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차명진 망언을 제압한 힘
세월호참사는 촛불혁명의 무의식
세월호참사 5년째인 그날을 차명진 전 의원의 망언(妄言)으로 맞게 된 건 모두에게 무참한 일이었다. 더욱 서글픈 건 그의 말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 단발성 실수가 아니라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노림수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가 썼다는 글을 읽으며 2014년 9월 일베 회원들이 광화문광장에서 벌인 폭식투쟁을 떠올렸다. 이들은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조롱하고 고립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챙기려는 비열함을 공통분모로 나눠 가지며 우리에게 ‘인간됨의 조건’을 참담한 심정으로 거듭 묻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차명진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촛불혁명 이전의 수치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현 시국을 국민들이 촛불혁명에 투여했던 기대와 열망을 손절하는 시기로 파악하는 사람이라면—더구나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한번쯤 해볼 만한 베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공학적 계산이 빠지는 함정은 그 표면적 합리성의 덫이다. 그와 같은 합리성은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현상과 본질을 구별할 의지와 능력이 없는 청맹과니 같은 자들이 정치공학으로 정치를 대체하면서 정치혐오의 풍조를 조장한다(정치혐오는 정치공학이 작동하기에 맞춤한 최고의 환경이다).
망언(妄言) 위의 망언(望言)
국정농단 사건이 촛불혁명의 ‘의식’에 해당한다면 세월호참사는 촛불혁명의 뿌리 깊은 ‘무의식’이다. 이 무의식은 정치공학적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차명진 같은 사람으로서는 결코 읽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의 무의식에 가닿고자 하는 행위는 ‘전이’의 공포까지 감당하면서 이루어지는 실존의 기예(art)인바, 차명진 같은 정치인이 공동체의 상처받은 사람에게 그와 같은 정동의 얽힘을 허락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과 기꺼이 마음을 얽어맨 다수 국민들의 마음도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그의 말을 제압하는 데엔 단 하루의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차명진은 쏟아지는 국민들의 분노 어린 비난에 결국 글을 삭제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며 자유한국당은 윤리위 회부를 약속하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촛불 이전으로 돌아간 건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일 뿐이지 촛불시민들의 (무)의식은 아니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다짐이 곧게 서 있지 못했다면 아마 이같은 신속한 제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차명진의 망언(妄言)에 단호한 망언(望言)으로 맞섰다. 유가족들의 아픔과 고통의 곁에 서고자 하는 바람의 언어가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고립시키고자 하는 분열의 언어를 극복했다.
차명진의 망언이 알려지자마자 세월호 특별수사단 설치 청원이 폭증했다는 사실도 시사적이다. 안순호 4·16연대 상임대표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차명진의 발언에 분노한 촛불시민들이 다시 한번 자발적으로 힘을 모았다고 밝힌 바 있다.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는 그 목소리는 끝내 가라앉은 자들을 기억하겠다는 다짐의 언어와 나란했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언어는 2014년 이후 한번도 발설되기를 그친 날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차명진 같은 이의 망언을 제압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근원이었다.
제주에서 맞는 ‘304 낭독회’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진 곳은 다양하지만 내가 속한 문학 현장으로 좁히면 단연 ‘304 낭독회’가 눈에 띈다. 304 낭독회는 세월호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작가들과 시민들이 함께 만든 애도와 다짐의 공간이다. 2014년 9월 광화문광장에서 처음 열린 이래 한번도 거르지 않고 한달에 한번씩 서로의 글을 낭독하고 있다. 이번 달 쉰일곱번째를 맞이하는 304 낭독회는 그 조촐하고 소박한 자리가 우리의 말이 짐승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인간의 가치를 지켜내는 싸움의 성실한 무기일 수 있음을 증명해왔다.
쉰일곱번째 낭독회는 5년 전 세월호에 탑승했던 이들이 닿고자 했지만 끝내 닿지 못했던 곳 제주에서 열린다. 제주에 산다는 이유로 초대받은 나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희망의 조건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다. 차명진은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차명진 같은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차고 넘친다. 면역력이 약해지면 발병하는 바이러스처럼 그 짐승의 마음은 떨쳐 일어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 무참한 마음들과의 싸움은 길고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서로의 목소리를 나눠가지고 그 목소리가 빛보다 멀리 가리라는 믿음을 공유하는 한, 싸움의 미래는 그리 어둡지 않을 것이다. 304 낭독회는 그런 희망적인 낙관을 두 손에 가득 받아안게 만드는 소중한 장소이다. 304 낭독회가 계속되는 한, 한국문학은 결코 세월호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19.4.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