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품격 있는 그의 삶과 언어가 그립다: 故 노회찬 1주기를 맞아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일년이 지났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빈자리를 아쉬워한다. 그가 없는 지금,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역설적으로 그의 존재감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과연 그 빈자리는 채워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를 1992년 4월에 처음 만났다. 당시 민중당은 총선에서 2% 벽을 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냉정한 현실의 벽은 많은 동지들에게 좌절을 안겼다. 그런 동지들 앞에 감옥에서 갓 출소한 그가 나타났다. 그는 민중당이 실패한 것이지, 이 땅의 노동자와 민중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인사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의 말은 고지식한 원칙을 강조한 것이었고, 흔들림 없이 나가자는 다짐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최고의 조직가답게 흔들리는 동지들을 추스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군더더기 없이 제시하려 했다. 훗날 그의 상징이 된 촌철살인의 언어, 재치있고 정곡을 찌르는 비유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치열하게 진보정치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던 고지식하고 원칙적인 노회찬 선배! 드루킹의 덫에 걸려 힘들어하고 있을 때 곁에 있지 못했던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아직도 나의 가슴을 후벼 판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고 삶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말과 삶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그의 삶이 재미없는 ‘모범생’의 그것처럼 보였기에 나도 처음에는 낯선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그는 그런 삶을 즐겼다. 끊임없이 재미있는 말을 만들어냈고, 새로운 관심사를 드러냈다. 그의 삶은 결코 딱딱하고 비장한 운동권 인사의 삶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회와 농성장을 찾아다니면서도 그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채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냈다. 음악과 요리, 술과 낚시 등이 그런 예일 텐데, 핵심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벗으로 만들어내는 노회찬의 친화력이었다. 그래서 그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을 때, 저마다의 노회찬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오열했고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실사구시를 강조한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을 바꾸어내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비판적 현실주의자였다. 이상을 품고 있었지만 현실의 역관계를 고려했고, 대중적 현실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말이 통하는 사람과 대화했고, 토론했다. 진보의 가치를 드러내줄 현장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고, 무슨 분야든 공부했다. 나는 그처럼 정책연구자를 존중했던 정치인을 본 적이 없다. 현장을 돌고 자료와 씨름하면서 살아 있는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정책일꾼들을 좋아했다. 그들의 성과는 노회찬의 손을 거쳐 실질적인 정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의 정책들은 그렇게 그와 함께 만들어졌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는 살아 있는 진보의 에너지를 찾아다녔다. 그의 언어는 그 속에서 단련되고 만들어졌다. 그의 품속에는 언제나 작은 수첩이 있었는데, 그는 술을 마시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꺼내 기록하곤 했다. 어느 정도는 천부적 재능도 작용했겠지만 적어도 나의 눈에 그의 언어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는 품격있는 정치언어로 소통하는 고급 정치인이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말과 가짜뉴스를 생산해내는 저급한 정치꾼들과는 질이 다른 언어를 구사했다. 그의 언어는 정곡을 찌르는 비유, 대중적 현장감이 있으면서도 간결하고 명쾌했다. 또 실사구시에 바탕을 두면서 현실을 바꾸고 미래를 설계하려 했으며, 혼란 속에서도 공감을 이끌어내려 했다. 그와는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도 그의 언어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국정치는 그래서 그의 빈자리가 크다.
노회찬 의원은 남북관계,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진보진영 가운데 누구보다 앞장서 두개의 국가체제를 인정하는 가운데 평화공존과 통일을 모색해야 한다는 ‘국가연합 통일방안’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그에게 통일은 기형적인 남북한 사회를 변혁하는 새로운 국가 만들기였다.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화해와 공존의 길, 평화의 길이 곧 통일이었다. 또한 그는 진보정치의 국제연대에도 관심이 많았다. 서로 다른 경험과 성과를 나누고 힘을 모으고자 했다. 멀리 브라질 노동자당, 미국의 노동자들, 그리고 일본의 진보정당과 시민단체들과도 토론하고 연대했다. 서로 언어와 피부색이 달라도 존엄하고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가치는 다를 수 없다는 믿음은 그를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드문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토오꾜오에서 일본의 진보정당, 시민단체들과 아베와 일본회의를 비판하는 토론회, 시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더욱 그립다.
질 낮은 한국정치는 여전히 노회찬의 그림자를 붙들고 있다. 그의 빈자리는 여전히 크고 그를 대체할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 그의 1주기를 맞아 많은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그의 빈자리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가 있어서 스스로의 삶에 생산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었던 그 기억들을 소환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를 좀더 편안하게 기억하고, 보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가 없는 현실은 계속되는데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아직 홀로 서지 못하고 있다.
윤영상 / 정의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19.7.2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