동체 주택을 권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달 250만원의 이자를 내야 하면, ‘월세가 안 들어오면 어떡하나’ 마음 졸이고, 빨리 개발되길 바라며 마음이 급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선 자리가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호랑이 등에 올라타면, 풍경이 확확 달라질 텐데. 행여나 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거나 못 나가겠다고 버티는 세입자가 있다고 야속해하게 될 텐데. 물론 그 정도로 그릇이 작은 분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런 인품으로, 그리고 16억원의 빚을 내어 25억짜리 부동산을 사들일 역량과 배포로, 주택협동조합이라도 만드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회주택 입주자 소득기준을 초과한다면, 자신은 공동체주택을 만들어 입주하되 한켠에는 사회주택도 같이 넣는 세대 간 연대까지도 시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더불어 같이 살며 적당하게 임대료도 받을 수 있는 집을 만들었다면, 진보적 언론인 출신 고위공직자의 은퇴 전략으로 얼마나 좋았을까. 저기요, 사실 저도 시세차익이 보이는 물건을 보면 솔깃할 때가 없진 않습니다만, 그러지 말고 서로 타이밍 맞춰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면 어떨까요?
최경호 / 한국사회주택협회 정책위원장
2019.4.1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