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전국체전, 한국의 근대를 말하다
10월 4일부터 10일까지 서울에서는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가 열린다. 근대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고, 그마저도 식민과 전쟁, 그리고 분단으로 점철된 한국의 근대사에서 100이라는 수에 다다른 이벤트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수많은 사조와 단체와 이벤트가 명멸하는 와중에 100년을 살아남은 전국체전이기에, 우리는 이를 통해 한국의 근대가 겪은 여러 풍파들을 볼 수 있다. “스포츠를 아는 지식은 사회를 아는 지식”이라는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말처럼, 전국체전 역시 우리 사회에 관한 무언가를 보여주는 장이다.
전국체전의 역사는 1920년 11월 4일에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전조선야구대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3·1운동 이후 열린 문화정치의 공간에서 조선인들의 신체를 근대화·서구화하기 원했던 동아일보와 YMCA 언저리의 지식인들이 모여 1920년 여름에 탄생시킨 조선체육회는, 야구로 시작하여 축구(21년), 정구(21년), 육상(24년), 빙상(25년) 등으로 종목을 확장해갔다. 그리고 1934년 10월에 정구, 야구, 육상, 축구, 농구 종목을 묶어 ‘전조선종합경기대회’라는 이름의 이벤트를 만들었다.
식민지배하 전국체전은 순조롭지 않았다. 조선체육회의 민족 부르주아들은 조선의 신체를 세계 스포츠 무대에 선보이고 그들로부터 인정을 획득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반도의 건아’들을 모은 이벤트가 전국체전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이든 아시안게임이든, 조선의 신체가 세계무대에 나가는 통로는 총독부과 조선체육협회가 ‘내선융화’를 내세우며 만든 조선신궁체육대회(1925~44)였다. 조선체육회는 첫 조선신궁체육대회 당일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점차로 일정은 조정되어갔다. 1930년대 들어 마라톤, 권투, 농구 등 종목에서 조선의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자 민족부르주아들은 그들의 활약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조선신궁체육대회와 메이지신궁체육대회에 주목했고, 조선의 신체들이 일본 국가대표가 되어 세계무대에 데뷔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전국체전은 스포트라이트에서 비껴났지만, 전쟁으로 치달은 식민권력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1937년부터 국제사회와 국제 스포츠계에서 차례로 발을 뺀 식민권력은, 전쟁동원을 위해 ‘내선일체’를 내세우고 조선체육협회와 조선체육회를 통합했다. 1938년부터 전국체전은 중단되었고, 조선신궁체육대회는 ‘총후국민’의 ‘일본정신’ 발휘와 ‘체력봉공’을 위한 이벤트가 되었다. 여전히 조선인들에게 스포츠 무대란 ‘일본을 이기는’ 수단이었지만 말이다. 요컨대 식민지기 전국체전은 자신의 입맛대로 조선인 사회를 규율하려던 식민권력과, 조선사회의 근대화와 서구화에 열광했던 우파 사회지도자들이 각축을 벌이는 동시에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이기도 했다.
해방과 더불어 전국체전은 부활했다. 1948년, 여운형을 따르던 체육인들을 추방한 국가 ‘대한민국’은 조선체육회를 대한체육회로 바꾸고 ‘전국체육대회’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안정적인 재원을 제공하는 대신 이승만 선전에 스포츠를 활용했다.
1960년대 이후 전국체전은 권위주의 국가가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외국 선수들을 앞두고는 한두 문단밖에 말하지 않던 박정희는, 전국체전 개회식이면 어김없이 수분간 선수들과 관중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권위주의 국가에 스포츠란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만들고 ‘사회기강’을 확립할 수 있는 도구였다. ‘조국근대화’에 필요한 신체를 위하여 ‘국민체위’를 향상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다. 유신 후엔 선수들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동작으로 경기장에 입장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전국체전은 병영적 규율사회의 전시장이었다.
무엇보다도 전국체전은 발전국가가 추진했던 ‘조국근대화’의 전시장이자 공연장이었다. 1962년 전주처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경기장을 짓고 개최한 사례도 있지만, 1970년을 넘어가면서 그러한 일은 사라졌다. 전국체전을 개최하는 도시는 국가로부터 많은 보조금을 받아 아스팔트를 깔고, 콘크리트를 붓고, 가로수를 심으며 도시를 개조했다. ‘각하’가 오시는 날을 앞두고는 시민들을 동원하여 껌과 포스터를 떼고 쓰레기를 치우며 도시를 미화했다. 유난히도 질서에 집착하던 전두환의 방문을 앞두고는 아예 낡은 집들을 철거하고 노점상도 단속했다. 발전국가가 만든 지역 불균등체제 속에 자리했던 지역의 도시들은 전국체전을 통해 서울을 닮아갔고, 전국체전을 통해 인정받은 시장과 도지사들은 서울로 향했다. 전국체전은 서울의 외양을 따라하는 지방 도시들의 추격적 근대화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전국체전을 앞두고 연습했던 ‘개조’ ‘미화’ ‘철거’ ‘단속’의 본 공연은 1988 서울올림픽이었다. 조국근대화라는 연극의 클라이맥스였던 그 메가 이벤트 말이다.
1987년은 우리에게 새로운 체제를 선사했지만 전국체전은 바뀌지 않았다. 1989년도엔 전국체전과 세계한민족체육대회를 동시 개최하며 러시아와 중국의 동포들을 초청해 면모를 일신했으나, 이는 문익환과 임수경이 촉발한 남북대화의 열기를 차단하고 북방정치의 성과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회는 2회 만에 중단되었고, 한민족축전은 전국체전과 분리되었다.
민주화는 권위주의 국가를 갈아치웠지만, 발전주의 사회까지 바꿔내진 못했다. 민주화의 결과로 지방자치제가 생겨났지만 도시들은 여전히 전국체전을 유치해 예산을 받아 도로를 넓히고 경기장을 지으며 도시를 개조한다. 쓰레기를 줍고 화단을 만드는 도시미화 역시 지속되고 있다. 서울올림픽에서 서울의 ‘발전’을 목격한 지역의 도시들은, 90년대부터 엑스포와 아시안게임으로 자신의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고, 전국체전은 그마저도 어려운 지자체들이 수행하는 차선책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균형이 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발전주의의 그림자는 선수들에게도 여전하다. ‘국위선양’을 위하여 공부와 담을 쌓고 운동에만 전력하여 메달을 따라 명령했던 국가는 사라졌지만, 메달을 따라는 지상명령은 ‘국민’의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선수들은 사회에서 고립돼 메달을 따는 데 ‘올인’하는 한편, ‘국위선양’과 분리된 전국체전은 김빠진 무대이자 그들만의 리그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제 전국체전은 새로운 세기를 맞는다. 서울시는 이 행사를 계기로 2032년 서울-평양 공동올림픽의 길을 열어가겠다 한다. 분단체제 극복의 이정표가 될 메가 이벤트 준비의 시작점으로 전국체전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준비해야 할 것은 생각보다 많다. 분단체제는 남북 간 체제대결을 만들어냈고, 체제대결을 위한 성장일변도의 정책은 지역불균형을 초래했으며, 체제의 우수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회와 동떨어져 메달에 올인하는 선수들을 길러낸 바 있다.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성과에 집중하느라 불균형에 청맹과니가 된 발전주의 체제는 지금도 전국체전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스포츠를 아는 지식은 사회를 아는 지식이다. 앞으로 열릴 전국체전은 분단체제라는 토양에 싹튼 발전주의를 우리 사회가 넘어설 준비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 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성과에 집착하느라 불균형을 돌보지 않는 이 사회를 바꿔나갈 때 전국체전의 성격 역시 일전할 것이다. 그후에 치러지는 올림픽이라야 평양의 추격적 근대화를 전시하는 무대가 아닌, 남-북-동아시아의 평화적 공존을 보여주는 무대가 될 것이다.
박해남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HK+ 연구교수
2019.10.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