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월러스틴이 우리에게 남긴 지적 도전
지난 8월 31일 세상을 떠난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 Wallerstein, 1930~2019)은 1998년 10월부터 매달 2회씩 써온 논평을 7월 1일 500회로 마무리하면서 그 제목을 ‘이것은 끝이다; 이것은 시작이다’(This is the end; this is the beginning)라고 달았다. 그 결론 부분에서 자신은 “아주 폭넓은 의미의 계급 개념으로, 결정적 투쟁은 계급투쟁”이라 생각해왔다고 썼다.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지리적·사회적 차별이 중첩된 복합적 관계를 매개로 작동하기에 자신이 좁은 의미의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인종·민족, 성, 세대 등에서 다면적으로 표현되는 계급관계에 주목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1974년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The Modern World-System) 1권이 출간되었을 당시, 그 책의 의미심장한 함의는 지식계에서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된 논지는 자본주의가 1450~1640년에 걸친 ‘장기의 16세기’에 유럽 중심의 세계경제라는 형태로 출현했고 오늘의 세계는 이 세계경제의 경계가 전지구적 규모로 확장된 결과라는 것이었다. 그후 4권까지 나온 『근대 세계체제』를 비롯한 그의 저작들은 근대 세계사에 대한 인식틀뿐 아니라 이론적 차원에서도 통상적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하게끔 할 정도로 논쟁적이었지만, 그 내용의 골자가 반복 소개되는 가운데도 우리 지식계에서 정면대결로 다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의 서거를 계기로 그가 남긴 지적 도전을 되새겨보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이다.
우선,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한 국가단위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상정하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는 사회체제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그 안에서의 삶이 자족적이고 그 발전의 동력이 내재적인 ‘세계체제’만이 유일하게 참다운 사회체제라고 답한다. 따라서 사회연구의 올바른 ‘분석단위’는 세계체제이며 주권국가들은 이 체제를 구성하는 한가지 구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석단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특정한 시공간에 대한 고려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존 사회과학의 보편주의적 인식론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간 역사학과 사회과학은 국가를 분석단위로 하겠다고 자각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의식에 깊이 배어 있던 보편주의적 인식론에서는 그 단위가 막연히 국가로 상정될 뿐 그 지리적·사회적 공간의 차원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으로 망각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세계체제라는 형태로 출현해 지금껏 팽창해왔다는 입론은 그 자체가 근대사 해석을 넘어 사회운동 전반에 실천적·이론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극복을 목표로 하는 좌파운동 전략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극복해야 할 타깃이 ‘국가’가 아니라 ‘세계체제’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개별 국가의 권력을 장악해 사회를 변혁함으로써 국가를 소멸시킨다는 이행전략이 아니라 세계체제 전체를 겨냥한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 한반도 분단체제를 자기완결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반도에서 작동하는 국지적인 양상으로 이해하면서 그 극복을 모색하는 것도 그런 전략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라 칭해지는 것들은 사실상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특정 국가기구를 지배한 사회주의 운동들일 뿐이고, 실제 사회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민경제들이 존재한다는 발상 자체도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였다는 뜻이 아니라, 애당초 국가는 자본주의적 운운하는 속성을 가질 만한 실체가 못 된다는 뜻이다.
월러스틴의 자본주의관은 18세기 후반을 자본주의로 전환되는 시점으로 설정하고 그 특징을 자유로운 시장경제와 노동력의 상품화(임노동)에서 찾는 통상적 관점과 대립된다. 16세기의 농업자본주의에서 전환점을 보게 되면 그 출현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자본주의는 지리적으로 차별화된 다양한 노동통제방식들(임노동제와 함께 노예제, 강제 환금작물노동 등)의 결합에 기반한 세계적인 분업체제, 그리고 ‘핵심부-주변부-반주변부’라는 지리적 분업체제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유럽 봉건체제의 위기에 따른 혼돈기에 지배층의 적극적 대응으로 시장기제를 적극 활용하는 효율적인 새로운 잉여전유 체제로 출현한 것이다. 이후 이 체제가 공고히 자리 잡자 여기서 자본의 ‘끝없는’ 축적 자체가 체제의 목적으로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팽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끝없는 자본축적을 위한 구조적 조건으로 시장경제의 확장과 결합된 지리적 위계제와 국가, 그리고 독점을 강조한다. 끝없는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비자유노동을 확보하는 지리적 팽창, 독점과 국가권력이 필수적이고, 오히려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은 치명적인 적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탄생과 종말이 있는 역사적 체제이기에 다른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데, 생산비용의 장기적 상승으로 오늘날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 월러스틴의 진단이다. 그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민중과 자본가계급 모두에게 부담이 되기에 21세기 중반경에 종언을 고할 것이라 예측한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는 아니면서도 위계제와 양극화를 온존시키는 체제로 갈 것인가, 한층 민주적이고 평등한 대안적 체제로 갈 것인가의 분기점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혼돈의 분기점에서는 사람들의 집단적 실천이 그 방향을 좌우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종말을 대재앙이나 최후심판의 날처럼 연상할 필요는 없다. 과거에 자본주의의 성립이 하나의 이행과정이었던 만큼 그 종말 역시 하나의 이행과정이 될 터인데, 그는 바람직한 이행 방향은 시장경제의 폐지가 아님을 강조한다. 시장 가능성을 기각해버린 것이야말로 20세기 좌파운동들이 이론과 실천 면에서 저지른 중대한 실수였다는 것이다. 그는 시장을 통한 사회적 조정이 대안적 체제에서도 중요하기에 시장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끝없는 자본축적의 우선성을 약화시켜 제거해가는 방안을 제안하는 한편, 대안적 체제의 작동원리로서 금전이 아니라 성과에 대한 만족이라는 다른 형태의 보상체계가 필요하다는 일종의 문명적 전환의 발상을 제시한다.
이렇듯 근대 세계체제가 500년 만에 전환의 분기점에 있지만, 월러스틴은 이것이 현실 체제의 위기인 동시에 근대적 지식구조의 위기라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의 근대적 지식구조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해왔는데, 이제 그 세계체제가 전환기에 접어들었으니 지식구조 또한 모종의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근대 세계체제가 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세가지 요소로 구성된 문화적·지적 발판을 필요로 했다고 본다. 보편주의적 규범과 인종주의/성차별주의 관행의 역설적인 결합, 자유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지구문화, 그리고 ‘두개의 문화’ 간의 인식론적 구분에 기반한 지식구조가 그것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점차 의구심이 커져가고 68혁명의 지적 대격변 이래 계속 점증하는 도전을 맞게 된 것은 우리가 모종의 전환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예증이라는 것이다.
그는 근대 이전의 그 어떤 역사적 체제도 진(眞)에 대한 추구와 선(善) 및 미(美)에 대한 추구 사이의 분리를 제도화한 적이 없음을 강조하고 그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진선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어려운 과제를 위해 그는 지식인은 반드시 세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의 추구에서는 분석가로, 선과 미의 추구에서는 윤리적 개인으로, 그리고 진선미를 통합하는 데서는 정치적 인간으로. 요컨대 과학과 인문학의 분리를 극복하고 진선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단일한 인식론에 대한 희망은 분석적·도덕적·정치적 지식활동의 통합된 지평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재건 / 부산대 명예교수
2019.9.1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