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주전장」이 말한 것과 놓친 것
이 다큐를 보고 ‘입트페’(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진 책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이민경, 봄알람 2016)가 떠올랐다. 성차별적 현실 가운데 여성들이 느끼는 일상적 불안과 공포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자주 축소되거나 부인되곤 하는데 이런 상황에 맞닥뜨려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일종의 실효적 대응매뉴얼 또는 반박용 지침서처럼 받아들여져 널리 주목받은 바 있다. 「주전장」(미키 데자키 연출)에는 마치 성차별 메커니즘에 무감한 남성들에게 ‘입트페’가 그런 것처럼 일본군 전시위안부 문제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려는 ‘세상의 모든 극우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이 명료하게 정돈되어 있다.
가령 일본군 ‘위안부’는 보수를 받았기 때문에 ‘성노예’가 아니라 ‘매춘부’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노예도 때로는 임금을 받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노예 되기가 자발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고 명확히 맞받는다. 여기서 일본 극우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극우’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는 점은 재차 강조될 필요가 있다. 부인론자나 수정주의자들이 일본에 상대적으로 많은 건 사실이겠지만 이 다큐가 잘 보여주듯 그들은 미국에도 있고 남한에도 적지 않으며 더 넓게는 젠더적 각성을 경계하는 세계 도처의 ‘여성혐오’ 문화와 구조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전장」은 ‘여전히’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다.
사실 이 영화는 저널리즘의 차원으로 접근하는 게 더 적합할 듯하다. 3년여에 걸친 취재와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이 다큐가 하고 있는 일은 쟁점을 압축하고 그와 관련해 대립하는 양측의 대표적 견해와 논거들을 마주 세운 뒤 어느 쪽이 더 사실과 진실에 부합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본회의’ 같은 극우들이 내세우는 전거가 얼마나 왜곡된 것이며 사실 자체에 대한 부인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조목조목 폭로한다. 하지만 이런 대증요법만으로는 점차 효능감이 떨어진다고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 지금까지 일본극우의 득세를 제어하지 못한 것은 논리와 증거가 부족해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석과 평가의 차이를 떠나 전시 종군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심지어 난징대학살(1937) 같은 사건도 완벽히 날조된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어떤 논리가 효력을 발휘하겠는가.
오히려 이 다큐의 의의는 일본계 미국인인 감독 자신이 그랬듯, 이 문제에 관심이 전혀 없거나 덜 익숙한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관객에게 극우주의자들 자신의 표정과 목소리를 직접 보여주고 들려줌으로써 그들이 어떤 심리적 메커니즘 속에서 그런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는지, 그것이 왜 강 건너 남의 얘기만은 아닌지를 관객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끔 적절히 인도한 데 있을 것이다. 물론 극우주의자들의 망상과 콤플렉스를 강화하는 확증편향 못지않게 그들의 세력화와 정치적 득세 뒤에 숨은 국제정치적 맥락, 그러니까 구조적 인식에 도달할 길을 터준 점도 이 다큐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주전장」이 지목한 예의 구조적 배후는 역시 미국의 패권주의다. 일본 극우의 목표는 평화헌법 9조의 개정을 통한 일본의 재무장화이고 그것은 제국일본 시대를 그들이 회복해야 할 ‘오래된 미래’로 상상하기 때문이며 그 지렛대는 중국의 부상에 맞서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재편하려는 미국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듯하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한다는 외조부 키시 노부스께(岸信介, 1896~1987)는 패전 후 1급 전범으로 복역 중이었으나 일본을 대(對)공산주의 방어선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던 GHQ에 의해 석방, 재무장화를 목표로 미일안보조약(1951)의 개정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전쟁과 분단을 먹이로 성장해 장기집권에 성공한 자민당과 극우세력에게 탈냉전은 남한 수구기득권세력이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기를 뜻했다. 한중수교(1992)에 이은 남한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일본에서 자민당이 단독정권 구성에 실패하고 연립정권 시기로 들어선 것도 일본 내 정치의 작용으로만 설명하긴 어렵다. 한일청구권협정(1965)이 새로 도마에 오르고 최초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정과 사죄를 담은 코오노 담화(1993)가 나온 것도 이 시기다.
하지만 일본의 재무장화는 결국 미국을 위한 전쟁(가령 호르무즈해협 파병 같은)에 동원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주전장」의 최종 경고는 일리가 없지 않음에도 영화 후반부에서 시도된 구조적 인식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동아시아는 연동한다. 우선 한중일 각자의 조건들이 일본의 군국주의시대는 물론 청구권협정이라는 인위적 조치로 한일 역사갈등을 임시 봉합함으로써 미국주도의 한미일동맹을 강제할 수 있었던 시기와 크게 달라져 있다. 남한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따른 최근 일본의 보복적 수출규제조치도 따지고 보면 한미일동맹이라는 해묵은 패러다임의 균열 징후다. 촛불혁명으로 분단체제 변혁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한반도 정세와 중국의 비약적 성장은 무엇보다 중대한 변수다. 이런 가운데 야스꾸니신사로 상징되는 군국주의 부활의 몽상만으로 일본의 재무장화가 정연하게 이뤄질 것인가? 얼마 전 치러진 일본 참의원선거 결과가 말해주듯 일방통행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중국의 패권국 부상을 경계하는 미국의 계산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을 직접 견제하는 ‘무역전쟁’을 치르는 한편, 아베정권을 고리로 일본의 재무장화를 견인하면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선 데는 아마도 일관된 맥락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남북과 일본의 관계가 순탄치 않다. 일단 남한과 일본의 긴장이 커진 것은 차치하고라도 북한은 일본이 역사 갈등의 국면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한일청구권협정에서 거의 완벽히 자유롭다. 따라서 남한과 긴장하면서 북한과 유화하려는 일본의 어정쩡한 태도는 남북관계의 진전 여부에 따라 언제든 유동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자주 잊히곤 하지만 한일 역사갈등은 한반도 전체와 일본 사이의 문제이지 남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실상 남북연합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 한반도 정세의 극적변화가 아니었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갈등의 주전장으로 소환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19.7.3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