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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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강남의 꿈, 강북의 꿈

이일영

이일영

최근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2019)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여기에는 우리 곁에 보이는 보통 사람들인 여성, 청년, 노동자들이 손에 잡힐 듯 등장한다. 장류진 소설이 판교 테크노밸리 직장인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전언이 과장이 아니다 싶었다. 일찍이 황석영은 화류계 여성, 졸부, 건달 등이 세운 덧없는 ‘강남몽’을 그린 적이 있다. 이에 비하면 장류진은 판교나 또 어디 신도시 보통 사람들의 작고 평범한 기쁨과 슬픔을 소중히 다루고 있다. 가히 살아 움직이는 현실에서의 ‘강남몽’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장류진의 최근작 「연수」(『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에서는 좀더 나아간 사람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성공한 여성 회계사가 강사에게 운전 연수를 받는 이야기다. 주인공의 회사는 아마 강남이나 여의도 정도에 있을 것이다. 사는 집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할 만한 거리에 있으리라 싶다. 유독 운전에 겁이 많은 주인공은 두려움을 떨치고 스스로 도로 운전에 나서도록 이끄는 유능한 강사를 만난다. 그 작달막한 단발머리 아주머니는 강남이나 신도시에서 익숙한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이니, 강북이나 서울 외곽 어디쯤 살고 있을 것 같다. 그이는 주인공보다 “더 씩씩하고 더 멀리 간다”.(『일의 기쁨과 슬픔』 ‘작가의 말’ 부분)

 

이제 진정성을 내세운 세대의 위신은 많이 추락했다. 요즘 젊은이들을 생존을 위한 속물적 적응에 몰두하는 세대로 규정하는 논의도 밀려나고 있다. 젊은 그들은 “마음이 너무 강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정지해 있었을 뿐”이었다.(김금희 『경애의 마음』 279면) 그중에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조금씩 “더 씩씩하고 더 멀리” 가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며칠 전 필자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과 인수동(이 지역은 아직도 수유리라는 이름을 정겹게 느끼는 이들이 많다) 주민들의 창업 준비 이야기를 듣는 ‘한신대 캠퍼스타운 사업’ 프로그램에 참여한 바 있다. 동네를 좋아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꿈을 펼쳐 보이는 이야기들이 자못 감동적이었다. 아마 얼마 후면 이들 스스로, 또는 이들 곁의 이야기꾼들이 ‘강북몽’을 그려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모임에서는 아름다운 마음의 창업이 성공할 가능성을 엿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수유비어’는 수제맥주를 만드는 팀이다. 수유리에는 다양한 주민조직과 대안학교가 있다. 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아빠들이 맥주를 곁들인 수다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이 계속되면서 맥주를 스스로 만들어 마시자는 제안이 나왔고, 2년여 동안 맛있는 맥주를 찾아다니며 즐겁게 양조기술을 공부했다. 마침내 직접 만든 수제맥주가 탄생하면서 동네 축제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맥주를 매개로 즐거운 동네를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우선 모임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한 사람 인건비에 해당하는 수익을 내는 데까지는 나아가보려고 한단다.

 

‘낙과유수’는 태풍 피해를 입은 과수 농가들의 한숨 소리에 반응한 팀이다. 이들은 피해 농가들을 연결하여 낙과(落果)를 원료로 한 음료 사업을 해보기로 했다. 과일주스와 디저트를 만드는 데에는 낙과가 훌륭한 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농가와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레시피를 개발하는 한편, 소비자들과 대면하여 낙과(樂果) 제품을 즐기는 공간도 마련할 예정이다.

 

학부모들은 아이와 함께한 시절의 기억을 나누는 일을 사업화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아이의 그림을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기계 자수를 공부했다. 아이의 소중한 기억을 저장해주는 일로 창업해서 자신과 아이와 이웃 모두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또 어떤 이는 아이에게 10분씩 동화를 읽어주며 자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학부모 모임에서 호평받자 좀더 힘을 내서 출판사를 차리고 책을 직접 만들기에 이르렀다.

 

동네를 지극히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만난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콜링 크리에이티브’는 군대 위문공연을 주로 하다가 문화재생 프로젝트에 뛰어든 청년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지역에서 버스킹 등 여러 공연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아직은 돈 버는 사업모델이 될지 모르겠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강북구가 정말 좋은 동네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동네가 되도록 청년들, 예술가들의 플랫폼을 만들어가는 것을 자신들의 ‘콜링’으로 삼겠다고 한다.

 

‘한:달’은 디자이너, 출판편집자,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마을 출판사이다. 이들은 골목이 많은 인수동에서 마을 사람들이 작가가 되고 독자가 되는 책을 만들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책을 만들고 함께 책을 읽는 마을 서점과 마을 도서관을 세우려 한다. 북한산을 자신들의 눈으로 해석하여 새롭고 다양한 경관을 제공해보겠다는 패기 있는 20대 청년들도 있었다. 전기자전거 투어, 하이킹 투어, 도보 투어 등이 모두 다른 경관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 포인트마다 다른 이야기와 경관을 펼쳐 보이겠다는 생각이 독특했다.

 

이들이 빠른 시간 안에 큰 수익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2016년 기준으로 지역총생산액은 강북구가 2조 8천억원, 강남구가 60조원이었다. 무려 21배 이상 차이가 난다. 강남으로 판교로 향하는 거센 흐름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북한산 자락이 흐르고 골목 많은 수유리를, 더 재밌고 좋은 동네로 만드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별이 총총한 하늘이 더이상 길을 알려주지 않는 시대이다. 깜깜한 밤의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좀더 “씩씩하고 멀리 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일영 / 한신대 교수, 경제학

2019.12.18. ⓒ창비주간논평