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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하고 불안하고 위태롭지만: 정원 『올해의 미숙』

『올해의 미숙』, 창비 2019.

『올해의 미숙』, 창비 2019.

미숙은 태어나서 장미숙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미숙에게는 시를 쓰지만 무능한 아버지가 있고, 제 꿈만 좇는 이기적인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어떻게든 생계를 책임지려고 하는 어머니가 있고, 어릴 때부터 부모의 냉대와 무관심에 주눅이 들어버린 언니가 있다. 이들은 모두 어린 미숙을 보살피거나 사랑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고, 이들이 미숙에게 주어진 가족이다.

어린 미숙이 보는 것은 책상 앞에 앉은 아버지의 울분에 찬 뒷모습이고, 결코 웃지 않는 어머니의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표정이고, 부모에게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대신 허벅지를 꼬집으며 입을 다문 언니의 모습이다. 이들이 어린 미숙에게 강요하는 것은 요구하지 않고 바라지 않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받아들이고 침묵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던진 책에 맞아 얼굴에 상처가 나고, 그 상처가 흉터로 남는 동안에도 미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친구들이 자신을 ‘미숙아’라고 부를 때에도 미숙은 언니에게 딱 한번 그 이야기를 할 뿐이다. 가난한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부모에게도, 놀림과 조롱, 무시로 일관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미숙은 늘 투명인간처럼 서 있다. 매일 밤 어둠 속에서 언니의 등을 바라보며 어렵게 꺼낸 말들조차 퉁명스럽고 무관심한 대답으로 돌아왔으므로 미숙은 입을 다물고 참고 견디고 물러서고 주저하고 머뭇거리다가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재이를 만난다. 재이는 미숙이 가지지 못한, 혹은 결코 가질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것들을 가진 사람이고, 좋고 싫은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사람이고, 원하는 것을 가지려 하는 사람이고, 하고 싶은 것을 거리낌 없이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며, 미숙에게 처음으로 좋은 것들을 준 사람이다.

미숙에게 재이는 매일같이 만나도 좋은 사람이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런 따뜻하고 다정한 누군가가 존재할 수 있음을 미숙에게 가르쳐준 사람이지만, “시인인 아버지가 엄마를 죽도록 패는”, “허벅지를 매일 꼬집는 언니가 동생을 죽도록 패는”(234면), 미숙의 내밀한 가족사를 아무런 고민 없이, 반성 없이 소설로 써버린 사람이며,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훼손해버린 사람이기도 하다.

재이의 이 마지막 행위로 인해 누군가와 공고한 우주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그 우주 안에 담겨 있었고, 또 담을 수 있었던 것들. 그 우주가 미숙에게 주었고, 줄 수 있었던 가능성들 또한 망가져버린다.

“내가 우습니? (…) 내가 우습냐고!”(237~38면)

마지막 만남에서 미숙은 재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무례하고 부당하고 제멋대로 구는 타인에 대해 처음으로 그렇게 소리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미숙이 선택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이후 미숙은 아주 멀리 있다고 여겼던, 자신이 손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삶을 자신의 쪽으로 조금씩 당기기 시작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아끼던 강아지 절미를 데리고 가족으로부터 독립한다.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떨어져서 보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의 삶은 누구나 그런 것처럼 얼마간 가혹하고 소외되어 있으며, 그들로부터의 그 거리를 통해 미숙은 누구에게나 삶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헤아리게 되고 받아들이게 된 건지도 모른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뿐만이 아님을. 모두가 미숙한 채로 난생처음 주어진 삶을 어쩔 줄 모르는 채로 견디고 감내하고 있음을. 다들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얼마간 의지하고 빚진 채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모른 채로 살아가고 있음을 배우게 된 건지도 모른다.

절미와 함께 숲길을 산책하고 있는 마지막 장면의 미숙은 이전의 미숙과는 다르게 보인다. 아니, 어딘가 분명히 달라진 사람 같다.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 내가 나 자신에게 조금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다는 믿음.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가질 수 있다는 확신. 그런 것들로 인해 미숙이 자신과 무관하게 흘러가던 삶을 조금씩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디지만 놀랍고 아프지만 감동적이다.

‘올해’의 미숙은 여기까지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혹은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던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미숙의 변화는 결코 사소하지도 미미하지도 않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여기까지. 올해는. 내년에는.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미숙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다만 책 속의 한 인물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만 말한다면 누구나 짐작할 법한 성장담에 대한 너무나 흔한 감상일지도 모르겠다. 그 진폭만을 놓고 본다면 대부분의 변화는 미약하고 더디고 그래서 미숙의 삶이 전보다 더 나아질 거라고 말할 수도 없다. 뭔가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받아들인다고 해서, 삶이 만만해진다거나 단번에 호의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미숙은 여전히 미숙하고, 그래서 불안하고 위태롭게 보인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솔직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작은 진폭을 만들기 위해 쏟은 한 사람의 안간힘은 누군가와 같을 수 없고, 그래서 결코 작을 수도 없다. 어쩌면 당연하지만 쉽게 잊고 마는 이 보편적인 진리가 큰 위안이자 위로가 된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에 수록되었습니다.

 

김혜진 / 소설가

2019.6.1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